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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전통사찰 63] 문화재의 보고(寶庫) 장흥 보림사(寶林寺)
  • 박광준
  • 등록 2022-11-15 08:00:15
  • 수정 2024-04-02 03:56: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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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광준 기자] 보림사는 전라남도 장흥군 유치면 가지산(迦智山)에 있는 남북국시대 통일신라의 승려 체징이 창건한 사찰로, 신라 선문구산(禪門九山) 중에서 제일 먼저 개산(開山)한 가지산파(迦智山派)의 중심 사찰이었다. 현재는 대한불교조계종 제21교구 본사인 송광사의 말사이다.


이 절은 가지산파의 법맥을 이어받은 체징(體澄)에 의해 창건됐다. 신라 헌안왕의 권유로 체징은 이 산에 들어와 터를 잡고, 860년에 대찰을 창건해 가지산파의 중심사찰로 발전시켰다. 



그 뒤 끊임없는 중창과 중수를 거쳐 6.25전쟁 때 소실되기 전까지는 20여 동의 전각을 갖춘 대찰이었으나, 공비들이 소굴로 이용했던 이 절에다 도주하기 직전 불을 놓아 대웅전 등 대부분의 건물들이 불타고, 단지 천왕문(天王門)과 사천왕(四天王).외호문(外護門)만 남았다. 


불타버린 대웅전은 서쪽을 향해 세운 정면 5칸, 측면 4칸, 중층팔작(重層八作)지붕의 큰 건물이었다. 외관과는 달리 내부는 2층까지 통해서 한 방으로 만들고, 중앙 단상에는 금동석가여래상과 양협시불을 안치했다.


외호문구조양식으로 보아 조선 초기에 중건된 것으로 추정되는 우수한 수법으로, 이후 주민들은 대적광전을 다시 지어 대웅전에 있었던 비로자나불을 모셨다. 현존하는 당우로는 대적광전과 천왕문.영각(影閣).요사채 등이 있다. 



사천왕문 안에 봉안된 사천왕상은 1780년(정조 4)에 조성된 국내 목각상의 대표적인 것으로, 최근 중수해 옛 모습을 그대로 복원했으나, 복장 속의 비장품은 도굴꾼들에 의해 망가진 상태로 방치됐다. 




사천왕문은 1981년 전라남도 유형문화재로 지정됐다. 중요문화재로는 1962년 국보로 지정된 보림사 남북 삼층석탑 및 석등, 1963년 국보로 지정된 보림사 철조비로자나불좌상, 보림사 동 승탑, 보림사 서 승탑, 보림사 보조선사탑, 보림사 보조선사탑비 등이 있다. 


삼층석탑은 남쪽 석탑이 높이 5.4m, 북쪽 석탑이 5.9m이고, 석등은 높이 3m로서 이들은 모두 870년(경문왕 10)에 건립됐다. 비로자나불좌상은 858년(헌안왕 2)에 김언경(金彦卿)이 자신의 봉급을 모아 조성한 불상이다.


# 장흥 보림사 철조비로자나불좌상



전라남도 장흥군 유치면 보림사에 있는 통일신라시대의 불상으로, 1963년 국보로 지정됐다. 높이 273㎝. 지금은 광배(光背)와 대좌를 모두 잃어버리고 불신만 남아 있다. 이 불상은 왼쪽 어깨 부분에 8행의 불상 조상기가 음각돼 있다. 명문에는 858년(헌안왕 2) 7월 17일에 당시 무주(武州)와 장사(長沙)의 부관(副官)으로 있던 김수종(金遂宗)이 발원해 이 불상을 주성했다고 한다. 그리고 보조선사탑비(普照禪師塔碑)에는 859년 부수(副守) 김언경(金彦卿)이 사재를 들여 2,500근의 노사나불(盧舍那佛)을 주성했다고 한다. 


