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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전통사찰 66] 달마산의 암봉을 병풍으로 두른 단아한 사찰 '미황사'
  • 박광준 기자
  • 등록 2022-11-24 09:00:17
  • 수정 2024-04-02 03:58: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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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광준 기자] 남해의 금강산이라 불리는 달마산(489m) 서쪽에, 우리나라 육지의 사찰 가운데 가장 남쪽에 자리한 미황사는 신라 경덕왕 8년(749년)에 세워졌다. 


불교가 한창 흥할 때는 불교의 요람이 돼 스님도 많았고 주위에 12암자를 거느리고 있었다. 미황사는 조선시대 중.후기에 걸쳐 이 같은 융성을 거듭하다 100년전 주지 혼허(渾墟) 스님이 중창을위해 모금차 군고단(軍鼓團)을 이끌고 완도와 청산도를 가다 배가 조난을 당한 뒤에 점차 퇴락하게 됐다고 한다. 퇴락한지 100년이 흐른 후, 현재 미황사에 주석하고 있는 지운스님과 현공스님, 금강스님이 1989년에 주인없이 비어 있던 미황사를 찾아 흔적만 남아 있던 명부전, 삼성각, 만하당, 달마전, 부도암 등을 복원하고 퇴락한 세심당을 다시 일으켜 세웠다. 


대웅전은 현재 공사중10여년 간 중창불사 원력을 세워 끊임 없이 노력한 결과 이제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아름다운 사찰로 면모가 일신됐다. 현재의 전각은 대웅보전 (보물), 응진당 (보물)과 명부전, 삼성각, 만하당(선원), 달마전(승방), 세심당(수련원), 요사체(후원), 향적전(객실), 안심료(후원), 자하루(누각), 하심당이 반듯하게 자리하고 있다.


우리나라 육지의 절 가운데 가장 남쪽에 있는 미황사는 그 달마산 서쪽 중턱에 앉아 먼 데서 반짝이는 불빛처럼 조그맣게 빛나고 있다. 절로 들어가는 길이 숲 사이로 나 있을 뿐이다. 지금은 대웅보전(보물 제947호)과 응진전(보물 제1183호), 요사채 등 건물 몇 채만이 남아 경내가 조촐하고, 숲속에 떨어져 있는 넓은 부도밭과 사적비가 번성했던 옛날을 말해줄 뿐이다.



달마산 서쪽 기슭 양지바른 터에 자리잡은 미황사 뒤로 달마산의 바위 능선이 병풍처럼 둘러쳐져 있다. 길가의 나무들을 일주문과 해탈문 삼으면서 절을 향해 올라가자면 정면에 대웅보전이 보이고 그 아래에 축대가 두 단 있다. 아래쪽 축대 위 평면에는 커다란 문루가 있었는지 풀 속에 주춧돌이 여럿 박혀 있고 두번째 계단을 올라서면 대웅보전 앞마당이다. 


대웅보전은 정면 3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 다포식 집으로, 뒤편의 산자락과 잘 어울려 절 전체에 안정감을 주는 중심법당이다. 1982년에 보수할 때 법당중수상량문(1754년 작성)이 적힌 대들보가 발견됐는데 그에 의하면 대웅보전은 응진전과 함께 1751년에 중수됐다.



건물의 외부는 단청이 다 지워져 나뭇결이 그대로 드러나 있으나 내부에는 화려한 공포와 함께 학과 모란, 제불도와 여러 나한들이 가득 그려져 있다. 막돌을 쌓아올린 높직한 기단 위에 연꽃잎을 새긴 둥근 주춧돌을 놓고 배흘림이 있는 둥근 기둥을 세웠다. 특히 주춧돌에 다른 데서 보기 드물게 게나 거북 등 바다생물이 새겨져 있어서 창건설화와 관련된 상상력을 자극한다. 포작은 안으로 4출목, 밖으로 3출목으로 화려하게 짜여 조선 중후기 다포집 양식의 특징을 잘 보인다.




연꽃잎이 새겨진 주춧돌에는 다른 곳에서는 잘 볼 수 없는 게와 거북 등이 조각돼 있다. 건물 외부는 비바람에 닦여서 단청이 다 지워지고 나뭇결이 보드랍게 살아 따뜻한 느낌을 주며 정면 기둥 위의 용머리 장식 등 조각 솜씨가 돋보인다. 법당 안에는 가운데 삼존불이 모셔져 있고 후불탱화가 걸려 있고 천장 우물반자에 범서로 ‘옴마니반메훔’자가 적혀 있다. 그 주변은 학이나 모란 그림으로 장식됐고 그밖에도 벽 위나 천장에 제불도와 먹선으로 그린 나한도 등 눈길을 끌 만한 그림들이 있다.





