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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특집3] # 삼봉도 2.3차 탐사보고 “지형설명...독도 설명 틀림없다”
  • 심종대 발행인
  • 등록 2023-11-07 17:29: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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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의 독도평화선 사수 어민 총궐기대회  李繼孫의 상계를 받은 조정에서는 우선 삼봉도의 실체를 확인해야 했고 또 해안민들이 얼마만큼 잠입했는지도 의문이었으므로 李 觀察使에게 삼봉도 문제에 관해서 상세히 탐사 조사해 다시 보고하라는 어명을 내리는 한편 삼봉도 경영문제를 놓고 왈가왈부 논란이 많았다. 삼봉도 문제를 놓고 상당기간 고심하던 중 同王 3년에 가서는 이 문제의 처리를 위한 적극적인 조치가 취해진다. 같은 해 4월에 朴宗元을 삼봉도경차관으로 임명하고 삼봉도에 가서 잠입자들을 모두 잡아오라고 엄명을 내렸다.


朴宗元은 5월 28일 4척의 배에 군사를 분승시켜 울진을 떠나 삼봉도 탐사에 나섰는데 때마침 불어닥친 태풍으로 배들이 흩어져버렸다. 朴宗元이 탄 배는 29일 새벽에 武陵島(울릉도) 북서쪽 앞바다까지 이르렀다가 다시 바람에 밀려 여러 날 표류 끝에 6월 6일 간성군(杆城郡) 청간진(淸澗津)에 귀환했다. 이들 일행 중 곽영강(郭永江) 등이 탄 3척의 배는 5월 29일 무릉도(武陵島)에 도착해 3일간을 머물면서 섬 안의 상황을 수색했는데, 사람은 발견치 못하고 사람이 살던 집터만을 확인하고 귀환했다. 



이상과 같이 1차 삼봉도 탐사는 숱한 고행만 하고 허사로 끝났으나 조정에서는 삼봉도에 관한 관심을 버리지 않고 다시 탐사계획을 구체적으로 세워 왕의 재가를 받았고 같은 왕 4년 1월에는 성종이 영안도 관찰사에게 삼봉도에 관하여 각방(各方)으로 탐문조사해 다시 상세히 보고하라고 엄지(嚴旨)를 내렸다. 삼봉도에 대한 탐사과 경영집념은 끝내 같은 왕 6년 5월에 다시 강행하게 된다.


成宗實錄에 의하면 同王에 경성인(鏡城人) 김한경(金漢京)과 회영인(會寧人) 임도치(林都致), 경원인(慶源人) 임유재(任有才), 김옥산(金玉山), 이오을망(李吾乙亡), 김덕생(金德生) 등이 경원(慶源)의 말응대진(末應大津)에 출항해 3일 후 삼봉도에 도착했으나 섬을 바라보니 7-8명의 사람이 있으므로 상륙하지 못하고 그냥 귀환하고 말았다고 보고하고 있는데 어렵게 삼봉도까지 갔다가 수명의 사람 때문에 그냥 돌아왔다는 것에는 납득이 되지않는 점도 없지 않으나 여하간에 기록상으로는 그렇게 쓰여 있다.


앞에서 2차 삼봉도 탐사 결과가 비록 만족하지는 못했으나 삼봉도가 실재인 섬임은 확인됐으므로 조정에서는 영안도(永安道) 관찰사에게 또다시 하명하기를 건강하고 믿을만한 인물로 하여금 전에 갔다온 김한경을 대동하고 삼봉도를 탐사하라고 했다. 



조정으로부터 잇달아 하명되는 삼봉도 문제로 영안도 관찰사가 혼쭐이 난 모양으로 同王 7월 10월에 제3차 삼봉도 조사 결과를 ‘....本道 觀察使가...金自周, 宋永老, 前日 다녀온 金漢京, 李吾乙亡 等 十二人이 五隻船으로 九月 十六日...發船하여...二十五日에 三峯島의 西方 七, 八里許에 到着하여 섬을 바라보니 섬의 北쪽에 三個의 섬이 列立하였고 다시 中島의 西쪽에 다시 小島가 있어 이들 섬사이로는 모두 海流가 流通하며 海島之間에는 人形과 같은 이 三十個程度가 있으므로 그것이 무엇인지도 모르겠고 또 두렵기도하여 上陸하진 못하고 島形을 그려 돌아왔는 바...萬苦 다시 간다면 온전히 探査할 수 있을 것이니 請컨대 明 年 4月 風和時에 文武才者 一人을 選定하여 入送케 하여 주시기 바람...’이라고 李克均 관찰사가 上啓했다. 


이상의 제3차 삼봉도 탐사보고는 지형설명이 비교적으로 상세하고 동형(島形)을 그려온 것 등은 상당한 성과로 볼 수 있고 그 지형설명으로 보아 독도를 설명한 것임에 틀림이 없다. 이후 여러 차례 삼봉도 탐사를 했는데 이 무렵 于山島를 알지 못하는 함경도 사람들이 于山島를 삼봉도라고 부르게 됨으로써 같은 섬에 새로운 이름이 붙여지게 됐다고 추정된다. 


독도를 삼봉도라고 부른 것은 일시적으로 볼 수 있다. 초선 초기부터 독도를 우산도라고 부르기 시작한 듯하다. 이 島名은 조선말기 우리 나라의 해안민들이 울릉도에 몰래 드나들면서 독도를 ‘독섬’이라고 부르게 될 때까지 불려지던 이름임이라고 볼 수 있다. 이를 방증하는 예는 숙종 때 안용복 사건의 기록에서 찾을 수 있다./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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