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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궐이야기 19] 홍례문 영역/궁궐다리-경복궁 영제교(景福宮 永濟橋)
  • 이승준 기자
  • 등록 2021-12-11 07:58:18
  • 수정 2024-04-15 17:1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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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선 왕조 제일의 법궁 '경복궁'(5)

흥례문과 좌우행각[이승준 기자] 궁궐다리-경복궁 영제교(景福宮 永濟橋)는 경복궁 안에 경회루 연못에서 흘러 나와 근정문과 홍례문 사이를 통과해 동십자각 옆의 수구(水口)로 나아가 삼청동천과 합류하는 물줄기에 있던 다리로, 궁궐 안에 있는 어구(御溝)를 금천(禁川)이라고 하고 그 위에 놓인 다리를 일반적으로 금천교(禁川橋)라고도 불렀다. 다만 경복궁의 금천교를 영제교(永濟橋), 창덕궁의 금천교를 금천교(錦川橋), 창경궁의 금천교를 옥천교(玉川橋)라고 해 별도의 이름을 붙였다.


태조 4년(1395) 경복궁을 건설할 때 만들어진 다리로, 세종 8년(1426) 영제교라고 이름지었다. 1916년 일제가 조선총독부를 건립하면서 해체됐고, 석재 일부가 수정전(修政殿) 앞에 있던 것을 1965년 근정전 동행각과 건춘문 사이로 옮겨 복원했다가 2001년 경복궁 홍례문 일곽을 중건하면서 원래 자리에 이전 복원했다.


景福宮 永濟橋는 경복궁의 금천교이다.


경복궁의 금천금천교는 말그대로 금천을 건너기 위해 세운 돌다리이고, 금천은 풍수지리적인 이유와 외부와의 경계를 나타내기 위해 궁궐의 정문과 중문 사이에 둔 인공 개천이다.


하지만 경복궁의 경우는 중문과 정전 정문 사이에 금천이 있다. 그래서 영제교 역시 광화문과 흥례문 사이가 아닌, 흥례문과 근정문 사이에 위치해 있다.


1395년(태조 4년) 9월, 경복궁이 창건될 때 만들어졌다. 처음에는 이름도 없이 그냥 ‘석교(石橋)’라고 불렸다. 그리고 개천을 따로 파지 않고 그냥 흐르는 도랑 위에 지은 것으로 보인다.


태종 대에야 비로소 제대로 금천을 팠고 세종 대에 ‘영제교(永濟橋)’라는 이름을 붙였다.


어구-경복궁의 금천1592년(선조 25년) 임진왜란으로 경복궁이 폐허가 됐으나 영제교는 돌로 만들어서 큰 훼손 없이 남아있었다. 이후 270여 년간 방치됐다가 1865년(고종 2년) 경복궁이 중건되면서 다시 궁궐의 금천교 역할을 수행했다.


그러나 일제강점기인 1915년에 ‘시정 5주년 기념 조선물산공진회’가 경복궁에서 열리면서 흥례문과 주변 행각이 철거될 때 같이 헐렸다. 그리고 공진회 개최 1년 뒤인 1916년, 영제교가 있던 자리에 조선총독부 청사가 지어지면서 1990년대 말까지 80여 년이 넘는 시간동안 제 자리를 잃었다. 처음에는 조선총독부 박물관 근처에 영제교 부재를 모아 뒀다가 해방 이후인 1950년대에 임시로 수정전 앞에 설치했고, 1970년대에 다시 경복궁의 동문인 건춘문 안쪽과 근정전 사이로 옮겨 놓았다. 이렇게 여러 번 옮겨다니면서 다리의 아치도 2개였던 게 1개로 바뀌는 등 많이 훼손됐다.


영제교 밑을 흐르던 경복궁의 금천은 북악산에서 발원해 삼청동천(중학천)으로 흘러들던 '대은암천(大隱岩川)'이다.


현재의 청와대 경내에서 발원하는 두 물줄기 가운데 하나는 경복궁 밖을 빙 돌면서 흐르다가 궁 안으로 들어가고, 다른 하나는 경복궁의 북쪽 정방향 끝에 있는 수문을 통해 궁으로 들어와 향원지와 경회루 연못을 채웠다.


