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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특집 5] 독도의 受難-일본이 독도를 날치기하다
  • 심종대 발행인
  • 등록 2023-11-17 18:04:24
  • 수정 2023-11-23 16:34: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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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2년에 울릉도 개척방침이 확정됐으나 첫 이주민 16호 54명이 입주한 것은 그 이듬해 봄이었다. 이 합법적인 개척민 이전에도 섬에는 많은 사람들이 잠입하고 있었다. 잠입자들은 우리나라 사람들과 일본이었다. 이들은 우리 수토관에 발각되어 문제가 되기도 했다. 이규원 검찰사가 내국인 116인, 일본인 76명을 적발해 문초한 예도 있다. 울릉도에 첫발을 디딘 개척민들이 독도나 울릉도 각처의 지명을 미리 알고 오지는 않았을 것이다. 개척 이전부터 이곳에 드나들던 사람들로부터 현지 각처의 지명을 전수받아 그대로 썼던 것이다. ‘독섬’을 비롯해 앞에서 밝힌 바 있는 대부분의 지명이 그렇다. 물론 개척을 진행해 가면서 새로 만들어진 지명도 많다. 


개척 초기 ‘독섬’을 ‘石島’로 기록한 정부공문서의 예를 살펴보자. 1882년 울릉도개척사업에 착수할 때 개척관수는 도장제였고 1895년 부터는 도감제를 실시했는데 도장이나 도감이라는 직위는 일종의 명예직으로서 일정한 녹봉도 없었고 조직직무도 없었다. 따라서 치안유지의 실력도 미약했고 개척민을 다스리기가 힘에 겨웠을 뿐만 아니라 특히 불법침입해 잠행하던 왜인들을 단속할만한 능력이 없었다. 이런 약점 때문에 현지에서 난동이 발생하는 것이 문제가 되어 이 실태를 조사하기 위해 1900년 내부에서 우용연 일행을 울릉도에 파견, 우용연이 현지사정을 조사하고 돌아가서 복명하는 가운데 울릉도관수의 관권을 강화해야 한다고 강조해 1900년 10월 25일 勅令 제41호로써 울릉도를 울릉군으로 승격시키고 군수를 두게 되었고, 그 밑에 순교 2명, 首서기 1명, 서기 4명, 通引 2명, 使令 2명, 사용(使庸) 2명, 使童 1명, 객사식(客舍植) 1명, 향교직 1명 직명을 두게 됨으로써 군청의 면모를 갖추게 되었다. 


칙령 제41호(勅令第四十一號)의 석도(石島)는 당시 울릉도를 왕래한 사람들 중에는 전라도 사람들이 가장 많았는데, 전라도 사투리로는 '돌'을 '독'으로 발음해 독도를 가르켜 '돌섬', '독섬', '독도'라고 불렀다. 돌섬이라는 뜻을 한자로 바꾼 것이 석도(石島)이고, 소리를 살려 한자를 빌어 적은 것이 독도(獨島)이다. '칙령 제41호'에서 울도군 소속인 '석도'는 1906년 울도 군수 심흥택의 보고서에서는 "본군(本郡)소속 독도(獨島)"로 기록됐다.

동령 41조에서 울릉군의 행정구역을 규정한 제2조를 살펴보면, 제2조 군청 위치는 台蕓洞으로 정하고 구역은 울릉 전도와 竹島 石島를 관할할 사항으로 규정하고 있다. 여기에서 조문중의 죽도는 댓섬이며 石島는 독섬 卽 독도를 말한 것이다. 


‘독섬’을 왜 ‘石島’로 표기했는지는 알 수 없으나 당시 우용연 일행이 울릉도에 왔을 때 ‘독섬’이란 말만 틀림없고 이것을 표기할 때 우 일행 중의 누구이거나 혹은 중앙관서의 실무자가 돌-돍-독-석으로 표기했을 것으로 보인다.


'개정일본여지노정전도'는 경위도선을 표시한 일본 지도로 가장 대표적인 나가쿠보 세키스이의 지도이다. 1779년 초판에는 울릉도와 독도가 조선 본토와 함께 채색되지 않은 상태로 경위도선 밖에 그려져 있었다. 이미 일본은 독도를 일본 영역 밖의 섬으로 인식하고 있었던 것이다. '개정일본여지노정전도'에서 울릉도와 독도가 표시된 부분에 '은주시청합기'의 내용이 있는데 '은주시청합기'에서는 울릉도와 독도 두 섬은 사람이 살지 않는 땅이지만 고려에서 보기에는 운주에서 은주를 바라보는 것 같다고 적혀 있다. 즉 '은주시청합기'에서 운주는 일본이므로 운주가 은주(오키섬)을 같은 일본의 영토로 보듯이 울릉도와 독도는 고려의 영토이기에 일본의 서북한계는 오키섬까지다고 한 것이다. 또한 일본의 고지도 어디에도 울릉도와 독도를 따로 분리해서 표시한 지도는 단 한장도 없다.