대웅보전은 미황사의 중심 전각이다. 한 가운데에는 석가모니불, 좌우에는 아미타불, 악사여래불이 모셔져 있다. 1598년 중창했고, 1660년, 1754년, 1982년, 2007년에 거듭 중수했다.내부의 대들보와 천장은 산스크리트어 문자와 천불도로 장엄돼 있는데 그 아름다움이 인도의 아잔타 석굴 벽화, 중국 둔황막고굴의 천불벽화에 비견되어지기도 한다. 응진당은 석가모니 부처님의 제자 가운데 신통력이 뛰어난 16분의 아라한들을 모신 전각이다.


대웅보전 뒤편에는 ‘비를 내리게 하는’ 괘불을 넣어 두는 기다란 목궤가 있고 앞쪽 계단 아래에는 괘불걸이가 나란히 서 있다. 서로 다른 시기의 것인 듯 하나는 위쪽이 둥글고 또 하나는 네모지게 마무리됐다.


미황사 대웅보전은 보물 제947호로 지정돼 있다.


응진전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다포계 겹처마 팔작지붕집으로 대웅보전과 같은 건축양식을 보이고 있어 같은 시기에 같은 목수에 의해 지어졌을 것으로 추정된다. 게나 거북 등이 새겨진 독특한 대웅보전 기둥 초석과 대웅보전이나 응진전 안벽과 천장의 18세기 중반 벽화들을 만나면서 갖는 즐거움, 또 응진전과 명부전 안에 모셔진 보살, 나한, 동자, 신장상 등 조각상을 살펴보는 재미도 있다. 



응진(應眞)은 참다운 존재의 실상을 환히 깨닫고 해탈에 이른 이들을 의미하는 산스크리트어인 ''아라한''의 한자어이다. 정유재란 때 소실됐다가 대웅전과 함게 중수돼 오늘에 이르고 있다. 내부 벽면에는 수묵으로 그려진 나한 벽화가 있는데 선(禪)의 경지를 보여주는 유려한 선(線)맛으로 이름이 높다.


대웅보전 앞마당에서 오른쪽으로, 동백나무와 소나무가 숲을 이루고 바닥에는 산죽이나 진달래 등이 섞여 자라는 숲속 길로 소풍 가듯이 걸어들어가면 돌담에 싸인 부도밭이 나온다. 물론 규모도 크지만, 이 부도밭의 감동은 규모에서만 오는 것이 아니고 그 하나하나를 들여다보고 주변을 돌면서 마음이 순화되는 데 있다. 


미황사의 창건 연대나 사적에 대해서는 별다른 기록이 없고 다만 부도밭 가는 길에 숙종 18년(1692)년에 세워진 사적비가 하나 있다. 비문은 당시 병조판서를 지낸 민암이 지었는데, 다음과 같은 창건설화를 적고 있다.


신라 경덕왕 8년(749) 8월에 돌로 된 배(石船) 한 척이 아름다운 범패 소리를 울리면서 사자포(땅끝마을) 앞바다에 나타났다. 배는 며칠 동안이나 사람들이 다가가면 멀어지고 돌아서면 다가오고 했는데, 의조(義照)화상이 두 사미승과 100여 명의 제자들을 이끌고 목욕재계하고 기도를 했더니 육지에 닿았다. 배 안에는 금으로 된 사람(金人)이 노를 잡고 있었고 금으로 된 함과 검은 바위가 있었다. 금함 안에는 화엄경, 법화경 같은 경전과 비로자나불, 문수보살, 보현보살과 40성중.53선지식.16나한의 상과 탱화 등이 들어 있었고 검은 바위를 깨뜨렸더니 검은 소가 뛰어나와 금세 큰 소가 됐다.


그날 밤 의조화상의 꿈에 금인이 나타나서, 자기는 우전국(인도) 왕인데 금강산이 일만불을 모실 만하다 해 불상들을 싣고 갔으나 이미 절이 많이 있어서 봉안할 곳을 찾지 못하고 돌아가던 길에 금강산과 비슷한 이곳을 보고 찾아왔는데, 경전과 불상을 소에 싣고 가다가 소가 멈추는 곳에 절을 짓고 안치하면 국운과 불교가 흥왕할 것이라고 말했다.



