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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전통사찰 80] 의병장 고광순 순절비가 있는 '연곡사'
  • 박광준 기자
  • 등록 2023-01-21 14:30:44
  • 수정 2024-04-02 04:1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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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곡사 전경 [박광준 기자] 화엄사와 함께 지리산에 가장 먼저 들어선 절로 알려지고 있는 연곡사(鷰谷寺)는 현대사의 질곡을 간직한 사연 많은 피아골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직전리 조금 못미처 자리잡고 있다. 


연곡사가 있는 피아골로 오르다보면 좁은 산비탈을 일궈 만든 계단식 논들을 볼 수 있다. 피아골은 한국전쟁 직후 빨치산의 아지트였기에, 이들을 토벌하려는 군경과의 치열한 격전이 벌어진 곳이었다. 피아골의 이름도 그렇게 죽어간 이들의 피가 골짜기를 붉게 물들였기에 붙여진 것이라는 말이 있으며, 당시 죽은 이들의 넋이 나무에 스며들어 피아골 단풍이 여느 단풍보다 유난스레 붉다고도 한다.




그러나 실제 피아골이라는 지명은 옛날 이곳에서 오곡의 하나인 식용 피[稷]를 많이 가꾸었기 때문에 피밭골이라 했다가 바뀐 이름이며, 피아골 입구의 직전리(稷田里)가 그런 주장을 뒷받침해준다.


대한불교조계종 제19교구 본사인 화엄사(華嚴寺)의 말사이다. 통일신라시대에 연기조사(緣起祖師)가 창건했고, 신라 말기부터 고려 초기까지는 수선도량(修禪道場)으로 이름이 높았던 사찰이었다. 그 뒤 임진왜란 때에 왜병에 의해 전소된 뒤 태능(太能, 1562∼1649)이 중창했다. 1745년(영조 21)에는 연곡사가 밤나무로 만드는 왕실의 신주목(神主木)을 봉납하는 곳으로 선정됐다.



1907년 의병장 고광순(高光洵)이 당시 광양만에 주둔하고 있는 일본 정규군을 격퇴하기 위해 의병을 일으켜 연곡사로 집결시켰다. 이때 그 정보를 입수한 일본군에 의해 고광순과 의병들은 모두 순절했고, 절은 왜병들에 의해 방화를 당했다.


그 뒤 1942년에 다시 중건을 했으나 6.25전쟁 때 피아골 전투로 다시 폐사가 된 뒤로 사찰분규와 교통사정 때문에 재흥을 보지 못하다가 1965년에는 소규모의 대웅전이 요사채를 겸해 세워졌고, 1981년에 1억3000만 원의 예산을 들여 새 대웅전을 준공했다. 이어서 1983년에 대적광전과 관음전을 지었고, 1994년에 요사를 증축했다. 1995년에는 일주문을 세웠고, 1996년에는 종각과 수각을 지어 오늘에 이른다.



이 절에는 1962년 국보로 지정된 구례 연곡사 동 승탑과 북 승탑, 1963년 보물로 지정된 구례 연곡사 삼층석탑과 현각선사탑비, 동 승탑비, 소요대사탑 등 많은 문화재들이 있다. 고려 초기에 만든 도선국사(道詵國師)의 승탑으로 추정되는 동 승탑은 일제강점기 때 동경대학으로 옮겨가기 위하여 수개월 동안 연구했지만, 산길로는 운반이 불가능했으므로 뜻을 이루지 못했다고 한다. 


또, 통일신라 말기에 세워진 것으로 추정되는 삼층석탑은 현재 대웅전 남쪽의 길옆에 있는데, 옛날 이 탑이 위치한 곳까지 건물이 있었다고 보면 그때의 절 규모를 가히 짐작할 수 있다. 1967년 해체, 보수할 때에 하층기단부에서 높이 23.5㎝, 어깨너비 4.5㎝의 동조여래입상(銅造如來立像) 1구가 발견되었는데, 현재 동국대학교 박물관에 보관하고 있다. 또한, 소요대사탑의 문비(門扉)에는 ‘逍遙大師之塔(소요대사지탑)’이라고 기록되어 있어, 이 절이 임진왜란 후 소요대사에 의해 중건된 것임을 추정할 수 있다.


