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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특집 9] 독도의용수비대원들의 공로 ‘괄목’...독도경비 임무 경찰에 이관
  • 심종대 발행인
  • 등록 2023-12-06 13:35: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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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끊임없는 독도의 개발

독도의용수비대원들은 독도의 절벽에 우리 영토를 표시하는  글자를 새기기로 결정했다. 이에 울릉도 서예가 한진호 씨가 바위 위에 '한국령' 글씨를 쓰고 수비대원들이 직접 새겼다. 한국형 바위는 이후 눈에 듸도록 글씨에 색을 입히는 등의 과정을 거쳐 현재에 이르게 되었다. 

울릉도의 주민들이 범선을 타고 독도에 왕래하던 때는 이미 옛날 이야기이고 동력선이라할지라도 똑딱선을 타고 다니던 시기도 이미 지난날의 이야기가 되고 말았다. 이즈음은 중.대형어선이나 관공선이 수시로 독도에 왕래한다. 따라서 독도는 울릉도와 거리가 단축됐고 드러나는 사람의 數도 무척 많아졌다. 독도해안의 어장을 개척하고 관리하기 위해 주소지를 그곳으로 옮기고 아예 독도에 정주하는 사람까지 생겼다. 


최종덕 가족이 독도 정주민 제1世였다. 최는 1981년 10월 14일부터 독도에 입주해 그가 사망한 1987년 9월 23일까지 그곳에서 제반시설을 갖추고 어업에 종사했다. 1987년 7월 8일 입주한 조준기 가족은 독도정착민 제2세이다. 조는 최가 경영하던 어장을 인수받아 어업을 승계하고 있다. 


생전의 독도최초 주민 고 최종덕씨 독도는 최종덕, 조준기 일가 이외에도 인구가 많았다. 독도정착민 제1세인 최종덕보다 무려 30년 이전부터 독도에는 사람들이 붐볐다. 봄과 여름에 일반적으로 어로 차도항이라는 사람 이외에 각종학술조사단이 수시로 다녀갔고 대한노인회원을 비롯한 여러 단체에서 관광차 독도에 왕래한 일도 많았다. 독도에 장기간 상주한 집단도 있었다. 


그 집단은 ‘독도의용수비대’員 들이었다. 독도의용수비대가 창설되어 대원들이 독도에 상륙한 것은 1953년 4월 20일이었다. 이 수비대가 창설된 동기는 1952년에 선포된 이승만대통령의 해양주권선언에 대한 일본측의 이의에서 독도가 일본의 영토라고 주장해온데 대한 것이다. 대원들의 대부분은 울릉도청년들이었고 그들 대부분은 6.25동란에 대한 참전하였다가 제대한 사람들이었다. 그가운데는 상이용사가 많았다. 


독도의용수비대독도의용수비대의 편성과 대원명단은 대장 홍순칠, 부관 황영문, 제1전투대장 서기종, 제2전투대장 정원도, 후원지원대장 김병열, 교육대장 유원식, 보급대장 김인갑 등이었고, 대원은 최부업, 하자진, 김용근, 김장호, 김재두, 김현수, 양봉준, 이형우, 조상달, 김경호, 김수봉, 김영복, 김영호, 이규현, 이상국, 허신도, 박영희, 정재덕, 한상용, 오일환, 고성달, 구용복, 안학률, 이필영, 정이관, 정현권이었고, 이 외에 보급선 1척이 있었는데, 선주 겸 선원인 정형권, 선장 정이권, 기관장 안학률, 신판원 이필영으로 되어 있었다. 이들 30여 명의 대원들은 일본의 독도에 대한 터무니 없는 주장과 일본어선들이 독도근해에 와서 어로작업을 하고 았음에 독도수호를 결심하고 동지를 규합하 것이었다. 



