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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서원 88] 옥계 노진을 제향하는 서원, 남원 '창주서원'
  • 이승준 기자
  • 등록 2022-09-25 08:26: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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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준 기자] 창주서원(滄州書院)은 조선 중기의 지방 관리이자 많은 유림들로부터 존경을 받았던 옥계(玉溪) 노진(盧稹)의 학문 업적과 효행, 덕행을 기리며 후진 양성과 함께 매년 음력 3월 20일에 제향하는 사림의 서원이다.


노진은 본관이 풍천으로, 자는 자응(子噟), 호는 옥계(玉溪)로, 경상남도 함양 옥계동에서 살았다고 해서 보통 옥계 선생이라 불렸다. 노진은 1537년(중종 32)에 생원시에 합격하고 1546년(명종 1)에 증광문과 을과에 급제한 인물로, 승문원 박사를 시작으로 담양부사, 전주부윤, 진주목사, 충청도 관찰사, 홍문관 직제학 형조참의, 대사헌 등을 역임하고 1575년 예조판서에 올랐다.



또한 효성이 지극해 6살이라는 어린 나이에 부친이 죽자 3년 동안 혹독한 겨울 여묘살이를 하고, 시묘 3년상을 치르자 백성의 칭송이 자자했고, 명종의 치하를 받았고, 1555년(명종 10) 지례현감 시절 고을 백성들의 칭송을 받으면서 청백리 선비의 반열에 올랐다.


선조 때에는 정려(旌閭)의 은전을 하사받고, 문효공(文孝公)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특히 학문적으로 기대승, 노수신, 김인후 등의 학자들과 교류하면서 유학 진흥 및 후진 양성에 주력하였으며 여러 지방의 관리로서 조선시대 사림의 발전에도 크게 이바지했다. 저서로서 '옥계문집(玉溪文集)'이 전해지고 있다.



창주서원은 1579년(선조 12)에 현재의 남원시 금지면 옹정리 금정마을에서 창건됐다. 원래 고룡서원으로 설립됐다가 사액을 받지 못했으나 1600년(선조 33)에 ‘창주서원’이라는 현판을 임금이 하사하면서 국가로부터 재정적 후원을 받게 됐다.


흥선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에 의해 훼철됐다가 1959년 다시 중건돼 현재의 남원시 도통동 자리로 이전돼 오늘에 이르고 있다. 창주서원에서는 해마다 옥계 노진의 위패를 모신 ‘춘향(春享)’ 행사를 음력 3월 20일에 하고 있다. 노진이 지은 '옥계집'에는 '춘향전'의 근원 설화로 알려진 '노진설화'가 실려 있다. 1984년 4월 1일 전라북도 문화재자료 제51호로 지정됐고, 2021년 11월 19일 문화재청 고시에 의해 문화재 지정번호가 폐지돼 전라북도 문화재자료로 재지정됐다.



창주서원의 형태는 제각과 내삼문, 그리고 사당으로 구성됐다. 제각은 정면 5칸, 측면 2칸의 건물로 팔작지붕형이고 처마는 앞뒤가 모두 겹처마다. 기둥은 모두 두리기둥으로 건축돼어 있다. 제각 평면은 왼쪽에 방 2칸, 중앙에 대청 2칸, 그리고 동쪽에 방 1칸으로 구성됐다. 대청의 전면은 개방돼 있다.


특히 내삼문을 평삼문의 형태로 건축했고, 각 칸에는 두 짝 열 개의 널문을 달았고, 바깥쪽에는 태극 문양을 새겼다. 내삼문 왼쪽에는 창주 서원 기록 비석인 ‘창주서원묘정비(滄州書院廟庭碑)’가 자리하고 있다.



사우(祠宇)인 명덕사(明德祠)는 정면 3칸, 측면 2칸의 규모이고, 맞배지붕으로서 앞뒤 겹처마 형태를 띠고 있다. 앵 박공 머리에는 방풍판을 달았고 기둥 역시 두리기둥 형태로 건축되었다. 주초는 원주형으로 깍은 화강석이다. 명덕사의 공포(栱包)는 이익공 집에 가까운 형태로서, 기둥 위의 기둥머리(주두)가 대들보와 도리를 받치고 있다.


창주서원은 16세기 사화의 난을 계기로 만들어진 다른 서원의 형태와 다르지 않다. 특히 배움의 장을 갈망하는 향촌 사회의 수요에 적극 대처해 사회적으로 존경받는 명망 선비들의 제례를 행하면서 남원도호부 향토 교육의 요람이 됐다.



특히 자체 서원 원규를 두고 운영돼 오다 서원 철폐령에 의해 훼철되기 전까지 봄과 가을에 원생이 중심이 되는 선현 제향 행사와 함께 유교와 성리학과 배우는 교육 기관이었다.


또한 강학 활동 역시 기초 학문인 '소학'에서부터 사서삼경과 '가례' '심경' '근사록' '사기' '주역' 등을 순서대로 익혀 학문적인 윤리적 체계를 갖췄다.


창주서원은 사림의 주요 기반이 된 덕분에 정계에서 쫓겨난 풍천노씨 가문 선비들의 은신처도 됐고, 붕당의 후방 기지로서 정계 진출을 위한 교두보 역할을 하는 등 학문 수양을 비롯해 그 존재를 지역 사회에서 중요하게 부각시켰다./사진-윤정숙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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