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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국선열들의 불굴의 민족혼-자주 독립의지가 담긴 어록"
  • 이승준 기자
  • 등록 2022-11-06 22:40:56
  • 수정 2024-02-12 22:17: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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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독립기념관 경내 야외전시물 시.어록비(5)

[이승준 기자] 독립기념관 경내에는 야외 전시물인 애국 선열들의 시.어록비가 건립돼 있다. 여기에는 이순신 등 전통시대에 국난을 극복한 인물과 김구 등 일제 침략기에 독립운동을 주도한 애국선열들의 불굴의 민족혼과 자주 독립의지가 담긴 어록이 새겨져 있다. 짧은 글 속에 녹아있는 선열들의 숭고한 희생과 고귀한 나라사랑 정신은 우리들의 가슴에 영원히 되새기게 한다.<편집자 주>/사진-이승준 기자 



유성룡(柳成龍 : 1542∼1607)/호는 서애(西厓)이고, 경상북도 의성에서 태어났다. 1564년 사마시를 거쳐 1566년 별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해 승문원 권지부정자가 돼 벼슬길에 올랐다. 승진을 거듭해 1590년 우의정이 됐고 이듬해 좌의정이 됐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도체찰사가 돼 군무를 총괄했고, 이순신, 권율 등 명장을 등용했고 이어 영의정이 돼 왕을 호종(扈從)했다. 그 후 반대파의 탄핵을 받아 일시 파직됐다가 평안도 도체찰사, 충청, ·경상, 전라3도의 도체찰사가 돼 왜군이 점령한 평양.파주 등의 수복에 큰 역할을 했다. 화기 제조, 성곽수축 등 군비확충에 노력했고, 군대 양성을 역설했다. 훈련도감을 설치했고, 영의정과 훈련도감 도제조를 겸해여 내치와 외정에 온 힘을 기울였고, 1595년 경기.황해.평안.함경도 체찰사로 임명돼 군사를 총지휘하고 외적 침입에 대비해 북방 방비를 강화했다. 만년에는 향리 안동 하회에서 은거하면서 일생을 마쳤다.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이덕형(李德馨 : 1561 ~1613)/호는 한음(漢陰)이고, 서울에서 태어났다. 1580년 별시 문과에 을과로 급제해 승문원에 보직된 후 이조좌랑, 대사성 등을 역임하고, 1592년 31세 때 예조참판에 올라 대제학을 겸임했다. 이 해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동지중추부사로서 일본 사신과 화친을 교섭했으나 실패했다. 그 후 임금을 정주까지 호종하고, 그 길로 청원사가 돼 명나라 원병을 지원 받는데 성공했다. 귀국 후 한성부 판윤이 되고, 명나라 장수 이여송의 접빈관이 돼어 줄곧 그와 행동을 같이했다. 1595년 경기, 황해, 평안, 함경도 4도 도체찰부사를 지냈고, 1598년 우의정.좌의정에 차례로 올랐다. 1601년 행판중추부사, 경상.전라.충청.강원도 4도 도체찰사가 돼 전후 민심 수습과 군대정비에 노력했고, 대마도 정벌을 건의했다. 그 후 잠시 한직에 나가 있다가 1601년 광해군이 즉위하자 영의정에 다시 올랐으나 1613년 영창대군의 처형과 폐모론에 반대하다 사직돼 양근(楊根)에서 일생을 마쳤다.



곽재우(郭再祐 : 1552 ~ 1617)/호는 망우당(忘憂堂)이고, 경상남도 의령에서 태어났고, 문무 모두에 뛰어났다. 1585년 정시문과에 을과로 급제했으나 왕의 뜻을 거스른 글귀 때문에 파방(罷榜 : 합격 취소) 됐었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령에서 의병을 일으켜 천강홍의장군(天降紅衣將軍)이라 불리며 현풍.창녕.영산 등지에서 거듭 왜적을 무찔러 몰아내고 왜적의 진주성 공격을 물리쳤다. 1597년 정유재란 때에 경상좌도 방어사가 돼 화왕산성(火旺山城)을 지켰다. 이후 진주목사와 경상우도 조방장을 역임하고, 만년에는 망우정에 은거하다가 65세로 일생을 마쳤다. 시호는 충익(忠翼)이다.



