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 메일전송
[한국의 전통사찰 54] 평창군 진부면(珍富面) 동산리(東山里)의 오대산(五臺山)에 있는 사찰 ‘상원사’
  • 박광준 기자
  • 등록 2022-11-05 11:23:22
  • 수정 2024-04-02 03:49:25

기사수정


[박광준 기자] 상원사는 강원도 평창군 진부면 오대산(五臺山)에 있는 남북국시대 통일신라의 승려 보천과 효명이 창건한 사찰로, 오대산의 중대(中臺)에 있다. 705년(성덕왕 4)에 창건해 진여원(眞如院)이라 했다. 이 진여원은 보천(寶川)과 효명(孝明)의 두 왕자가 창건했다. 


'삼국유사'에 의하면, 오대산에 들어간 두 왕자 가운데 형인 보천은 중대 남쪽 진여원 터 아래에 푸른 연꽃이 핀 것을 보고 그곳에 암자를 짓고 살았고, 아우 효명은 북대(北臺) 남쪽 산 끝에 푸른 연꽃이 핀 것을 보고 암자를 짓고 살았다.


이 두 형제는 예배하고 염불하면서 수행하고 오대에 나아가 항상 공경스레 예배를 드렸고, 날마다 이른 아침에 골짜기의 물을 길어다 차(茶)를 달여 1만 진신(眞身)의 문수보살(文殊菩薩)에게 공양했다.



마침 신라의 왕이 죽자 나라사람들이 오대산으로 와서 두 왕자를 모시고 서라벌로 돌아가려 했으나, 보천은 울면서 돌아가려 하지 않으므로 효명을 모시고 서울에 돌아와서 왕위에 추대했다.


그 뒤 20여 년이 지난 705년 3월 8일 진여원을 처음으로 세웠다. 그 뒤 보천은 오대산을 나라를 돕는 신행결사도량(信行結社道場)으로 만들 것을 유언했다. 그 유언에 따라 진여원에 문수보살상을 모시고 낮에는 '반야경'과 '화엄경'을 독송하게 했고, 밤에는 문수예참(文殊禮懺)을 행하게 했다. 또, 결사의 이름은 화엄사(華嚴社)라고 했고 복전(福田) 7원(員)을 두게 했고, 그 경비는 가까운 주현(州縣)에서 줬다고 한다.


고려시대는 어떠한 역사를 거쳤는지 거의 알 수가 없다. 다만, '동문선'의 '오대상원사승당기(五臺上院寺僧堂記)'라는 기록이 있을 뿐이다. 고려 말 이 절은 극도로 황폐해 있었다. 그때 나옹(懶翁)의 제자 영령암(英靈庵)은 오대산을 유람하다가 터만 남은 상원사를 보고 중창(重創)의 원을 세웠다. 판서 최백청(崔伯淸)과 그의 부인 김씨(金氏)가 그 뜻을 듣고 재물을 희사했고, 1376년(우왕 2) 공사에 착수해 다음 해 가을 낙성을 보았다.



같은 해 겨울 선객(禪客) 33명을 모아 10년 좌선(坐禪)을 시작했다. 5년째인 1381년 5주년 기념법회를 열자, 승당의 불상이 방광을 하고 향내음을 풍겼다. 중창주 김씨 부인은 이 사실을 목도하고 더욱 불교를 믿는 마음이 지극해졌고, 토지와 노비를 시주해 상원사가 영원히 존속될 수 있도록 했다.


조선시대에는 척불정책 속에 전국의 사찰이 황폐됐지만, 오히려 이 절은 더욱 발전했다. 척불정책의 대표적인 왕이었던 태종은 1401년(태종 1) 봄 상원사의 사자암을 중건할 것을 권근(權近)에게 명해 불상을 봉안하고, 스님들의 거처로 사용할 3칸 집과 2칸의 목욕소를 만들었다. 같은 해 겨울 11월 태종은 사자암에 왕림해 성대한 법요식(法要式)과 낙성식을 베풀었다.