이들이 갖춘 장비는 80mm 박격포 1문, 경기관총 3정, M1소총 20정, 칼빈소총 3정으로 이 장비의 대부분은 2군사령부로부터 지급받은 것이었다. 이 수비대원들이 1953년 4월 20일부터 1956년 12월 30일에 독도 수비 임무를 경찰에 인계할 대까지 활약한 주요실적을 보면 1953년 6월 24일 일본이 어느 수산고등학교 실습선이 독도해안까지 진입한 것을 나포했다가 학생들의 실습선임을 확인하고 이를 방면귀환시켰고, 같은 해 7월 12일에는 일본해상보안청소속 순시선이 독도에 접근하는 것을 목격하고 위협 발포를 해 이를 격퇴시켰고 1955년 11월 21일에는 일본해상보안청 순시선 3척과 비행기 1대가 독도에 접근하는 것을 총격 끝에 퇴거시킨 사건들이 있다. 


전마선을 이용해 이동하는 독도의용수비대 /독도의용수비대기념관 제공이 무렵 우리나라는 6.25동란 직후였으므로 나라의 형편이 어지럽기 이를데 없는 시기였고 일본은 샌프란시스코 평화조약이 발효되어 국권을 완전히 회복하였을뿐 아니라 6.25 덕분으로 경제적으로로도 도약의 호황을 맞은 때였다. 이런 시기에 독도에 눈독을 들인 일본인들의 독도침략을 저지시킨 독도의용수비대원들의 공로는 높이 괄목할만하다. 이들의 공로를 인정받은 것은 수비대가 해체된 후 전원에게 상당한 기간이 지난 1976년 4월 12일에 가서였다. 정부에서 수비대원 전원에게 포상하였는데, 대장인 홍칠순에게는 건국공로훈장을, 여타대원에게는 防衛褒章을 수여했다. 


독도의 중요성을 감안해 우리 정부에서는 6.25동란의 불씨를 겨우 끈 1956년 4월 8일 독도수비 임무를 민간차원에서 경찰에 이관하기로 방침을 결정하고 같은 해 12월 30일에 독도경비 임무를 경찰에 맡겼고 지금도 울릉경찰소속 경찰관들이 교대로 독도경비 임무에 임하고 있다. 


현재 독도물골 모습 /독도의용수비대기념관 제공독도개발과 인연이 깊은 또 하나의 집단은 울릉애향회이다. 울릉애향회는 순수민간자생단체로 회원은 애향심이 강한 울릉도 토박이들이다. 이들은 향토의 발전을 위해 소박한 일들을 많이 했는데 정부의 국토가꾸기 사업에 협조하고 향토의 綠化에도 기여하기 위해 1973-1977년에 걸쳐 많은 경비와 인력을 투입해 독도에 나무를 심었다. 심은 수종은 시헌식수를 위한 명종을 제외하고는 모두 해송이었는데, 묘목(苗木)은 모두 울릉도에서 재배해 여러차례 이식한 것으로 모두 잘 자랐다. 그런데 뜻밖에 사태가 발생했다. 겨울이나 이른봄에 굶주린 토끼들이 소나무의 껍질을 모조리 벗겨먹은 것이었다.


회원들의 실망은 컸지만 어찌할 방법은 없었다. 잏수 獨島植樹事業은 중단되고 말았다. 독도에는 원래 토끼가 없었다. 문제의 토끼는 독도경비원들이 부식용으로 반입했던 것의 일부가 탈출해 번식한 놈들이다. 


현재 독도 사진

독도에 사람이 상주하게된 이래 개발노력은 계속됐다. 절벽에 길을 내기도 하고 보급품을 山頂까지 운반하기 위한 헬리콥터장을 설치했고 1983년에는 서도의 물골에 저수탱크를 만드는 한편 波濤가 높을 때 배로 물을 운반하지 못할 경우에 대비해 서도황단계단 555m를 준공했다. 


독도개발사업이 더욱 활발해진 것은 1988 년부터이다. 울릉군청에서 입안한 독도정착기빈조성사업계획에 따라1억원을 투입해 추진한 사업을 보면, 선착장 7m, 인양장 8m, 어민숙소 7평, 창고 10평, 급수탱크(3톤) 1개소, 간이기상측정기 3조, 전마선(傳馬線) 3척, 인양기 1대설치, 원동기 2대설치, 발전기 1대설치, 이 외에 또끼를 모두 잡아내고 독도에서 잘 자랄 향토식종 1万余種을 심었다.<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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