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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자는 기계가 아니라”고 외치며 분신한 ‘전태일'을 만나다
  • 박광준 기자
  • 등록 2021-06-22 05:17: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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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의 한 장면

[박광준 기자] 죽음을 앞에두고 어머니에게 유언을 남기는 전태일.

온몸이 타버린채로 숨조차 쉴 수 없는 상황에서 전태일은 목에서 피를 분수처럼 뿜으며 외친다.


"노동자들은 암흑 세상에서 지금 살고 있습니다. 내가 죽으면서 그 깜깜한 하늘에 작은 구멍을 하나 뚫는 거예요. 어머니가 남은 평생동안 그 구멍을 조금만 넓혀주세요. 어머니 빨리 약속해주세요. 혼자하지 마시구요. 꼭 노동자들과 같이 대학생들과 같이 해주세요. 빨리 약속해 주세요. 꼭 약속하세요"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기념관/사진-박광준 기자

1948년 8월 26일 대구시 중구 남산동에서 전상수(全相洙)와 이소선(李小仙) 사이에서 2남 2녀의 장남으로 태어난 전태일은 6.25전쟁이 일어나자 가족과 함께 부산으로 피난을 갔으나 봉제 기술자였던 아버지 전상수가 파산하는 바람에 1954년 가족이 모두 서울로 올라왔다.


전태일은 가난 때문에 거의 정규 교육을 받지 못하고, 남대문초등학교4학년에 다니던 1960년에 학생복을 제조해 납품하던 아버지가 사기를 당하고 큰 빚을 지는 바람에 학교를 그만두고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기 위해 동대문 시장에서 물건을 떼어다 파는 행상을 시작했다. 


평화시장 다락방 봉제공장/사진-박광준 기자그러다 17살 때인 1965년 학생복을 제조하던 청계천 평화시장의 삼일사에 보조원으로 취직했다. 일찍이 아버지에게서 재봉 일을 배웠던 전태일은 기술을 배워서 1966년에는 재봉틀을 다루는 재봉사가 돼 통일사로 직장을 옮겼다. 이 무렵 빚 때문에 뿔뿔이 흩어졌던 가족도 다시 모여 살 수 있게 됐다.


당시 전태일이 일하던 청계천의 평화시장은 인근의 동화시장, 통일상가 등과 함께 의류 상가와 제조업체가 밀집돼 있는 곳으로, 1층은 상가로 사용됐고 2~3층에는 500여개의 제조업체가 모여 있었다. 공장들은 모두 영세한 규모여서 작은 곳은 6.6m²의 공간에 13명이 일하는 곳도 있었고, 큰 곳은 40m²의 공간에 50여명이 일했다. 


전태일의 일기/사진-박광준 기자이처럼 좁은 공간에 다락을 만들어 노동자들을 밀집시켜 일을 시키다보니 노동환경이 매우 열악했다. 노동자들은 햇빛도 비추지 않는 좁은 다락방에서 어두운 형광등 불빛에 의존해 하루 14시간씩 일을 했다. 환기 장치가 없어서 폐 질환에 시달리는 노동자들이 많았다. 이들은 대부분 여성이었다. 


특히 ‘시다’라고 불린 보조원들은 13~17세의 어린 소녀들로 초과근무수당도 받지 못한 채 극심한 장시간 저임금 노동에 시달리고 있었다. 자신이 가난에 시달리면서도 주변 사람들의 어려움을 외면하지 않았던 전태일은 어린 여성 노동자들이 열악한 노동환경에 시달리는 것을 보면서 노동운동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사진-박광준 기자그는 함께 일하던 여성 노동자가 폐렴에 걸린 상태에서 해고 당하자 그녀를 돕기 위해  애쓰다가 자신도 해고되는 일을 겪기도 했다.


이후 전태일은 재단사 보조를 거쳐 상대적으로 좋은 대우를 받던 재단사가 됐으나 동료 노동자들의 노동환경을 개선하려는 노력을 멈추지 않았다. 1968년 근로기준법의 존재를 알게 되면서 법조차 지켜지지 않는 현실을 개선해야 한다는 의지를 법을 공부하기 시작했다. 


이후 1969년 6월 동료 노동자들과 함께 ‘바보회’를 만들어 설문으로 평화시장의 노동환경을 조사하면서 근로기준법의 내용을 알렸다. 하지만 이 사실이 사업주들에게 알려지면서 전태일은 해고되면서 평화시장에서 일할 수 없게 됐다. 한동안 공사장에서 막노동을 하면서 지내던 전태일은 1970년 9월 평화시장으로 돌아와 다시 삼동회를 조직한다.  


사진-박광준 기자그리고 다시 노동환경을 조사하는 설문지를 돌려 노동청, 서울시, 청와대 등에 진정서를 제출, 이러한 내용이 '경향신문'에 보도되면서 사회적 주목을 받았다. 삼동회 회원들은 노동환경 개선과 노동조합 결성을 위해 사업주 대표들과 협의를 벌이려 했으나 행정기관과 사업주들의 조직적인 방해로 무산되자, 전태일과 삼동회 회원들은 1970년 11월 13일 평화시장 앞에서 근로기준법 화형식을 벌여 근로기준법이 노동자의 권리를 제대로 보호하지 못하는 현실을 고발키로 했다. 


경찰의 방해로 시위가 무산되려는 상황에 놓이자 전태일은 자신의 몸에 석유를 뿌리고 불을 붙인 채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 등의 구호를 외쳤다. 병원에 실려 간 전태일은 어머니에게 “내가 못다 이룬 일을 어머니가 대신 이뤄주세요”라는 유언을 남기고 그날 세상을 떠났고, 경기도 마석의 모란공원에 매장됐다.


전태일이 근로감독관에게 보낸 진정서/사진-박광준 기자전태일의 죽음은 최소한의 법적 보호도 받지 못한 채 저임금 장시간 노동에 시달리던 노동자들의 현실을 고발해 사회적으로 노동문제에 대한 관심을 높이고, 노동자들 스스로 자신들의 환경을 개선하려는 노력에 나서도록 하는 계기가 됐다. 같은 해 11월 25일 조선호텔 노동자이던 이상찬이 분신을 시도한 것을 필두로 1972년 유신체제가 성립되기 전까지 노동자들의 저항과 단체행동이 활발히 전개됐다.


사진-박광준 기자

전태일은 하루 14시간이 넘는 고된 노동 속에서도 독서와 일기쓰기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 그가 쓴 일기는 많이 파손되고 유실됐지만 1967년 평화시장에서 일하면서 쓴 일기는 상당 부분 남아 있다. 그의 일기와 편지, 관계기관에 보낸 진정서 등은 '내 죽음을 헛되이 말라'(돌베개, 1988)라는 책으로 정리됐고, 일기와 주변 사람들의 구술 등을 기초로 그의 삶을 기록한 '전태일 평전'(돌베개, 1983)도 전해진다. 


1995년에는 그의 삶을 영화로 옮긴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박광수 감독)이 국민모금 방식으로 제작되기도 했다. 그가 자신의 몸을 불태웠던 청계천 6가의 ‘버들다리’ 위에 2005년 그의 정신을 기리는 반신 부조가 설치됐다.


노동자의 어머니 이소선(태일이와의 약속)/사진-박광준 기자 

금방이라도 살아 돌아올 것만 같은 전태일/사진-박광준 기자아름다운 청년 전태일 기념관/사진-박광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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