사진출처/문화재청

위의 두 기록을 종합해보면, 이 불상은 858년에 착수돼 859년에 완성됐을 것으로 알 수 있다. 현재의 머리 부분은 나발(螺髮) 등을 덧붙인 것이어서 그런지 몸집에 비해 크게 보인다. 머리와 불신의 비율이 대구 동화사 비로암 석조비로자나불좌상(보물, 1963년 지정)과 비슷한 것으로, 당시의 불상 비례를 반영하고 있다. 육계(肉髻)가 비교적 큼직하고, 편편한 콧잔등, 가늘고 긴 눈, 사다리꼴의 두드러진 인중, 작은 입 등은 상당히 추상화된 경향을 나타낸다. 당당한 자세와 가슴의 표현, 팽창된 체구 등 건장한 불신을 표현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지권인(智拳印)을 한 상체가 약간 움츠러들어 위축된 듯한 느낌을 준다. 


즉 당당하게 보이면서도 전체적으로는 긴장감과 탄력성이 줄어들었다. 이와 같은 특징은 옷주름 선에서도 잘 나타난다. 통견(通肩)의 법의는 양어깨를 감싸고, 가슴 앞에서 V자형으로 모아지고 다시 두 팔에 걸쳐 무릎으로 흘러내리고 있다. 평행의문선(平行衣文線)의 옷주름은 유려한 곡선을 이루면서도 힘없이 늘어져 탄력이 없이 표현됐다. 


사진출처/문화재청이와 같이 다소 해이해진 형태와 선의 특징은 도식적이고 기하학적인 특징의 묘사와 함께 9세기 후기 불상 양식의 선구적인 면을 보여준다. 이러한 양식이 더 발전해 철원 도피안사 철조비로자나불좌상(국보, 1962년 지정)이나 봉화 축서사 석조비로자나불좌상(보물, 1989년 지정)과 같은 9세기 후기 조각 양식으로 정착됐다. 


이 불상은 조성 연대가 확실한 불상으로, 당시 유사한 지권인의 비로자나불상의 계보를 확인할 수 있는 기본 자료가 되는 통일신라 말기의 대표적인 철불좌상이라 할 수 있다.


# 장흥 보림사 동 승탑


1963년 1월 21일 보물로 지정됐다. 전라남도 장흥군 유치면 보림사에서 북동쪽으로 약 500m 떨어진 숲에 자리한 승탑(僧塔)이다. 승탑(부도)은 승려의 사리나 유골을 봉안하는 묘탑(墓塔)으로, 고승이 입적한 후 그의 죽음을 추모하고 존경심을 나타내기 위해 세웠다. 


보림사 동 승탑 전경/사진출처-문화재청승탑 건립에 대한 기록이 남아 있지 않아 승탑의 주인과 정확한 건립 연대는 알 수 없지만, 승탑의 조형 양식으로 볼 때 통일신라 후기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장흥 보림사 동 승탑이 위치한 부도전(浮屠殿: 승탑을 모아 놓은 장소)에는 최근에 조성된 승탑을 포함해 총 8기의 승탑이 언덕을 따라 위치하고 있다. 이 중 장흥 보림사 동 승탑이 가장 빼어난 작품으로 평가된다.


화강암으로 제작된 팔각원당형 승탑으로, 높이는 3.6m이고 기단부.탑신부.상륜부로 구성됐다. 


기단부는 하대석.중대석.상대석을 얹어 구성했다. 하대석은 2단으로 조성됐고, 하단에는 팔각의 돌 각 면에 안상(眼象)을 새겼고, 상단에는 반구형 돌에 복련(覆蓮: 엎어놓은 연꽃무늬)을 조각한 후, 꽃잎에 꽃봉오리 문양을 장식했다. 중대석은 팔각의 돌기둥으로 아무런 장식을 하지 않았고, 상대석에는 앙련(仰蓮: 솟아오른 연꽃무늬)을 조각해 하대석의 복련과 대칭을 이룬다.



탑신부는 승려의 사리를 보관하는 곳으로, 전체 8개의 면 중 한 쪽 면에만 문(門) 모양을 새기고, 그 안에 자물쇠 문양를 조각했다. 지붕돌(옥개석)은 팔모지붕의 형태로 제작됐고, 지붕의 추녀 끝에는 꽃봉오리 문양의 막새를 조각했다.


상륜부에는 보륜(寶輪), 보개(寶蓋), 보주(寶珠) 등을 차례로 올렸다.