이때 태종은 권근에게 명해, “먼저 떠난 이의 명복을 빌고, 후세에까지 그 이로움이 미치게 하여 남과 내가 고르게 불은(佛恩)에 젖고 유명(幽明)이 함께 의지하기 위함이니, 경은 기문(記文)하여 구원(久遠)한 세대에게까지 알게 하라.”고 했다. 또한, 이 절은 세조가 문수동자(文殊童子)를 만나 괴질(怪疾)을 치료받고, 고양이에 의해 자객의 습격을 피하는 등의 일화가 서려 있는 세조의 원찰(願刹)이기도 하다.



이러한 깊은 인연 속에서 세조는 신미(信眉)와 학열(學悅)의 권유로 상원사를 중창하게 된다. 1465년(세조 11) 학열이 공사의 총감독을 맡았고, 인수대비(仁粹大妃)는 경상감사(慶尙監司)에 명해 쌀 500석을 내어 강릉부(江陵府)로 운반하게 하고, 비단 1,000필을 함께 내어 공사비에 충당케 했다. 1466년상원사의 낙성식을 가졌는데, 크게 동서로 나눈 가람형식에 각각 상실(上室)을 지었다.


남쪽에는 다섯 칸의 누각을 짓고 범종을 안치했고, 동쪽에는 나한전(羅漢殿), 서쪽에는 청련당(淸蓮堂)을 지었다. 청련당의 서편으로는 재주실(齋廚室)을 지어 승당(僧堂)과 선원(禪院)으로 삼았다.


석조(石槽)와 집기(什器) 등 현존하는 거의 모든 유물들은 이때에 마련된 것이다. 그 뒤 인수대비는 탱화를 봉안키 위해 다시 조(租) 150석을 하사하고, 신미를 초대 주지로 모시게 했다.





세조도 상원사의 역사가 이룩된 다음 상원사에 들러 의발(衣鉢)과 좌구(坐具) 등 수선(修禪)에 필요한 물건들을 하사했다. 그 해 52명의 선객을 모아 수선을 시작했다.


예종은 세조의 뜻을 따르기 위해 1469년(예종 1)상원사를 세조의 원찰로 삼고, 전대에 하사한 전답에 대해서는 조세(租稅)하는 것을 금했다. 배불정책을 펴온 조선왕조의 보호를 받으면서 발전돼 온 이 절은 1946년 선원 뒤에 위치했던 조실(祖室)에서 시봉(侍奉)의 실화(失火)로 건물이 전소됐다.


1947년 당시 월정사의 주지였던 이종욱(李鍾郁)에 의해 금강산 마하연(摩訶衍)의 건물을 본떠서 중창했다. 동북 45도 방향의 이 절은 전면 8칸, 측면 4칸의 ‘ㄱ’자형 건물이다.



6.25전쟁 때는 이 절을 지키면서 수행 정진하던 당대의 고승 한암(漢巖)에 의해 월정사 등의 다른 오대산 사찰과는 달리 전화를 면했고, 현재까지 전국 수도승들의 요람으로 중요시되고 있다.


현존하는 당우로는 ‘ㄱ’자형 선원을 중심으로 승당인 소림초당(少林草堂), 영산전(靈山殿), 종각인 동정각(動靜閣), 후원(後院) 등이 있다. 선원은 청량선원(淸凉禪院)이라고 하는데 오대산을 일명 청량산(淸凉山)이라고 하는 데서 유래된 것이다.


선원 안에는 석가여래좌상과 문수보살상, 1984년 국보로 지정된 목조문수동자좌상, 3구의 소형 동자상, 서대에서 이곳으로 옮겨온 목각의 대세지보살상(大勢至菩薩像)이 함께 봉안돼 있다.



