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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궐 이야기 57] 자연을 경영하는 우리나라 정원의 백미 '창덕궁 후원(1)'
  • 이승준 기자
  • 등록 2024-04-15 17:05:24
  • 수정 2024-04-15 17:49: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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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창덕궁 후원/부용정-사정기비각

부용정 전경[이승준 기자] 창덕궁이 아름다운 궁궐의 명성을 얻게 된 것은 아마도 후원 때문이 아닐까? 창덕궁 후원은 10만 평에 이르는 정원으로 계곡 곳곳에 건물과 정자를 지어 자연과 인공이 어우러지는 환상적이다. 이는 중국이나, 일본뿐만 아니라 세계 어느 나라에서도 볼 수 없는 한국만이 가지고 있는 정원의 미학이다. 


우리 나라를 방문한 프랑스 건축가협회장 로랑 살로몽은 "한국의 전통 건축물은 단순한 건축물이 아니라 자연이고 풍경이다. 인위적으로 세운 것이 아니라 자연 위에 그냥 얹혀 있는 느낌이다. 그런 점에서 한국의 전통 건축은 미학적 완성도가 아주 높다고 생각한다"고 말한 바 있다. 



이러한 창덕궁 후원은 별도의 이름이 없다. '조선왕조실록‘에서도 궁궐 뒤쪽에 있어 ’후원‘, 북쪽에 있어 ’북원‘, 궁궐 안에 있다고 해서 ’내원‘, 일반인들이 들어 갈 수 없어 ’금원‘이라고 했고, 나중에는 ’비원‘이라고 불렀다. 


창덕궁 후원은 크게 네 영역으로 나뉜다. 부용정.규장각 영역, 부용정과 옥류천 사이에 존덕정을 비롯한 정자 영역, 양반가의 저택을 본떠 지은 연경당, 그리고 마지막으로가장 안쪽 깊숙한 곳에 옥류천 영역이 있다. 



창덕궁 후원 자리는 백두대간에서 갈라져 나온 광주산맥에서부터 북한산, 북악산을 거쳐 내려온 매봉이 산자락을 치마폭처럼 넓게 편 곳으로, 그 옛날에는 호랑이가 나왔다고 한다. ’조선왕조실록‘ 세조 11년(1465) 9월 14일자에는 ’창덕궁 후원에 호랑이가 들어왔다는 말을 듣고 드디어 북악산에 가서 얼룩무늬 호랑이를 잡아오다‘는 실제로 창덕궁에는 호랑이기가 자주 출몰했다는 기사가 있다. 


티켓을 확인 후 처음으로 맞게 되는 네모난 연못 가운데 섬에는 소나무가 있고 사방으로 영화당, 부용정, 규정각, 사정기비각이 있다. 



처음 이 정원을 만들 생각을 한 이는 세조였다. ’조선왕조실록‘에 의하면 세조는 재위 5년 9월 ’창덕궁 후원으로 나아가 좌우로 못을 파게 하고, 인부들에게 술과 고기를 내려주고 매 사냥을 구경했다‘고 한다. 


재위 7년 (1461) 11월에는 거처를 경복궁에서 창덕궁으로 옮겼고, 다음 해 1월엔 후원 동쪽 담장을 넓혀쌓기 위해 그 안에 있던 민가 73채를 이주시키면서 한성부로 하여금 그들이 원하는 바에 따라 빈 땅을 내주고, 그때 연못을 판 곳이 현재의 부용지이다. 



사람이 사는 공간이라면 가장 먼저 샘물이 필요하다. 세조는 4개의 우물을 팠다. 그 우물의 이름을 마니정, 파려정, 유리정, 옥정이라 이름을 짓고는 ’마니정가‘를 지었다. 훗날 부용지를 개축한 숙종이 이를 기념해 연못 서쪽에 사정기비를 세우고 “우리 세조대왕께서는 본래 샘물을 사랑하셨는데...일찍이 좌우로 나누어 열무정 가까이 우물 될 만한 곳을 물색하게 했더니 과연 각기 두 곳을 얻었다. 물은 차고 맛이 좋아 감로와 옥설 정도에 비길 바가 아니었다...대체로 그 우물은 가마솥은 위로 향하여 놓은 것처럼 생겼는데 안에는 물이 겨우 두어 섬쯤 있어서 사람이 엎드려서 물을 뜰 만했다...그러나 불행히도 누차 병화를 겪어 옛 3정취가 모조리 없어지고 오직 두 우물만이 예전 모습으로 남았는데 풀이 자라 쑥대밭이 되었으니 보기에도 쓸쓸하기만 했다”고 말했다.    



훗날 부용지를 개축한 숙종이 이를 기념해 연못 서쪽에 사정기비를 세웠다. 


하지만 숙종 때까지만 해도 남아 있던 우물 두 곳이 세월의 흐름 속에 또다시 매몰돼 자취조차 알 수 없었으나, 이후 2008년 부용지 주변 관람로 정비공사 도중 연못 북서쪽  모서리에서 우물 하나가 발견되어 발굴조사를 통해 그 모습이 드러났다. 우물은 그 이름이 무엇인지는 확인되지는 않았으니 이것이 부용지의 연륜을 말해주는 첫 번째 유적으로 볼 수 있다.

 

부용지는 동서 35미터, 남북 30미터에 이르는 장방형 연못으로 사방에 화강암 장대석을 쌓아  마감했고, 연못 가운데에는 작고 동그람 섬이 있다. 이렇게 못이 네모지고, 가운데 둥근 섬 하나를 둔 것은 천원지방(天圓地方)의 동양적 우주관을 반영한 것이다. 



부용지에는 본래 숙종 33년에 건립한 택수제라는 정자가 있었다. 그러나 정조가 재위 16년(1792)에 이를 헐고 지금의 부용정을 지었다. 부용은 연꽃으로 연꽃처럼 아름답다는 뜻이자 못에 연못이 많다는 뜻이기도 하다. 


부용정의 구조를 살펴보면, 평면은 열 십(十) 자형을 기본으로 4면 모두 팔작지붕으로 날개를 펴고 있다. 마루 주위에는 난간을 곱게 둘렀고 그 안쪽으로는 세 살문과 아(亞)자 살문의 분합문을 달고, 다시 그 안쪽으로는 불발기찬을 달아 복도와 방을 구별했다. 부용정은 화려하면서도 사치스럽지 않은 한국의 미학을 잘 보여주고 있다. 


부용정을 옆에서 보면 정자의 팔각 돌기둥 주춧돌이 물속에 잠겨 있다. 이렇게 정자를 연못가가 아니라 연못을 두 발에 담근 듯 지은 것은 정자에 앉았을 때 시선이 곧1바로 연못에 떨어지게 하기 위한 것으로, 실제로 분합문을 다 열어 걸어두면 화려한 배 모양이 된다./다음회에 계속:사진-이승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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