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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시 구석 구석 291] 조선시대 궁중에 꽃-과일 공급하던 관청 '장원서' 터
  • 우성훈 기사
  • 등록 2024-03-12 20:28:32
  • 수정 2024-04-10 23:3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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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독도서관 왼쪽 담장 아래로 난 화개6길 끝나는 지점 전봇대 아래(세계 장신구 박물관 골목)[우성훈 기자] 장원서는 조선시대 궁중 정원의 꽃과 과원의 과일나무를 관리하면서, 수시로 궁중과 관아에 꽃과 과일을 공급하던 관청이다. 장원서는 끊임없이 과수의 수종을 개량하고 제주도의 감귤을 남해안에 이식하는 등의 일도 수행해 오늘날의 원예연구소와 같은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장원서 터 표지석에는 '조선시대 왕실의 과수원을 관리하고 궁중에 꽃과 과일을 공급하던 관청'이라고 적혀있다. 


장원서등록

1394년(태조 3)에 동산색(東山色)을 상림원(上林園)으로 고쳐 천신(薦新).진상(進上)과 사신 접대 등에 필요한 각종 과일의 공급을 담당하게 했고, 1466년(세조 12) 관제 개정 때 상림원을 장원서로 이름을 바꾸었다. 1882년(고종 19) 제향(祭享) 물품에 관한 일이 봉상시(奉常寺)로 옮기면서 의영고(義盈庫).사재감(司宰監) 등과 함께 장원서를 폐지했다.


'경국대전'에 의하면, 장원서의 관원은 제조(提調) 1명, 별제(別提) 3명, 정6품의 장원(掌苑) 1명이 있었다. 장원서에는 내시별감(內侍別監)이 소속되어 잡무에 종사했으므로 잡직(雜織)을 주기도 했다. '대전회통'에 의하면, 주재관(主宰官)인 정6품 장원이 폐지되면서 종6품아문으로 되었고, 관원으로 종6품의 별제 2명, 종8품의 봉사(奉事) 1명을 두었다. 이속(吏屬)으로 서원(書員) 5명, 고직(庫直) 1명, 대청직(大廳直) 1명, 사령(使令) 4명, 대청군사 1명, 역인(役人) 12명 등이 소속되어 있었다.


장원서 터 표지석에는 '조선시대 왕실의 과수원을 관리하고 궁중에 꽃과 과일을 공급하던 관청'이라고 적혀있다. 장원서는 각종 과수나무와 화초 재배를 관장하던 과원색(果園色), 배․밤․은행․석류․유자 등 생과일을 종묘에 올리고 생일이나 절일(節日)에 국왕에게 진상하는 일을 하던 생과색(生果色), 곶감․잣․호도․대추 등의 건과에 관한 일을 맡던 건과색(乾果色), 공납(貢納)된 미곡의 사용을 담당하던 작미색(作米色) 등으로 업무를 나누어 관장했다.


궁중에 꽃이나 과일을 공급하는 일을 담당하던 장원서는 과원색(果園色)․생과색(生果色)․건과색(乾果色)․작미색(作米色)․장무색(掌務色) 등의 실무 부서를 두어 업무를 나누어 담당하게 했다. 과원색은 장원서에 속한 각종 과수나무와 화초를 재배하는 일을 관장했는데, 재배할 과수나무와 화초는 각처의 동산직(東山直)이 채납(採納)하도록 했다. 



생과색은 배, 밤, 은행, 석류, 유자 등의 생과일을 종묘에 천신(薦新)하고, 탄일(誕日)과 절일(節日)에 진상하는 일을 관장했다. 건과색은 곶감, 호두, 잣, 대추, 밤 등의 건과를 진배(進排)하는 일을 맡았고, 작미색은 장원서에 공납된 미곡의 사용을 담당했고, 장무색은 장원서의 서무를 담당했다. 장원서에서는 궁중에 각종 과일을 공급하기 위해 궁중뿐만 아니라 용산, 강화, 남양, 과천, 양주, 고양, 부평 등지에 과수원을 두고 그곳에서 생산되는 과일을 궁중에 납부했다.


장원서는 지금의 종로구 화동 23번지에 있었고, 화동(花洞)이라는 동명은 장원서가 이곳에 있기 때문에 생겨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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