이들 가운데 문수동자상은 상원사와 밀접한 연관을 맺고 있고, 오대산이 문수보살의 주처(住處)임을 증명하는 역사적 산물이다. 이 상은 세조가 직접 친견했다는 오대산 문수동자의 진상(眞像)을 조각한 목조좌상이다.


이 동자상의 자세.수인(手印).의문(衣文) 등은 불상과 동일하지만 얼굴 부분만은 동안(童顔)으로, 두발을 위에서 두 가닥으로 땋아 동자상을 나타내고 있다. 이 동자상에서는 총 23점의 유물이 나와서 1984년 보물로 일괄 지정됐다.


또한, 선실 바깥 마루에 안치돼 있는 신중상(神衆像)은 일명 동진보살(童眞菩薩)이라고도 한다. 모든 신중들이 탱화로서 봉안돼 있는 데 대해, 이곳만이 유독 조상(彫像)으로 조성돼 있음이 특이하다.



높이 85㎝, 무릎폭 35㎝의 목조상으로서 머리에는 구름무늬의 보관을 썼고, 좌우 손은 문수동자와 같은 수인을 취하고 있는 점이 매우 특이하다. 의문은 투박하고 굵으며 양 어깨에서부터 전신을 무겁게 감싸고 있고, 가슴과 무릎, 다리 부분 등 여러 곳에 영락 등의 장엄구를 드리우고 있다.


형태는 완전히 의자형으로서 목제의자에 앉아 있다. 두 발 역시 투박한 신발에 싸여 군의(裙衣) 밖으로 나와 있고, 조각수법은 대체로 경직된 맛을 보이고 있으나 특이한 신중상이란 점에서 주목된다. 이 상의 조성연대는 세조의 상원사 중건연대로 추정된다.


현존하는 건물로는 1971년 강원도 유형문화재로 지정된 적멸보궁과 선원, 승당인 소림초당(少林草堂), 영산전, 종각인 동정각, 후원 등이 있다. 영산전은 선원 뒤쪽에 있다. 선원 화재시에 불길을 모면한 유일한 건물이다.



산내에서 가장 오래된 법당으로서 전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집이다. 전내에는 석가삼존상과 16나한상을 봉안했고, 또 세조가 희사한 '고려대장경'이 봉안돼 있다. 모두 39함이다.


영산전의 옆에서는 화강암 석재들이 출토돼 현재 법당 옆에 쌓여 있다. 이 탑은 사방에 삼존(三尊)의 불보살을 가득 새겼고, 옥개(屋蓋) 등에 층급을 나타내지 않고 낙수면에는 단순히 연화를 조각했을 뿐이다.


그리고 청량선원 옆에는 희귀한 당우가 있다. 승사(僧舍)로 사용되는 소림초당으로서 전면 6칸, 측면 4칸의 일반형 팔작집이다. 소림초당 앞에는 종각이 있다. 이곳에는 1962년 국보로 지정된 국내 최고(最古)의 상원사 동종이 있다.


# 상원사 동종



신라 성덕왕 24년(725)에 만든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 된 동종이다. 성덕대왕신종보다 45년이나 앞선다. 높이 1.67m, 종 입구가 91㎝이다. 몸체에 있는 당초문이나 비천상 조각이 빼어난 것은 물론이거니와 종소리가 어디 비할 데 없이 낭랑하다. 종을 보호하기 위해 타종을 금하고 있기 때문에 현장에서 종소리를 듣기는 어렵다. 


우리나라 동종 가운데 가장 오래 됐고, 조각 장식이 빼어날 뿐더러 소리가 매우 아름답다. 종신의 상대와 하대에는 화려한 당초문이 새겨져 있고, 종신에 조각된 비천상은 악기(공후와 생)를 연주하면서 곧 하늘로 솟아오를 듯 경쾌하다. 


비천상 사이에 당좌가 두 곳 있다. 당좌는 8엽의 연판으로 장식하고 다시 연주문대와 당초문을 돌렸다.



