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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시 구석 구석 289] 죽음으로 절개 지킨 충신 '성삼문'
  • 박광준 기자
  • 등록 2024-03-09 23:00:08
  • 수정 2024-04-10 23:29: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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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삼문 영정 [박광준 기자] 성삼문은 조선 전기의 문신.학자로, 세종 때 '예기대문언두'를 편찬하고 한글 창제를 위해 음운 연구를 해 정확을 기한 끝에 훈민정음을 반포케 했다. 세조가 단종을 몰아내고 왕위에 오르자 단종의 복위를 협의했으나 김질의 밀고로 체포돼 친국(親鞫)을 받고 처형됐다.


성삼문의 본관은 창녕(昌寧)이고, 자 근보(謹甫)·눌옹(訥翁). 호 매죽헌(梅竹軒). 시호 충문(忠文). 사육신의(死六臣) 한 사람이다. 1418년(태종 18년) 무관 성승(成勝)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출생시 그의 모친이 꿈에서 '낳았느냐?'라는 질문을 세 번 받았다고 해서 이름은 삼문(三問)이라고 지었다. 


정독도서관 앞에 있는 성삼문선생 살던 곳 표지석1435년(세종 17) 생원(生員)시에 합격했고 1438년 식년문과(式年文科)에 급제했다. 1447년 문과중시(文科重試)에 장원했고, 경연 시강관(侍講官), 사간원 우사간(右司諫), 집현전 부제학(副提學), 예조 참의(參義), 동부승지(同副承旨), 우/좌부승지(右/左副承旨) 등을 역임했다. 그 후 왕명으로 신숙주(申叔舟)와 함께 '예기대문언두(禮記大文諺讀)'를 편찬하고 경연관(經筵官)이 되어 세종의 총애를 받았다.



1442년 박팽년(朴彭年).신숙주.하위지.이석정(李石亭) 등과 삼각산 진관사(津寬寺)에서 사가독서(賜暇讀書)를 했고, 한글의 창제를 위해 정인지(鄭麟趾).최항(崔恒).박팽년.신숙주.강희안(姜希顔).이개(李塏) 등과 함께 요동(遼東)에 유배되어 있던 명나라의 한림학사(翰林學士) 황찬(黃瓚)에게 13번이나 내왕하면서 음운(音韻)을 질의하고 다시 명나라에 건너가 음운 연구를 겸해 교장(敎場)의 제도를 연구, 그 정확을 기한 끝에 1446년 9월 29일 훈민정음(訓民正音)을 반포하는데 큰 공을 세웠다.


사육신묘 내에 있는 문성사1455년 세조가 단종(端宗)을 몰아내고 왕위에 오르자, 1456(세조 2)년 6월 명나라 사신이 귀국하는 환송연 자리에서 아버지 성승(成勝)과 무인 유응부(兪應孚) 등이 국왕 양쪽에서 칼을 들고 지켜 서있는 운검(雲劍)의 기회에 세조일파를 척결하고 단종복위를 계획했다가 모의에 가담했던 김질(金礩)이 실패를 우려해 이를 밀고해 성삼문 등 가담자(박팽년, 유응부, 이개, 하위지 등) 전원이 처벌됐다. 체포되어 친국(親鞫)을 받고 다른 주모자들(박팽년, 이개, 하위지, 유응부)과 함께 작형(灼刑)을 당했고, 군기감(軍器監) 앞에서 거열형(車裂刑)을 받았다(유성원은 자살). 


사육신묘 내에 있는 성삼문 묘이어 아버지 승도 주모자의 한 사람으로 극형에 처해졌고, 삼빙(三聘).삼고(三顧).삼성(三省) 세 동생과, 맹첨(孟詹).맹년(孟年).맹종(孟終)과 갓난아기 등 네 아들도 모두 처형됐고, 여자들은 모두 노예가 되었다.


1691(숙종 17)년에 사육신의 관직이 복구되고 민절(愍節)이라는 사액을 내려 노량진에 민절서원을 세워 신위를 모시게 했다. 그 밖에 홍주(洪州) 노은동(魯恩洞)에 있는 그의 옛집 녹운서원(綠雲書院), 영월의 창절서원(彰節書院), 의성의 학산 충렬사(鶴山忠烈祠), 창녕의 물계세덕사(勿溪世德祠), 연산(連山)의 충곡서원(忠谷書院) 등에 6신과 함께 제향되고 있으며, 1758년(영조 34)에는 이조판서가 추증됐다. 문집에 '성근보집(成謹甫集)'이 있다./사진-박광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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