금천을 지키는 천록

두 물줄기는 경회루 남서쪽에서 합쳐져 남쪽으로 쭉 흐르다가 영추문 언저리에서 동쪽으로 꺾이면서 영제교를 거쳐 경복궁의 동남쪽 담 아래로 빠져나가 삼청동천(중학천)을 거쳐 청계천으로 흘러들었다. 그러나 일제강점기에 금천과 경복궁의 물줄기는 대부분 메워졌고 영제교 복원 시 다시 팠지만 딱 흥례문, 근정문 사이 영역만 복원해 현재에 이르지만, 물은 흐르지 않는다. 


경복궁 영역 밖의 대은암천 구역도 상류의 계곡 부분을 빼고 지금은 전부 복개됐다.


너비 약 10m(33자), 길이 약 13m(43자)로, 다리 위엔 귀틀석과 청판석을 교대로 배열하면서 3개의 돌길을 놓았다. 가운데를 왕만이 다닐 수 있는 어도(御道)로 정했고 어도 부분을 신하들이 다니는 길보다 약간 높게 세워 서열을 나타내고 있다.


다리 윗부분 동.서 가장자리에는 돌 난간을 설치했다. 각각 양측 끝에 용을 조각한 돌 기둥을 세우고 그 사이마다 13개의 돌 난간을 놓은 뒤 그 위에 난간을 고정키 위해 단면이 8각형인 긴 돌을 얹었다. 난간 상부와 하부엔 앙련과 복련을 각각 조각하고 상, 하부를 연결하는 가운데 돌은 연주문을 새겨 화려함을 나타냈다. 



중앙이 약간 솟아올라있는데, 비올 때 빗물이 다리에 고이지 않고 자연스럽게 빠지게 하기 위한 것이다. 


다리 아랫 부분에 무지개 모양의 아치를 2개 만들고 윗부분 돌과 아치 돌 사이의 공간은 판축다짐으로 채웠다. 아치를 받치는 돌을 선단석이라 한다. 선단석은 2단으로 되어있고 전부 금천 바닥 밑에 박혀 있으나, 그 중 반 단은 밖으로 돌출돼 있다. 그리고 선단석 밑에 지대석을 두어 더욱 튼튼하게 했다. 


영제교 천록은 영제교의 동북쪽에 있다. 금천 축대 4방에 4마리의 서수 상이 있다. 온 몸이 비늘로 덮여있고 정수리에 뿔이 달려있고 겨드랑이와 뒷 다리 부근에 갈기가 선명하게 나있는 모습이다. 이 녀석의 정체는 과연 무엇일까?


우선 임진왜란 때 일본군 종군 승려로 경복궁을 직접 보았던 제타쿠(釋是琢)가 쓴 ‘조선일기’에 의하면, 제타쿠는 사자라고 했는데 여기서 말하는 사자는, 우리가 생각하는 Lion이 아니라 산예(狻猊)라는 상상의 동물을 말한다. 그러나 산예는 아닐 가능성이 높은 게, 불을 좋아하는 특성이 있어 화재를 제일 두려워하는 궁에서 굳이 조각해서 둘 일이 없기 때문이다.



조선 후기 유득공의 아들 수헌거사는 ‘경복궁유관기’라는 책에서 소개한 천록은 ‘후한서’ - 영제기에 나온 상상의 동물인데, 요사스럽고 나쁜 것을 물리치는 벽사(辟邪)의 능력을 가졌다고 한다. 즉, 외부의 잡귀를 막는 상징적 경계인 금천에 사악하고 나쁜 것을 물리치는 동물인 천록을 둠으로써 궁궐의 신성함을 더욱 돋보이려 했던 것이다. 그래서 그런 지 4마리의 천록 모두 금천 바닥을 마치 감시하듯이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는 모습이다.


영제교 서북쪽에 있는 천록이 제일 유명하다. 왜냐하면 유일하게 메롱하고 있기 때문.(...) 이 사실은 극소수의 궁 마니아들만 알다가 2006년 KBS ‘스펀지’에 소개돼 대중들에게 널리 알려졌다. 그래도 현재는 사람들을 절로 미소짓게하는 익살스러운 모습으로 많은 관심과 사랑을 받고 있다. 메롱해치라는 이름으로 캐릭터화까지 됐다./사진-이승준 기자 


유화문-신료들이 서쪽 궐내각사와 빈청을 드나들던 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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