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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서원 4] 예학을 실천한 서원 '돈암서원'
  • 박광준
  • 등록 2021-10-31 21:33:30
  • 수정 2021-10-31 21:4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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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암서원 전경 

[박광준 기자] 서원은 조선시대 중엽인 16세기에 들어와서 유림과 문중에서 국가를 이끌어갈 인재를 양성하고 학문을 연구하기 위해 설립한 사립교육기관이고, 나아가 위대한 업적과 학문적으로 성취를 이룬 선조의 유덕을 가리기 위해 사당을 지어 위판을 모시고 매년 향사를 받드는 곳이다. 따라서 서원은 이러한 목적을 수행키위해 선현에게 향사를 받드는 사당인 제향공간, 학문을 강론하는 강당과 유생들이 공부하기 위해 머무는 동재와 서재로 구성된 강학공간, 심신을 수양하고 호연지기를 기를 수 있는 누각으로 이뤄진 유식공간 등으로 이뤄져 있다. 그 외에도 문집이나 서책을 펴내는 장판각, 제사에게 필요한 제기를 보관하고 준비하는 전사청, 서원을 관리하고 유생들의 식사준비 등 생활 전반을 뒷받침해주는 고직사 등의 부속건물을 갖추고 있다. 


홍살문 서원을 설립하는 장소는 풍부지리설에 따라 좋은 위치를 선택했는데, 대부분의 서원은 앞이 낮고 뒤가 높은 구릉지에 많이 설립됐다. 공간 배치는 남쪽에서부터 정문.강당.사당을 일직선상에 두고그 양쪽에 동재와 서재를 배치했다. 사당에는 따로 담장을 쌓고 내삼문을 만들어 제향공간으로서의 신성성을 확보하고 있다. 건축물은 겸손과 절제를 추구하는 선비정신에 따라 복잡한 장식을 피하고 간소한 양식을취했고,자연과 함께 심신을 단련하고 수양하면서 한굼연구에 전념할 수 있도록 조용하면서도 빼어난 경치를 가진 곳에 세웠다. 


한국 서원의 탁월한 보편적 가치는, 유교 성리학이 조선 사회에 정착된 후, 성리학의 보급에 합당한 한국 특유의 서원 건축 양식이 형성됐다. 서원 건축은 조선시대 사학(私學) 교육의 가장 전형적인 증거를 보여주면서, 주변 경관과 조화하는 특유한 공간 유형을 창출했다.


산앙루또한 서원의 경관은 '성리학자들이 이상으로 생각하는 자연과 인간은 불가분의 관계를 갖는다'는 천인합일사상이 반영돼 있고, 서원은 조선시대 지방 문화와 교화의 중심지로서 많은 문집과 문헌을 남겼다. 향촌사회의 여론과 공론을 집약하는 지성인 집회소 역할, 제향과 강학 기능을 통한 사회교육의 장소, 그리고 도서관과 출판 기능을 수행했다.<편집자 주>


돈암서원은 1634년에 지역 유학생들이 사계(沙溪) 김장생의 학문과  덕행을 가리기 위해 건립한 성리학 교육 시설로, 원래 현재 위치 인근의 임리 숲말에 있었다. 그러나 19세기 후반 홍수 피해를 입어 현 위치로 옮겼다. 1660년(현종 1)왕이 '돈암서원'이라는 현판을 내려 사액서원이 된 후 지역의 공론과 학문을 주도했다. 돈암은 임리 숲말 근처에 있는 바위 이름이다.  


입덕문사당에는 김장생을 중심으로 그의 아들이자 제자인 김집과 송준길, 송시열의 위패를 모셨다. 김장생은 17세기 전반에 예학을 집대성해 사회에 보습한 인물이다. 그의 제자들은 돈암서원을 중심으로 예학에 관한 연구와 논의를 활발하게 펼쳤다. 돈암서원은 예학 실천의 거점이었고, 예학 이론을 건축으로 구현한 응도당이 그 중심 공간이다. 김장생은 예학서 '가례집람'에 성리학을 바탕으로 한 건축물 형태를 도면과 함께 상세하게 설명해 놓았다. 


서원은 완만한 구릉지에 동향으로 자리하고 있다. 앞쪽에 강당인 양성당, 유학생들의 기숙사인 동재 거경재와, 서재 정의재가 배치돼 있다.  그리고 뒤쪽에 사당인 숭례사를 두어 전학후묘(前學後廟)의 배치 형식을 따랐다. 양성당 앞마당에는 서원의 창건 과정과 기장생 부자의 업적을 새긴 원정비가 있다. 


돈암서원 이건비 양성당 옆에는 문집과 목판을 보관하는 장판각과 김장생의 부친 김계휘가 후학을 가르치던 정회당이 자리한다. 정회당 앞에 있는 응도당은 한국 서원의 강당 가운데 가장 규모가 크며, 지붕 양 측면에 '영(榮)'이라는 지붕을 덧대어 벽으로 비가 들어가지 않게 했다. 


돈암서원에는 논산 돈암서원(사적 제383호), 논산 돈암서원 응도당(보물 제1569호), 돈암서원 유경사(수례사)(충남 유형문화재 제155호), 돈암서원 원정비(충남 문화재자료 제366호) 등 주요 문화재가 있다. 


# 내삼문(內三問)


내삼문 내삼문은 숭례사에 제향을 지내기 위해 출입하는 문으로, 사당 앞의 어칸과 양 협칸을 별도로 하나씩 세우고 문과 문 사이에는 담장이 처저 있다. 담장에는 지부해함, 박문약례, 서일화풍 등 김장ㄷ생과 그의 후손들의 예학정신을 가장 잘 보여주는 12개의 글자를 새겨 놓았다. 