어쨌든 칙령으로써 울릉도의 관할구역의 규정함에 있어서 독섬 즉 石島를 빠뜨리지 않고 죽도와 함께 主屬島로 경영하는데 완벽을 기하고자 했던 것이다. 그런데 1905년에 가서 우리의 石島가 기성천외의 수난을 당하게 된다. 일본이 石島를 날치기해간 사건이 바로 그것이다. 일본의 石島를 날치기한 사건의 배경을 충분히 밝히려면 설명이 너무 길어 이 사건의 경위만을 요약해 보자 


일본이 우리의 石島를 날치기해 그들의 영토로 편입시킨 것은 1905년(光武 9년 明治 38년) 2월 22 일이었고 島根縣知事 명의로 된 島根縣告示 弟 40號의 내용을 살펴보면 ‘北緯 三十七度 九分 三十秒, 東經 百三十一度 五十五分, 穩岐島를 距하기 西北 八十浬에 있는 島島를 竹島로 稱하고 自今 本縣所屬 穩岐島司의 所管으로 定하여짐’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군함신고행동일지(軍艦新高行動日誌), 1904년' : 러일전쟁 시 일본 군함 니타카호의 항해 일지로, 9월 25일의 일지에 "량코도암(당시 일본에서 독도를 가리키던 명칭)을 한인(韓人)은 독도(獨島)라고 쓴다"라고 울릉도에서 청취한 정보를 기록으로 남겼다. 

이상의 고시가 있게 된 배경을 간단히 추려보면, 울릉도에 사는 中井養三郞한 자가 1903년과 1904년, 두 차례에 걸쳐 우리 石島에 침입하여 가제(강치 등)를 잡은 일이 있었는데 이 者는 그 일을 보다 안정적으로 해먹기 위해 1904년 9월에 내무, 외무, 농상무대신 앞으로 ‘량꼬島 영토편입 및 貸下願’을 제출했다.


외무상에서는 이 사안을 1905년 1월 10일 閣議에 淸議했고 같은 해 1년 28일의 閣議에서 이를 승인하게 됨으로써 내무성에서는 2월 15일자 공문에서 그 내용을 고시하라고 島根縣 지사에게 시달했다. 


삼국접양지도(三國接壤之圖, 1785년)는 에도시대 학자인 하야시 시헤이가 만든 지도로 일본 주변의 나라들(조선, 류큐, 아이누)의 영토를 다른 색으로 칠해 경계를 지었다. 죽도(울릉도)와 독도를 조선과 같은 황색으로 표시했으며, '조선의 것'이라 써 놓았다.이상의 절차를 거쳐 2월 22일에 一個縣의 고시로써 松島 또는 량꼬島 등으로 부르던 우리의 石島에 竹島란 새로운 이름을 붙여 자기네 영토로 편입 穩岐島司所管으로 한다고 하는 백서의 날치기식으로 처리해 버린 것이었다. 


이러한 절차에 도덕적인 측면은 차치하고 무생물에 대한 사인의 소유권 획득절차에도 어긋날 뿐 아니라 하물며 국제간의 영토권 획득절차는 상식 이하의 행위인 것이다. 여기에서 잠깐 짚고 넘어가야 할 것 몇 가지를 지적해보면 첫째, 中井養三郞 가 량꼬島 卽 獨島가 한국의 토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는 것, 둘째, 일본의 위정자들도 그렇게 알고 있었다는 것, 그래서 내각결의 때 총리대신은 영토편입안에 반대투표를 하였음, 셋째, 영토편입상의 상식적 절차를 취할 경우 한국정부에서뿐만 아니라 국제 열강들이 그냥 안있을 것은 필연적이라는 것, 넷째, 내각에서 본안을 의결할 당시는 러일전쟁 중이 였으며 그 때 이미 러시아의 발틱함대가 東進 중이었다는 것, 다섯째, 독도와 울릉도가 동해의 전략적 요지였으며 동해해전 때 양도를 일본이 효과적으로 활용했다는 것, 마지막으로 이 무렵 우리 나라는 國勢가 기울어져 형편없는 세력에 있었고 바로 그해가 한일간에 을사보호조약이 강제로 체결된 해였다는 것 등이다. 이상의 몇 가지 지적을 통해서 우리의 독섬(石島, 獨島)이 백서에 수탈된 사건의 단서는 밝혀진 셈이다. 


태정관 지령(太政官 指令, 1877년)과 기죽도약도(磯竹島略圖)는 태정관에서 울릉도와 독도의 소속에 관하여, '죽도(울릉도) 외 1도의 건은 본방(일본)과 관계없다는 것을 명심할 것'이라해 울릉도와 울릉도의 부속섬인 독도가 일본의 영토가 아니라는 점을 확인한 문서이다. 부속서류에는 울릉도 쟁계 관련 기록이 있고 '기죽도약도'에는 죽도(울릉도)와 함께 송도(독도)가 그려져 있으서 '외 1도'가 독도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독섬이 날치기 당한 사실을 우리 측에서는 전혀 모르고 있었다. 島根縣廳의 한 구석에 종이 한 장으로 고시된 내용을 우리 정부측에서 어찌 알 수 있었겠으며 더구나 교통과 통신이 막막했던 울릉도의 주민들이나 군수가 그런 사실을 몰랐음은 당연한 일이었다. 우리 측에서 이 사실을 알게 된 것은 사건 발생 후 1년여가 지나서였다. 당시 울릉도 심흥택 군수가 강원도 관찰사에게 제출한 동 사건에 관한 보고서가 우리 정부에 전달됨으로써 비로소 이 사실이 알려지게 되었던 것이다./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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