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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서원 84] 변이중 선생을 배향하는 장성 '봉암서원'
  • 이승준 기자
  • 등록 2022-09-24 13:43:58
  • 수정 2022-09-24 13:44: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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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준 기자] 1981년 10월 20일 전라남도 기념물로 지정됐다. 변이중(邊以中:1546~1611)을 배향한 서원으로 1697년(숙종 23)에 창건됐다. 1868년(고종 5)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 의해 훼철됐다가, 1976년 지방 유림들과 후손들이 1차로 중건했다. 1984년에 새로 복원해 현재에 이르고 있다.


외삼문.강당.동재.서재로 강학공간을, 내삼문.사당으로 배향공간을 이뤄 전학후묘의 배치형식을 취한다. 임진왜란 때 장성 입암산성(長城 笠岩山城:사적 384)에서 순절한 윤진(尹振:1631~1698), 광해군 때의 문신 이이첨(李爾瞻:1560~1623) 등을 상소공책했던 변경윤(邊慶胤:?~?)을 배향했고, 숙종 때 대유학자인 변휴를 추배했다.




변이중의 본관은 황주(黃州). 자는 언시(彦時), 호는 망암(望庵). 변택(邊澤)의 아들이고, 어머니는 함풍이씨(咸豐李氏)이다. 이이(李珥)와 성혼(成渾)의 문하에서 수학했다.


1568년(선조 1) 사마시에 합격했다. 1573년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했다. 1592년에는 전라도 소모사(召募使)가 돼 군비(軍備) 수습에 힘썼다. 그 뒤 조도어사(調度御使)가 돼 누차 전공을 세우는 한편, 화차(火車) 300량을 제조해 순찰사 권율(權慄)에게 주어, 행주대첩에 크게 기여하였다.





1600년(선조 33) 사옹원정, 1603년 함안군수를 지내다가 1605년 벼슬을 그만두고 고향 장성에 돌아가 여생을 보냈다. 이이와 성혼의 학통을 이어받아 성리학과 경학에 밝았고, 군사전략에도 밝아 임진왜란.정유재란 때 큰 공을 세웠다.


특히 변이중이 쓴 '총통화전도설(銃筒火箭圖說)'과 '화차도설(火車圖說)'에 의거해 화차를 제조한 공로는 우리나라 과학사에 있어서 커다란 업적이었다. 강항(姜沆)이 지은 묘지명과 이정구(李庭龜)가 지은 묘갈명 등에서 변이중의 학문과 인품, 뛰어난 전략과 창의성에 대하여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뒤에 이조참판에 증직됐고, 장성 봉암서원(鳳巖書院)에 제향됐다. 저서에 '망암집(望庵集)'이 있다./사진-윤정숙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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