# 돈암서원 숭례사




'예를 숭상하다'는 의미의 숭례사란 현판이 걸려 있는 사당으로서, 군자가 덕을 닦고 학문을 이루는 것을 말한다.  사당 내부에는 주향(主享)인 사계 김장생, 신독재 김집, 동춘당 송준길, 우암 송시열의 위패가 모셔져 있다. 이들 네 분은 모두 문묘에 종사했기 때문에 돈암서원은 선정서원이기도 하다. 매년 2월과 8월 중정일(中丁日)에 제사를 올리고 있다. 처마의 기와 명문에 쓰인 '숭정육년계유이월일서원'의 내용으로 보아 응도당과 같은 시기에 세워진 것으로 보인다. 


# 장판각


장판각장판은 판을 간직해 보관한다는 뜻으로, 이곳은 김장생과 김계휘, 김집 선생의 책판을 보관하고 있는 곳이다. 책판은 팔만대장경과 비슷한 모임으로, 지역의 유림들이 '사계전서'를 완성한 뒤 지금의 위치에 건립한 것이다. '돈암서원지' '장판각기'에 의하면, 사계선생의 '전서(全書)와 '유고(遺稿)' 등의 판각을 모두 합하면 4,168판이었는데, 4년 후인 병인년(1926) 봄에 돈암서원에 장판각을 짓고 합쳐 보관했다고 전해진다. 


현재는 1,841판만이 남아 보관되고 있다. 서원에서 간행한 책은 '사계전서' 51권 26책, '가례집람' 10권 6책, '경서변의' 7권 3책이다. 현재 모든 책판이 보존되지 못한 아쉬움은 있지만, 지금의 책판만으로도 우리나라 인쇄 문화의 변화 과정을 연구하는 자료로서의 가치가 있다. 


# 돈암서원 응도당(보물 제1569호)


응도당

응도당은 유생들이 공부하던 장수강학의 성격을 지닌 강당이다. 고종 17년(1880)에 서원이 현재의 위치로 옮겨졌을 대 옛 터에 남아있던 것을 1971년에 이전했다. 당시 양성당이 이미  강학의 기능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숲말에 있던 서원의 위치와는 다르게 사당과 직각으로 건물을 배치했다. 


응도당 현판응도당은 예를 실천하는 건축제도의 모델로 제시된 건축양식이기 때무네 돈암서원의 건물 배치와 규모는 사계 김장생 선생이 '의례'와 '주자대전'에서 고증해 강경 황산서원(현 죽림서원)을 창건했던 법도를 이어받았다고 한다. 처마의 암막새기와에 '숭정육년계유이월일서원'이라고 새겨진 명문으로 보아 인조 11년(1633)에 건립됐음을 알 수 있고, 서원의 규모나 구조적 측면으로 보아 한국서원의 대표서원다운 변모를 지니고 있다. 


# 정회당


'정회'는 유생들이 수행하는 방법 중 하나로 고요하게 몸소 실천하며 수행한다는 뜻으로 사계선생의 부친인 황강공께서 강학하던 건물이며, 대둔산자락의 고운사터에서 1954년에 옮겨왔다. 정회당은 정면 4칸, 측면 2칸으로 후면열 가운데 2칸은 마루방을 두었다. 우물마루를 깔았다. 


정회당과 보호수(향나무 300년)# 돈암서원 원정비.양성당  


돈암서원 원정비는 돈암서원의 역사를 기록한 비석이다. 원정비는 1669년 (현종 10)에 돈암서원 양성당에 세워졌고, 연산돈암서원지비라는 글이 새겨져 있다. 비석의 내용은 돈암서원을 세운 배경과 구조, 사계 김장생 부자의 성품과 학문적 업적에  대한 칭송으로 이루어져 있다. 


돈암서원 원정비와 양성당/양성당은 김장생이 생전에 강학활동을  하던 건축물로 사후 강학을목적으로 활용됐다. 김장생 부자는 주자학과 예학의 대가로서 벼슬을 멀리 하고 고향에 내려와 학문 연구에 매진했다. 비문은 송시열이 짓고, 송준길이 글을 썼으며, 앞면에 전서체로 된 제목은 김장생의 증손인 김만기가 썼다. 비석은 연꽃무늬가 새겨진 네모난 받침대 위에 대리석으로 비의 몸을 세우고 지붕 모양의 가첨석을 머릿돌로 올린 형태이다. 본래 돈암서원은 숲말에 있었는데, 1880년(고종 17)에 홍수로 물에 차서 이곳으로 옮겨왔기  때문에 비문의 내용과 현재의 건물 배치는 일치하지 않는다. 


(왼쪽부터) 정의재, 양성당, 돈암서원원정비, 거경재:거경재/'거경'은 성리학의 수양 방법 중 하나로 우러르고 받드는 마음으로 삼가고 조심하는 태도를 가짐을 말하며, 유생들이 학습하던 공간이다. 거경재는 장대석 기단위에 정면  3칸, 측면 2칸의 구조를 가지고 있다. 정의재/'정의'란 자세한 의의라는 뜻이다. 정의재는 학문을 하는 유생들이 모여 경전의 의의를 자세히 강론하던 곳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장대석 기단 위에 정면 3칸, 측면 2칸의 구조를 가지고 있다. 

전사청, 제향에 사용하는 제기를 보관하는 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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