장성 남문창의(長城南門倡義)/1592년 임진왜란 때 전라남도 장성을 중심으로 한 호남 각 고을의 50여 문중 70여 의사는 장성현 남문에 의병청을 설치하고, 3차에 걸쳐 3천여 의병을 모아 출전해 촉산, 진위, 괴산, 용인, 소사, 진주, 남원 등지에서 왜적과 싸워 많은 공을 세웠다. 한편 수천 석의 의곡(義穀)을 모아 의주 행재소와 다른 의병소에도 군량을 조달해 왜병을 몰아내는 데 큰 공헌을 했다.



김시민(金時敏 : 1554 ~ 1592)/1554년 8월 27일 충청남도 천안군 병천면에서 태어나 1578년 무과에 급제했다. 1591년 진주판관이 되고, 이듬해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성지(城地)를 수축하고 무기를 갖춰 전쟁에 대비했다. 진주목사로 승진하자 군대를 지휘해 곡성, 진해 등지에서 왜적을 격파하고 경상우도 병마절도사에 올라 금산에서 다시 적을 격파했다. 이 해 10월 5일 적이 전라도로 통하는 거점인 진주성을 3만의 대군으로 포위하고 공격하자 3,800명의 병력으로 7일 간의 공방전을 벌여 물리쳤다. 이 때 적은 막대한 손실을 입고 철수하였으며했고, 김시민은 끝까지 성루에 올라 많은 적을 사살하고 자신도 부상을 입고 순국했다. 시호는 충무(忠武)이다.



권율(權慄 : 1537 ~ 1599)/호는 만취당(晩翠堂)이고, 경기도 강화에서 태어났다. 1582년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해 승문원정자, 전라도 도사,예조 및 호조 정랑,경성판관을 거쳐 1591년 의주목사가 됐다. 이듬해 임진왜란이 일어나 수도가 함락되자 광주목사로서 방어사 곽영(郭嶸)의 휘하에 들어가 중위장이 돼 용인에서 일본군과 싸웠으나 패했다. 그 뒤 남원에서 1,000여 명의 의용군을 모집해 금산군 이치(梨峙)에서 왜장 소조천융경(小早川隆景)의 정예 부대를 대파했다. 1593년 2,800명의 병력으로 행주산성에서 3만명의 소조천융경의 왜군을 맞아 24,000여 명의 사상자를 내게 하고 격퇴해 그 공으로 도원수가 됐다. 임진왜란 7년 동안 큰 활약을 했고 이순신 장군과 함께 역사에 남을 전공을 세웠다. 시호는 충장(忠莊)이다.



이남규(李南珪 : 1855 ~ 1907)/호는 수당(修堂). 서울의 미동(尾洞)에서 태어나 집안에서 한학을 수학했다. 1882년 4월 정시문과에 급제 후, 1894년까지 권지부정자(權知副正字), 승정원 우승지, 형조참의, 영흥부사 등의 요직을 역임했다. 1890년대에 들어 일제의 대한침략이 가속화되자, 선생은 각종 상소를 통해 일제의 침략책동을 신랄하게 규탄하면서 일제의 침략에 대한 대비책 수립과 동맹국들과 연대해 일제를 토벌할 것 등을 주장했다. 이후 선생은 관직을 사직하고 향리에 칩거하며 상소를 통해 일제의 대일침략을 규탄했다. 선생은 1906년 민종식(閔宗植) 홍주의진의 홍주성 탈환을 적극적으로 지원했고, 일제에게 패한 민종식 의병장이 피신하게 되자 민종식 의병장을 고향인 예산에 은신시키는 등 배후에서 많은 지원을 했다. 1907년 광무황제의 헤이그 특사파견을 빌미로 광무황제를 강제 퇴위시킨 이후 전국적으로 의병운동이 확산되자, 선생과 선생의 장남 충구(忠求)에 대한 경계와 감시를 계속하던 일제는 선생에 대한 회유를 계속했으나 이에 응하지 않자 선생을 피체했고, 선생은 충남 아산군 송악면 평촌리 냇가에서 장남 충구와 함께 1907년 9월 피살 순국했다./대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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