의병장 고광순 순절비한편, 연곡사에서 눈길을 끄는 것은 의병장 고광순 순절비이다. 을사조약으로 나라의 주권이 일본에게 넘어가자, 각지에서 항일 의병이 일어났는데, 호남지방에서도 의병활동이 활발했다. 그 대표적인 인물이 담양 출신 의병장 고광순(高光洵). 그는 1907년 8월 26일 지리산 연곡사에 근거지를 설치하고 적극적인 의병활동을 전개했으나, 야간기습을 받아 패전하고 순절했다. 이때 절도 불탔다. 이를 기리는 비석이 경내에 세워진 것이다.


구한말 의병장 고광순을 비롯하여 수백명의 의병이 연곡사에 진을 치고 의병활동을 했던 것을 기념하기 위해 순절비를 세웠다.


# 연곡사 동승탑



연곡사 동승탑은 주불전인 대적광전에서 북동쪽 10M 내외의 산기슭에 위치한다. 국보 제53호로 지정된 동승탑은 전체 높이 3.5M, 지대석 폭 1.75M 내외로 연곡사에 있는 3기의 승탑 중 가장 정교하다. 양식적으로는 팔각원장을 기본으로 방형의 지대석 위에 기단부와 탑신부, 상륜부를 쌓은 일반형이다. 지대석과 하대석은 한 개의 석재로, 하대석은 이단으로 팔각형이며, 하대석 윗 부분은 중대석 받침이다. 하대석에는 운룡을, 중대석 받침에는 면마다 형태가 다른 사좌상이 1좌씩 돋을새김 되어있다. 중대석 받침위면에 3단의 괴임대가 마련되어 중대석을 받쳤다. 중대석은 낮은 편으로 면마다 안상속에 무기를 든 팔부신중상이 돋을새김 돼있다. 상대석은 3단의 받침대 위에 놓여있고, 중대석 굄대와 대칭을 이룬다. 측면에는 홀 연꽃이 앞 뒤로 겹쳐진 모습의 연꽃이 위로 벌어진 채 돋을새김 되어있다. 연꽃은 상하 2열에 16판 씩,꽃잎 안을 다시 꽃씨로 장식했다. 윗면의 탑신 받침은 모서리마다 소반상 다리 같이 중간에 둥근마디가 있는 기둥을 세우고 그 안에 자세가 다른 가릉빈가상이 부조로 돋을새김 되어 있다. 탑신 받침 위면에는 낮은 3단의 괴임을 두고 그 위에 팔각기둥모양의 탑신석을 받쳤다.



탑신의 각면에는 문비사천왕상이 낮게 돋을새김 돼 있다. 옥개석은 목조건축의 지붕을 충실히 따르고 있는데, 이중의 연목과 기왓골 뿐만 아니라 처마 끝에 막새까지 나타내고 있고, 지붕아랫면에는 구름문양과 비천상이 돋을새김 돼 있고, 지붕마루끝 측면에는 풍탁을 걸어두었던 두 개의 구멍이 있으며, 그 윗부분에는 잡상을 얹었던 흔적이 남아있다. 상륜부는 앙화 위에 네 방향으로 날개를 편 채로 서있는 새를 조각하고 그 위에 다시 연꽃문양의 보륜을 얹었다. 통일신라 시대의 다른 승탑보다 기단부가 높고 세부적인 조각수법은 치밀하다. 연곡사에 현재 남아 있는 승탑 가운데에서 가장 이른 시기로 통일신라말의 양식적 특징을 잘 보여준다.

 

# 동승탑비 (보물 제 153호)



동승탑비는 동승탑 남서쪽에 위치하고 있으며, 전체 규모는 높이 1.9M, 지대석 1.56M(가로) 1.74M(세로)이다. 현재 비신은 없고귀부와 이수만 남아 있다. 귀부는 지대석과 한돌로 네다리를 사방으로 뻗고 있어 마치 납작하게 엎드린 모습을 연상시킨다. 오른쪽 앞발을 살짝 든 귀부의 정상에는 장방형의 비좌를 마련하고 있는데 비좌의 네 측면에는 구름무늬를 고부조로 장식했고, 그 윗면 주위로 복판의 연꽃무늬를 새겼다. 머리는 떨어져 나간 것을 다시 붙여 놓았다. 거북의 등문양은 앞쪽으로는 파상곡선으로 이뤄진 새 깃 모양의 조익형 무늬이고 뒤쪽으로는 육각의 갑문이 희미하게 남아 있다. 이수는 삼산형으로 고부조의 구름무늬가 조각되어 있고, 그 정상에 화염보주 형태의 조각이 새겨져 있다. 이수 앞면에는 탑액을 가로 32CM, 세로 38CM의 크기로 시설해 놓았으나 명문은 없다. 귀부는 적갈색이고 이수는 암갈색으로 돌의 재질도 다르며 화재에 의한 피열흔이 확인 된다.