천상에서부터 악기를 연주하면서 내려왔다가 다시 솟구치는 모습이 박진감 있고 경쾌해 보인다.


종신 위에는 원통형의 음관과 용뉴가 있다. 음관은 위아래를 셋으로 나눠 갖가지 연화와 당초문을 장식했다. 용은 음관에 몸을 붙인 형상인데, 머리를 크게 만들었고 발톱이나 비늘 등의 조각이 살아 움직이는 것처럼 매우 힘차다.


위쪽에 4개의 유곽이 있다. 하나의 유곽 안에는 9개의 종유가 있다. 종유 좌우에는 종의 이름과 조성 연대를 적어놓았다.



세조가 상원사에 바치려고 전국을 수소문해 가장 아름다운 소리를 내는 종을 골랐다. 그것이 바로 안동 누문에 있던 종으로, 이것을 1469년 현재의 상원사로 옮겼다고 한다. 신기한 일은 안동 누문에 걸려 있던 종이 꼼짝도 하지 않아 종유 하나를 떼어내니 비로소 움직였다는 것이다. 전설을 입증하듯 지금도 유곽 안에 종유 하나가 없다.


이 종은 조각 장식이 매우 아름다운 것은 물론, 종소리도 매우 좋아 통일신라시대의 우수 작품으로 꼽힌다. 국보 제36호로 지정돼 있다.


한국전쟁 때 불에 타 녹아 없어질 뻔한 위기를 겪었으나 30년 동안 상원사 문밖 출입을 않고 수행 정진하던 방한암스님의 굳은 의지에 힘입어 월정사에 있던 선림원터 동종과 같은 불행은 면하게 됐다.


# 문수동자상



세조가 직접 보았다고 하는 문수동자의 모습을 조각한 목조좌상으로 상원사에서 가장 중요한 예불의 대상이 되고 있다. 어린아이 같은 앳된 얼굴에 중국 인형처럼 머리카락을 둥글게 말아 묶어 머리 양쪽에 고정시킨 모양을 하고 있다. 가슴의 목걸이 장식이 화려하다.


1984년 7월 21일 문화재로 지정하기 키 위해 기초 조사를 하던 중 문수동자상 속에서 부처의 진신사리, 세조의 둘째 딸 의숙공주가 왕세자의 만수무강과 아버지의 쾌유를 빈 기원문, 세조가 입었던 옷으로 보이는 저고리 두 점, 그리고 다라니 및 불경 13권이 발견됐다. 의숙공주의 기원문에 “이 복장 유물들을 세조 12년(1466) 2월에 사리와 함께 봉안하였다”는 내용이 적혀 있다.


문수동자상은 국보 제221호이고, 문수동자상 복장 유물은 보물 제793호로 지정돼 있다. 세조 어의를 비롯한 각종 복장 유물은 청량선원내의 유리 보호각 안에 진열돼 있다.


# 영산전 


영산전은 선원 뒤쪽에 있다. 선원 화재시에 불길을 모면한 유일한 건물이다.상원사 영산전(靈山殿)에 봉안돼어 있는 석가 삼존(釋迦三尊) 및 제존상(諸尊像)으로, 2011년 8월 12일에 강원도 유형문화재로 지정됐다.


영산전은 고대 인도의 영축산(靈鷲山)에서 석가모니가 여러 보살과 제자.호법신중 등을 모아 놓고 '법화경(法華經)'을 설법하던 당시에 장면을 사찰에 옮겨 놓은 것이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을 갖춘 상원사 영산전 중앙에는 석가여래를 중심으로, 왼쪽에는 미륵보살(彌勒菩薩)과 오른쪽에는 제화갈라보살(提花竭羅菩薩)이 수기삼존불(授記三尊佛)을 이루면서 봉안돼 있다. 그 좌.우에는 당시에 설법을 듣던 석가모니의 제자인 나한이 각 8구씩 모두 16구가 있다. 