# 장흥 보림사 남.북 삼층석탑 및 석등


가지산 남쪽 기슭에 있는 보림사는 통일신라 헌안왕의 권유로 체징(體澄)이 터를 잡아 헌안왕 4년(860)에 창건했다. 그 뒤 계속 번창해 20여 동의 부속 건물을 갖췄으나, 한국전쟁 때 대부분이 불에 타 없어졌다. 절 앞뜰에는 2기의 석탑과 1기의 석등이 나란히 놓여 있다.


남북으로 세워진 두 탑은 구조와 크기가 같고, 2단으로 쌓은 기단(基壇)위에 3층의 탑신(塔身)을 놓고 머리장식을 얹은 통일신라의 전형적인 석탑이다. 기단은 위층이 큰데 비해 아래층은 작고, 위층 기단의 맨윗돌은 매우 얇다. 탑신부는 몸돌과 지붕돌을 각각 하나의 돌로 만들어 쌓았고, 각 층 몸돌에 모서리기둥을 새겼다. 



2.3층은 희미하게 나타난다. 지붕돌은 밑면의 받침이 계단형으로 5단씩이고, 처마는 기단의 맨윗돌과 같이 얇고 평평하고며, 네 귀퉁이는 심하게 들려있어 윗면의 경사가 급해 보인다. 탑의 꼭대기에는 여러 개의 머리장식들을 차례대로 가지런히 올려 놓았다.


석등 역시 신라의 전형적인 모습으로, 네모꼴의 바닥돌 위에 연꽃무늬를 새긴 8각의 아래받침돌을 얹고, 그 위에 가늘고 긴 기둥을 세운 후, 다시 윗받침돌을 얹어 불을 밝혀두는 화사석(火舍石)을 받쳐주도록 했다. 화사석은 8각으로 4면에만 창을 뚫어 놓았고, 그 위로 넓은 지붕돌을 얹었는데 각 모서리 끝부분에 꽃장식을 했다. 석등의 지붕 위에는 여러 장식들 놓여 있다.


이들 석탑과 석등은 모두 완전한 형태를 지니고 있다. 특히 탑의 머리장식은 온전하게 남아 있는 예가 드물어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탑 속에서 발견된 기록에 의해 석탑은 통일신라 경문왕 10년(870) 즈음에 만들어진 것으로 밝혀졌고, 석탑과 함께 석등도 같은 시기에 만들어졌을 것으로 보고 있다.


사진출처/문화재청 석탑 2기와 그 사이에 있는 석등 한 기로 구성된다. 탑의 높이는 남탑이 5.4 m, 북탑이 5.9 m이고, 석등은 8각 형태이다. 전형적인 통일신라 시대 양식으로 탑의 상륜부까지 온전히 남아 가치가 높다. 1932년 도굴꾼이 사리장치를 훔치려 했으나 실패했다. 이때 쓰러진 탑신을 복구하던 중 탑신부 사리장치에서 사리와 함께 탑지를 발견했다. 탑을 조성한 때가 신라 경문왕 10년(870)이란 내용이 있었다.


본래 석등은 부처의 진리를 상징해 빛으로서 그 뜻을 나타내는 조형물이다. 화엄사, 부석사를 비롯한 고찰들은 석등 하나를 정전의 정면에 비치해 부처의 진리를 상징하는 조형물의 기능을 했다. 그러나 후대에는 의미가 퇴색돼 조명기구로 전락했기 때문에 정전에 모신 불상의 시선을 피해 정전의 좌우에 하나씩 배치하는 경향이 있다.


통일신라 시대에 조성된 석등답게 본래 의미대로 석등 하나가 정전 중앙에 배치됐다. 탑과 함께 온전한 세트로 보존돼 가치가 높다. 국보 제44호로 지정됐다.


# 장흥 보림사 목조사천왕상



사천왕은 갑옷을 입고 위엄이 충만한 무인상을 하고 동.서.남.북의 사천국(四天國)을 다스리는데, 우리나라에서는 통일신라 초기부터 나타나기 시작해 조선시대에는 사찰입구에 사천왕문을 세워 모시고 있다. 대웅전을 향해 오른쪽에는 동방 지국천왕(持國天王)과 북방 다문천왕(多聞天王)이, 왼쪽에는 남방 증장천왕(增長天王)과 서방 광목천왕(廣目天王)이 위치하고 있다.