다음날, 의조화상이 소에 경전과 불상을 싣고 나섰더니 소가 달마산 중턱에서 한 번 넘어지고 또 일어나서 한참 가다가 크게 울며 넘어지더니 일어나지 못했다. 의조화상은 소가 처음 멈췄던 곳에 통교사(通敎寺)를 짓고 마지막 멈춘 곳에 미황사를 지었다. 절 이름을 미황사라고 한 것은 소의 울음소리가 매우 아름다웠다고 해서 ‘미’자를 넣고 금인의 빛깔에서 ‘황’자를 딴 것이라 한다.


민암은 사적기에 이 창건설화를 적은 후 “석우(石牛)와 금인의 이야기는 너무 신비해 속된 귀로는 의심이 갈 만하나 연대를 따져 고증하려는 것은 부당한 일이다. 지금이라도 미황사에 가면 경전과 금인, 탱화, 성상 등이 완연히 있다”고 덧붙였다. 하지만 지금 미황사에는 설화를 뒷받침할 만한 유물은 물론이고 조선 시대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갈 만한 유물도 없고 의조화상이라는 인물의 행적도 알 수가 없다.


한편, 나름의 상징체계와 어법을 가진 설화를 곧이곧대로 역사적 사실로 받아들일 수는 없다 해도 이 창건설화는 우리나라 불교의 남방 해로 전래설을 뒷받침하는 자료가 된다. 불교는 4세기 말에 중국을 통해 우리나라 북쪽을 거쳐 전파됐다는 것이 통설이다. 그러나 우리나라 서남 해안지방에는 불상이나 경전 등이 바다를 건너 전해져서 그곳에 절을 지었다는 설화가 많이 퍼져 있다. 그 중에서도 미황사 창건설화는 인도에서 직접 불적이 전래됐음을 말하고 있다. 




미황사에는 가뭄이 들 때 걸어 놓고 기우제를 지내면 비를 내리게 한다는 괘불이 전해져 온다. 아무때나 볼 수는 없지만, 영조 3년(1727)에 조성된 이 괘불은 근래에도 몇 차례 ‘영험을 증명’한 적이 있고 심지어 기우제 도중에 비가 쏟아져서 배접이 떨어진 일까지 있다. 1993년에 손상된 괘불을 수리하고 기념행사를 가졌었다. 그림은 독존도 형식이고 머리 양옆에 합장한 부처가 세 분 앉아 있고 무릎 좌우에는 향로를 든 보살상과 ‘금함’을 든 사자상이 그려져 있어서 창건설화를 반영한 것으로 보인다.


미황사 아랫마을은 불경을 지고 쓰러져 죽은 소를 묻은 곳이라고 해 우분동(牛墳洞)이라고 불린 적도 있었다.


서해바다로 지는 화려한 낙조와 수려한 달마산을 배경으로 한 미황사는 방문객들에게 늘 즐거운 풍경을 제공해준다. 우선 뒤편의 산자락과 잘 어울리는 위치에 알맞은 규모로 자리잡은 절터와 대웅보전의 앉음새에서 편안함이 느껴진다. 특히 대웅보전 주춧돌에는 다른 곳에서 보기 드문 거북, 게 등 바다생물이 새겨져 있고, 가뭄이 들 때 걸어놓고 기우제를 지내면 비를 내리게 한다. 



대웅보전 앞마당에는 긴 돌확이 있어 항시 맑은 물이 찰랑거리고, 그 앞을 가로질러 오른쪽 숲속으로 난 길을 들어서서 소나무와 동백나무 사이로 길을 따라 10분 정도 가면 부도 밭에 닿는다. 부도마다 거북, 게, 새, 연꽃, 도깨비 얼굴 등이 새겨져 있대. 이곳에서 보는 다도해와 서해의 낙조는 매우아름다우며, 절 바로 아래에는 동백나무 동산이 아름답게 펼쳐져 있다.


나름의 상징체계와 어법을 가진 설화를 곧이곧대로 역사적 사실로 받아들일 수는 없다 해도 이 창건설화는 우리나라 불교의 남방 해로 전래설을 뒷받침하는 자료가 된다. 불교는 4세기 말에 중국을 통해 우리나라 북쪽을 거쳐 전파됐다는 것이 통설이다. 그러나 우리나라 서남 해안지방에는 불상이나 경전 등이 바다를 건너 전해져서 그곳에 절을 지었다는 설화가 많이 퍼져 있다. 그중에서도 미황사 창건설화는 인도에서 직접 불적이 전래됐음을 말하고 있다. 