 

# 북승탑 (국보 제 54호)



동승탑에서 150미터정도 북쪽에 위치하고 있으며, 전체 놓이 3.6M, 지대석 폭 1.75M 정도이다. 이 승탑은 동승탑과 같이 한 장의 석재로 된 네모 난 지대석 위에 기단부와 탑신부, 상륜부를 차례로 쌓은 일반형이다. 동승탑을 모방해 고려 초기에 건립됐다고 보여지며, 현각선사 승탑으로 추정된다. 이 북승탑의 하대석도 한 개의 석재로, 아래쪽은 구름문양을 중대석 받침에는 겹꽃 16엽의 연화문을 두른 팔각형 돌을 올려 놓았고 중대석 받침의 여덟 귀퉁이에는 귀꽃무늬를 돌출시켰다. 중대석과의 사이에는 3단의 굄단이 중대석을 받치고 있다.  중대석은 낮고 잘룩한에 각면의 안상 안에는 무엇인가가 조각되어 있다. 


상대석의 아랫면에는 3단의 받침을 설치해 중대석 굄 3단의 받침을 설치하여 중대석 굄 3단과 대칭을 이뤘다. 상대석 옆면에는 홀 연꽃으로 3번 겹쳐진 연꽃잎이 위로 벌려져 있고 꽃잎 안에는 꽃씨 무늬 장식을 했다. 윗면에는 높은 탑신 받침이 있는데 모서리마다 소반상 다리처러 둥근 마디가 있는 난간을 세우고 그 사이 안상 안에 가릉빈가를 1구씩 조각했다.  가릉빈가의 머리는 사람이고 몸은 새인데 8개면 모두 자세가 다르다. 



탑신은 팔각이며 각면은 문비2개, 2개씩 사천왕상으로 장식됐다. 넓은 옥개석은 목조건축의 양식을 따라 이중의 연목과 기왓골 막새를 새겼고 아랫면에는 비천을 조각했다. 지붕마루 끝 윗부분에는 동부도와 같이 지금은 깨져있으나 잡상 같은 것을 얹었던 흔적이 남아있다.


상륜부는 앙화 위에 네 방향으로 날개를 활짝편 채로 선 이름을 알 수 없는 새를 조각한 석재를 쌓고 그 위에 다시 연꽃문양의 보륜을 얹었다. 이 북승탑은 앞선 시기에 만들어진 동승탑을 모범으로 그 양식을 충실히 이으면서도 세부적으로는 중대석의 받침처럼

균형미를 추구한 것으로 보인다.

 

# 소요대사승탑 (보물 제 154호)



연곡사 서북쪽에 위치한 이 승탑은 높이 3.08M, 지대석 너비 0.7M로, 보물 제154호로 지정돼 있다. 이 승탑은 평면 팔각원당의 기본형으로 지대석은 팔각으로 잘 다듬었고, 윗면에는 얕은 턱이 하대석을 받치고 있다. 하대석은 팔각이며 상하로 구분된다. 하단 측면은 평면으로 장식이 없다. 상단은 둥글게 말아올라가는 구름무늬가 새겨져 있다. 상단 윗면에는 중앙에 턱이 있고 그 주위에는 홈이 파여 있다. 이홈은 뒤쪽과도 연결되어 배수시설로 보인다. 중대석은 납작한 팔각구형으로 상하에 홀 연꽃이 대칭으로 돋을새김 됐다. 상대석은 팔각이며 홀 연꽃 8엽이 위로 벌어지듯 조각됐고 아랫면에는 2단의 각지게 꺾 받침이 있다. 윗면에는 높은 둥그런 괴임이 있다. 탑신도 팔각으로 한 면에 문비를 모각하고 다른면에 높게 돋을새김한 신장상이 1구씩 배치되어 있다.


옥개석은 팔각으로 추녀끝은 얇고 넓은 편이다.옥개석 아랫면에는 높직한 받침을 중심으로 연목이 모각됐고 낙수면은 급경사를 이루었다. 각면의 팔각에는 팔조의 우동이 뚜렷하고 추녀 끝에 이르러 큼직한 귀꽃이 솟아있다. 상륜부는 완전하며 정상에는 팔엽의 앙련으로 된 앙화가 있고, 그 위에 납작한 구형이 복발이 있는데 횡대위에 꽃무늬가 조각됐다. 