동방 지국천왕은 호화롭게 장식된 보관을 쓰고 얼굴은 분노한 표정을 했고, 복장은 갑옷과 천의(天衣)를 입고 있다. 건장한 체구에 오른손으로 칼자루를 잡고 왼손은 칼끝을 받쳐들고 있다. 북방 다문천왕은 높직한 보관을 쓰고 미소를 띤 인자한 모습으로 선비형의 눈썹과 긴 턱수염에서 부드러운 문인의 모습을 떠올리게 한다. 비파를 들고 있으며, 발 아래에는 힘에 겨운 듯 고통스러워 하는 악귀가 왼쪽다리를 받쳐들고 있다.



남방 증장천왕은 굳게 다문 입과 함께 근엄한 얼굴 표정을 하고 있고, 오른손에 칼을 들고 있고 있고, 왼손은 무엇인가 쥐고있는 듯한 자세만을 취하고 있다. 당당해 보이는 신체는 수호신으로서의 모습을 잘 표현하고 있다. 서방 광목천왕은 부릅뜬 눈에 입을 벌리고 소리지르는 듯한 위엄있는 모습이다. 오른손에는 깃발을 잡고 왼손에는 무엇인가 들고 있었던 모습인데 보탑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조선시대 사천왕상 대부분이 중국식 갑옷에 각기 다른 상징물을 들고 있으며 발 밑에는 악귀를 밟는 형태상의 특징을 갖는다. 또한 무장한 분노상에 화려한 보관을 쓰고 천의자락을 휘날리면서, 보관 밑으로 흘러내린 머리카락이 귓바퀴를 돌아 어깨 위에서 여러 갈래로 갈라지는 자비로운 보살상의 모습이 추가되고 있다. 보림사의 사천왕상은 이러한 특성을 가장 앞서 선도하고 있다는 점에서 불교조각사적 비중이 매우 크다고 할 수 있다.


이들의 조성시기는 천왕문에 걸린 목판과 '보림사중창불사기록'에 의해 중종 10년(1515)에 조성되고 이후 2차례에 걸쳐 중수됐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보림사 사천왕상은 현존하는 천왕문 목조사천왕상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으로 임진왜란 이전의 것으로는 유일한 것이라 할 수 있고, 각 부의 조각이 매우 우수할 뿐만 아니라 조선시대 사천왕상의 기본이 되는 귀중한 유물로 평가된다.


# 장흥 보림사 보조선사탑비


보림사에 있는 보조선사 지선의 탑비로, 거북받침돌 위에 비몸을 세우고 머릿돌을 얹은 모습이다.



보조선사(804∼880)는 통일신라시대의 승려로, 어려서 출가해 불경을 공부했고, 흥덕왕 2년(827)에 승려가 지켜야 할 계율을 받았다. 희강왕 2년(837) 중국으로 건너갔으나, 멀리서 구할 필요가 없음을 느끼고, 문성왕 2년(840)에 귀국해 많은 승려들에게 선(禪)을 가르쳤다. 헌안왕 3년(859) 왕의 청으로 보림사의 주지가 됐고, 77세의 나이로 입적했다. 왕은 그의 시호를 ‘보조선사’라 하고, 탑이름을 ‘창성’이라 내렸다.


탑부 귀부의 머리부분/사진출처-문화재청 비는 거북받침돌의 머리가 용머리를 하고 있어 이목구비가 뚜렷한 사나운 모습이고, 등 뒤에는 육각형의 무늬가 전체를 덮고 있다. 등 중앙에 마련된 비를 꽂아두는 부분에는 구름과 연꽃을 새겨 장식해 놓았다. 비몸돌에는 보조선사에 대한 기록이 새겨져 있는데, 김영이 비문을 짓고 김원과 김언경이 글씨를 썼다. 머릿돌에는 구름과 용의 모습을 웅대하게 조각했고, 앞면 중앙에 ‘가지산보조선사비영’이라는 비의 명칭을 새겼다.


통일신라 헌강왕 10년(884)에 세워진 비로, 당시 조형수준을 대표하는 뛰어난 작품이다./사진-윤정숙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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