16나한상/사진출처-문화재청이들은 현장(玄裝)이 번역한 '대아라한난제밀다라소설법주기(大阿羅漢難提蜜多羅所說法住記)'에 거론된 나한들로, 왼쪽에는 1, 3, 5, 7, 9, 11, 13, 15 나한이, 오른쪽에는 2, 4, 6, 8, 10, 12, 14, 16 나한이 배치돼 있다. 그리고 15나한과 16나한 끝에는 제석천(帝釋天) 1구와 사자(使者) 1구씩이 추가로 배치돼 있어 총 21구의 존상이 구성됐음을 알 수 있다.


이 상들은 미륵 보살상에서 발견된 조성 발원문과 중수 발원문을 통해 1711년(숙종 37) 혜주(惠珠), 정행(淨行), 사언(思彦) 등 3인의 조각승(彫刻僧)과 진취(進趣), 도청(道淸) 등 2명의 화승(畵僧)에 의해 제작돼 천주산(天柱山) 운복사(雲覆寺)에 최초로 봉안됐다가 이후 1886년(고종 23) 왕실의 내탕금(內帑金)을 시주 받아 당대 최고의 화승인 혜산당(惠山堂) 축연(竺衍)이 채색해 오대산 상원사로 이안됐음을 알 수 있다.


권속/사진출처-문화재청영산전 내에 봉안된 석가삼존 및 제존상은 모두 좌상의 형태로, 그 제작 기법은 본존불인 석가불과 일부 나한은 소조(塑造)이고, 나머지 상들은 목조(木造)로 제작됐다. 본존인 석가불은 높고 큼지막한 육계(肉髻)에 나발(螺髮)을 촘촘히 새겼고, 육계 중간에 위치한 중앙 계주도 뚜렷한 편이다. 풍만한 얼굴에는 코와 입이 거의 붙어있어 턱이 상대적으로 길어 보이고, 상체가 얼굴에 비해 작고 길며 하체는 낮고 짧아 전체적으로 보았을 때 빈약하고 양감이 없는 편이다. 오른손은 무릎 위에서 아래로 내렸고, 왼손은 엄지와 중지를 맞댄 이른바 항마촉지인(降魔觸地印)의 수인(手印)을 갖추고 있다.


석가불 좌·우에 위치한 미륵보살과 제화갈라보살은 높고 넓은 독특한 형태의 보관(寶冠)을 머리에 쓰고 두 손에 용화(龍華)와 여의(如意)를 쥐고 있는 차이가 있을 뿐, 본존과 동일하게 길고 풍만한 얼굴, 긴 상체에 비해 낮은 하체의 표현 등은 공통점이다.



나한들은 삼존불에 비해 상대적으로 각 존자별로 개성 있는 얼굴을 표현했다. 제1존자인 빈도라발라타사 존자(賓度羅跋囉惰闍 尊者)는 큼지막한 민머리, 사각형의 얼굴, 그 안에 눈꼬리를 내린 눈썹과 주먹코, 그리고 U자로 깊이 팬 두 뺨과 살짝 벌려 앞니를 들어 낸 입에서 늙은 비구지만 장난기가 가득한 모습이다. 이에 비해 제2존자인 가락가벌차 존자(迦諾迦伐蹉 尊者)는 수도승의 머리를 하고, 방형의 얼굴 안에는 길고 가느다란 눈썹과 매부리코, 작지만 굳게 다문 입에서 젊은 수도자의 모습을 찾을 수 있다. 16나한들은 각 존자별로 다양한 얼굴 표정을 갖추고는 있지만, 신체의 표현에서는 다소 형식화가 진행됐다.


15나한과 16나한 끝에는 천의를 입고 합장하고 있는 제석천과 무릎을 꿇고 두 손을 앞으로 모아 긴 막대를 쥐고 있는 사자가 있다. 이 상들의 얼굴, 신체 등에서 삼존불과 유사한 양식을 살펴볼 수 있다.



