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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서원 89] 오현서원으로 불리는 남원의 '유천서원 (楡川書院)'
  • 이승준 기자
  • 등록 2022-09-28 08:17: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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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준 기자] 전라북도 남원시 주생면 영천리에 있는 조선시대의 서원으로 오현서원으로 불린다. 


전라북도 남원시 주생면 영천리에 있는 '유천서원(전라북도 문화재자료 52호)'은 1830년(순조 30)에 지방 유림(儒林)에서 방사량.방귀온.안전.안창국.방응현의 학문과 덕행을 기리기 위해 창건했으나, 1868년(고종 5)에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돼, 안전과 안창국의 위패는 안씨 문중에서 옮겨가고 방사량.방귀온.방응현의 위패는 유허지에 묻고 제단을 마련해 향사를 계속해 왔다. '유천서원' 앞에는 1909년에 '오현서원유허비'가 세워져 옛 역사를 증언해주고 있다.



방사량(房士良, 미상~미상)은 고려 말 조선 초의 의원. 1391년(공양왕 3) 3월에 겸전의시승으로서 시무 11조를 올렸다. 1399년(정종 1)에 간행한 '향약제생집성방'과 '신찬집성마의방우의방'의 편집에 참여. '신찬집성마의방우의방'의 서(序)와 발(跋)에는 전의소감.지제생원사 등으로 돼 있다. 1401년(태종 1)에도 지제생원사로서 의료에 종사했다.


방귀온(房貴溫, 1465~미상)은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 남양(南陽). 자 옥여(玉汝), 호 금서(錦西). 의원이었던 사량의 증손, 할아버지는 구성, 아버지는 사정 계문, 어머니는 정존의 딸. 여러 대에 걸쳐 나주에서 살았다. 조광조의 문인. 1495년(연산군 1) 진사가 되고, 1517년(중종 12) 전라도관찰사 조원기로부터 부모상례를 잘 치르고 항시 마음을 돈독히 하면서 바른 일에 철저해, 효행이 지극한 자로 1518년 유일(遺逸)로서 헌릉참봉에 제수됐으나 나가지 않았다. 1519년 현량과에 3등으로 급제, 사간원정언이 됐다가 같은 해 기묘사화로 유배. 1538년 이조판서 윤인경의 상소로 인해 신원됐다. 



방응현(房應賢, 1524~1589)은 조선 중기의 학자. 본관 남양. 자 준부(俊夫), 호 사계(沙溪). 남원 출신. 할아버지는 호조좌랑 귀화, 아버지는 한걸. 일찍이 조식.이항의 문하에 출입하면서 학문을 닦았으나 관직에 뜻이 없어 과거에 나가지 않았다. 향리의 사계천 위에 집을 짓고 일생을 송시와 독서로 자적하는 가운데 과농(課農).이포(理圃).관개(灌漑).화죽(花竹) 등 농학분야의 생리문제에 관심을 뒀고, 동향의 임란의병장 변사정과 친교가 두터웠다. 


안전(安瑑, 미상~미상)은 조선 중기 전라북도 남원 출신의 유학자. 본관 순흥(順興). 자 문보(文寶), 호 죽암(竹巖). 사재당 안처순의 아들. 안전은 문장과 행실이 뛰어났으나 과거 공부를 달가워하지 않았다. 오히려 자신의 덕성을 숨기면서 벼슬길에 나아가지 않았다. 



안창국(安昌國, 미상~미상)은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 순흥. 자 언승(彦升), 호 매당(梅潭). 조부는 기묘 명현인 사제당 안처순, 부친은 죽암 안전. 일재 이항의 문인이고 재행(才行)으로 천거돼 찰방에 제수됐으나 바로 그만뒀다. 영사정을 중수해 죽을 때까지 아버지를 그리워하면서 머물렀다. 1592년 임진왜란으로 많은 자금을 써서 의병을 도와서 그 공으로 남원 유천사에 제향됐다. 


유천서원은 1984년 4월 1일 전라북도 문화재자료 제52호로 지정. 1830년(순조 30) 지방유림들에 의해 창건된 서원으로 방화원이 소유.관리한다./사진-윤정숙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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