창건 이후 수백 년 동안의 미황사 사적은 전해지지 않고, 선조 30년(1597)에 정유재란으로 소실되자 이듬해에 만선(晩善)이 중건하고 현종 1년(1660)에 성간(省侃)이 3창했고 그후 몇 차례 중수됐다고 한다.


미황사의 규모가 지금처럼 작아진 것은 언제, 무엇 때문일까? 150년쯤 전만 해도 미황사는 스님이 40여 명이나 있고 재산도 많은 큰 절이었다. 당시 절에서는 큰 중창불사를 벌이려고 스님들이 ‘궁고’를 꾸려 해안을 돌면서 일종의 순회공연을 하고 시주를 모았다.



어느 날, 설쇠 맡은 스님이 어여쁜 여인의 유혹을 받는 꿈을 꾸고는 오늘은 쉬자고 했으나 주지스님이 듣지 않았다. 그들은 완도, 청산도로 공연을 하러 가던 길에 폭풍을 만나서 배는 침몰하고 설장고 맡은 스님 하나만 빼고는 모두 떼죽음을 당했다. 남은 것은 절에 있던 나이 많은 스님 몇 분과 궁고 꾸리느라 투자한 빚더미뿐, 미황사는 그만 망해 버렸다.


전설 같은 이 이야기를 뒷받침하듯, 미황사 아래 서정리 사람들은 비바람이 치는 을씨년스런 날씨를 두고 ‘미황사 스님들 궁고 친다’는 말을 속담처럼 쓰고 있다. 송지면 산정리 마을에 전승되고 있는 12채 궁고의 깃발에는 삿갓 쓴 스님이 바다거북을 탄 모습이 그려져 있다.


옛 통교사터에 자리잡은 부도밭이 한때 융성했던 미황사의 역사를 말없이 보여주고 있다. 부도밭에 앞서 만나는 것은 반쯤 무너진 낮은 돌담과 아담한 대밭에 한 비석이 있다. 이것은 숙종 18년(1692)에 세워진 미황사 사적비로, 미황사 창건설화를 소개한 민암의 사적기가 여기에 적혀 있다. 비석의 폭은 1.3m 정도이며 아래쪽이 땅속에 묻혀 있는데 드러나 있는 높이가 2.9m 가량 된다. 돌담으로 둘린 이 근처는 통교사가 있던 자리라고 한다.



대밭이 끝나는 무렵쯤에는 맑은 물이 넘치는 큰 돌확이 싱싱한 풀잎에 싸여 있다. 거기서 또 무너진 돌담을 넘으면 곧 부도밭, 모두 24기의 부도와 부도비가 잃어버린 절의 역사를 말하듯 앞서거니 뒤서거니 늘어서 있다. 규모 면에서는 근처의 대둔사 부도밭에 비교할 수도 있겠지만, 소탈하고 정갈한 분위기에서는 이곳이 윗길인 듯하다. 둥글거나 네모진 몸돌에 지붕돌을 얹은 이곳의 부도들은 모두 조선 후기에 만들어진 것이지만 18세기 중반을 넘는 것은 없어서, 150년 전쯤 절이 망했다는 아랫마을 사람들의 이야기에 신빙성을 더해 준다.


부도마다 새겨진 거북, 게, 새, 두꺼비, 연꽃, 도깨비 얼굴, 또 용머리들은 어린아이의 그림처럼 꾸밈이 없어서 순식간에 사람을 무장해제시켜 버린다. 특히 거북이나 게 등이 많은 점은 대웅전 주춧돌의 그것과 함께 창건설화의 내용을 상기시키면서, 이끼가 덮인 지붕돌이나 받침돌에 새겨진 용머리들의 표정은 시골 사람들의 사진첩을 보는 듯 소박하고 다양하다.


부도밭의 부도 여기저기에는 용머리, 거북, 게, 새, 두꺼비와 도깨비 얼굴 들이 꾸밈없이 조각돼 있다. 왼쪽 부도의 지붕돌에는 용머리가, 오른쪽 부도의 기단부에는 새조각이 새겨져 있다./사진-윤정숙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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