복발위에 큼직한 보개와 보주가 차례로 놓여 있는데 보개에는 4방향으로 벼슬을 늘어뜨린 새모양이 조각 돼 있다. 이 승탑 탑신석 한 면에  “소요대사 지탑/순치육년경인” 이라는 두줄의 음각명문이 세로로 새겨져 있다.소요대사는 백양사에서 계를 받고 부휴대사에게서 경전을 배웠으며, 서산대사에게서 청전본원의 이치를 깨달았다고 한다.

소요대사는 순치 5년 (1649)에 입멸하였는데 그 다음 해에 이 승탑을 세웠다.


소요대사의 승탑은 현재 김제 금산사에 있으며, 지리산 연곡사를 비롯해 해남 대둔사, 연천 보개산 심원사에 있다고 전한다. 현재 소요대사 승탑은 김제 금산사와 장성 백양사 구례 연곡사에 남아있다.

 

# 3층 석탑 (보물 제 151호)



이 석탑은 기단이 3층으로 옥개석이 전형적인 방형탑으로 각층의기단이 여러개의 석재를 사용해 건립됐다. 하층기단은 지대석의 역할을 하고 있으며 위 아래에 하대 갑석과 하대 저석을 두고 그 사이에 낮은 하대 중석을 놓았다. 하대중석 좌우에는 우주가 새겨져 있고 중앙에는 탱주가 도드라지게 새겨져 있다. 하층 기단 갑석의 상면에는 중층 기단의 저석을 받치기 위한 낮은 단이 있다. 이들 하층 기단의 석재는 하대 면석이 8개, 하대 갑석이 6개의 석재로 이뤄졌다. 중층 기단의 전반적인 모습은 하층 기단과 유사하나 갑석 바깥쪽으로 완만한 경사를 보이고 중앙에는 각형과 호형의 몰딩이 있다. 중층기단의 면석은 6개, 중층기단 갑석은 3개의 석재로 결구됐다.


상층 기단 역시 하층, 중층 기단보다 높아진 모습이며, 상층 기단 면석은 좁아졌고 각면에 우주와 탱주가 표현됐다. 상층기단의 상대 갑석 아래에는 부연이 있고 상면은 비스듬하게 기울며 각지게 꺽인 2단의 탑신괴임을 두었다. 사층기단 면석은 4개 갑석은 1개의 석재를 사용했다. 



탑신부는 모든 층의 옥신에 우주가 표현됐고, 2층,3층의 옥신은 급격히 줄어 들었다.옥개는 한 개의 서재로 쌓았고 층급 받침은 모두 4단이다. 이 석탑은 1967년 보수를 위해 해체,복원 됐고, 해체과정중 상층 기단내 자연판 석상에서 높이 23.5CM 크기의 금동여래입상 1점이 발견돼 현재 동국대학교 박물관에 소장돼있다. 이 불상은 턱이 양간 들려진 모습이며 머리에 비해 어깨가 좁고 전체적으로 경직돼 있다.


이 금동불은 U자형으로 겹쳐지는 법의와 우수상,좌수하 형식의 수인, 상대 하대만 갖춘 대좌의 모습에서 통일신라 금동불 양식의 잔영을 발견할 수 있는데 경직된 상호, 자세, 의습으로 보아 고려초에 제작한 불상으로 추정된다.

 

# 현각선사탑비 (보물 제 152호)



현각선사 탑비는 조선총독부 박물관 소장 탁본에 의하면 경종 4년(979)에 건립됐다고 한다. 귀부는 지대석과 한 돌로 네다리를 사방으로 뻗쳐 납작 엎드린 형상이다. 동승탑비와 반대로 왼쪽 앞발을 살짝 들고 있다. 비신 받침에 구멍이 나 있어 배수를 위한 시설로 보인다. 조각 수법은 몸체에 비해 큰 머리나 비좌 사면에 안상과 귀꽃이 새겨져있다. 이수 앞면 중심에 현각선사탑비이라는 전액이 음각되어있다. 문헌에 의하면 학사 왕융이 지었고 주국 장신원이 썼다고 한다. 글씨는  2센치 정도의 해서로 구양순체를 바탕으로 하는 체이며 자형을 바르게 하여 고박한 글체를 나타내고 있다./사진-윤정숙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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