# 상원사 중창권선문


중창권선문/사진출처-문화재청 

세조 10년(1464)에 그가 상원사를 중창키 위해 쓴 친필 어첩 두 권을 말한다. 한 권에는 상원사를 중창하게 된 연유를 밝히고 있다. 한문과 함께 훈민정음체로 된 한글 번역문이 실려 있다. 다른 한 권에는 세조와 의숙공주의 친필 및 옥새인이 남아 있고, 효령대군과 정인지, 한명회 등 여러 대신들의 친필도 있다.


중창권선문/사진출처-문화재청 한글로 된 기록 중 판각이나 활자본이 아닌 먹과 붓으로 쓴 기록으로서 가장 오래 된 문서이고, 초기 한글 서체를 연구하는 데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또한 왕가에서 직접 사찰에 보낸 중요 문서이기도 하다. 보물 제140호로 지정돼 있고 월정사에서 보관하고 있다.


# 적멸보궁


오대산의 중심이 되는 비로봉의 중턱, 시야가 탁 트인 명당터에 적멸보궁을 세웠다.


중대 적멸보궁/사진출처-문화재청 적멸보궁에 오르기 전 중대 사자암이 먼저 나선다. 적멸보궁은 선덕여왕 12년(643)에 지어졌고 중대 사자암은 2년 뒤 월정사와 함께 창건됐다. 방한암선사가 사용하던 지팡이가 단풍나무로 무성히 자라고 있다. 


길 왼쪽으로 나무 뚜껑이 덮여 있는 ‘용안수’라는 조그만 우물이 있다. 적멸보궁이 풍수지리상 용머리에 위치하고, 이 우물은 그 왼쪽에 있다고 해 용안수라 했다. 이 물은 계곡을 따라 내려가 오대천을 만나고 한강에 닿게 된다.


상원사 적멸보궁은 우리나라 5대 적멸보궁의 하나로 자장율사가 당나라에서 가져온 부처님의 정골사리를 모신 곳으로, 정면 3칸 측면 2칸의 전각이 서 있다. 전각 안의 좌대에는 붉은색 방석만이 놓여 있을 뿐 불상이 없다. 전각 뒤쪽 작은 언덕에 부처의 정골사리를 모셨기 때문이다. 부처의 진신이 계신데 불상을 모셔둘 까닭이 없는 것이다. 건물 뒤쪽 석단을 쌓은 자리에는 50㎝ 정도 크기의 작은 탑이 새겨진 비석이 서 있다. 이것은 진신사리가 있다는 ‘세존진신탑묘’이다.


중대 적멸보궁 표석/사진출처-문화재청  오대산 중심 줄기인 비로봉 아래 용머리에 해당하는 이 자리는 조선 영조 때 어사 박문수가 명당이라 감탄해 마지않은 터이다. 팔도를 관찰하던 중 일찍이 오대산에 올라온 박문수는 이곳을 보고 “승도들이 좋은 기와집에서 일도 않고 남의 공양만 편히 받아 먹고 사는 이유를 이제야 알겠다”고 했다. 이런 둘도 없는 명당에 조상을 모셨으니 후손이 잘되지 않을 수 없다는 이야기겠다.


우리나라에는 불사리를 모신 적멸보궁이 여러 곳 있지만, 양산 통도사, 오대산 상원사, 태백산 정암사, 영월 법흥사, 설악산 봉정암의 적멸보궁을 가리켜 5대 적멸보궁이라 부른다./사진-박광준 기자 

0
  • 목록 바로가기
  • 인쇄


 한국의 전통사찰더보기
 박정기의 공연산책더보기
 조선왕릉 이어보기더보기
 한국의 서원더보기
 전시더보기
 한국의 향교더보기
 문화재단소식더보기
리스트페이지_004
모바일 버전 바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