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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서원 115] 이황을 추모키 위해 창건한 의령 '덕곡서원'
  • 이승준 기자
  • 등록 2022-10-07 01:25: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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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서원 116] 허목을 배향하고 있는 의령 '미연서원'


[이승준 기자] 미연서원은 허목(許穆)을 모시기 위해 세운 서원이다. 1825년(순조 25)에 창건했다. 그 후 1868년(고종 5)에 훼철됐다. 1901년에 이의정(二宜亭)과 영당(影堂)을 지었고, 1975년에 서원을 복원했다. 건립 당시 정당(正堂)의 기와는 창녕에서 가지고 왔는데 창녕까지는 창녕사람이, 그리고 의령까지는 의령군민이 부역으로 날랐다고 한다. 이곳의 장판각에는 미수기언이라는 책판이 있다. 이 책판은 경상남도 유형문화재로 지정됐다. 있다


허목의 본관은 양천(陽川). 자는 문보(文父)·화보(和甫), 호는 미수(眉叟).대령노인(臺嶺老人). 증조부는 이조판서 허자(許磁)[1496~1551]이고, 할아버지는 강호처사 허강(許橿)[1520~1592]이다. 아버지는 포천현감 허교(許喬)[1567~1632]이며, 어머니는 나주임씨(羅州林氏)로 백호(白湖) 임제(林悌)[1549~1587]의 딸이다.



허목(許穆)은 1626년(인조 4) 유생으로서 동학의 재임을 맡고 있을 때, 생부인 정원대원군(定遠大院君)을 왕으로 추숭하려는 인조의 뜻을 지지한 박지계(朴知誡)의 이름을 유생 명부에서 지우는 벌을 가했다가 과거 응시를 금지당하는 처벌을 받았다. 그 일을 계기로 과거와 벼슬에 뜻을 접고 광주 자봉산(紫峯山)에 들어가 학문을 닦았다. 1641년 다시 사천으로 옮겼고, 그뒤 창원.칠원(漆原) 등지로 전전하다가 1646년 마침내 경기도 연천의 고향으로 돌아왔다. 허목(許穆)이 창원 달천계곡에 기거하면서 계곡암반에 ‘달천동(達川洞)’이라 각자한데서 달천계곡이라는 지명이 유래됐다. 또한 허목(許穆)이 낙향해 지낼 때 손수 거북 모양의 돌을 깎아 넣어 우물을 만들었다고 전하는 달천구천(達川龜泉)이 아직도 창원에 남아 있다. 1650년(효종 1) 이후 정릉참봉.내시교관.조지서별좌.공조좌랑.용궁현감 등에 임명됐으나 부임하지 않거나 곧 사직했다.



1657년 공조정랑 겸 사복시주부를 거쳐 1659년에 장령에 임명되자 상소를 올려 송시열(宋時烈)·송준길(宋浚吉) 등의 정책에 반대하는 등 중앙 정부에서의 정치활동을 시작했다. 1659년 현종이 즉위한 후 경연에 참여했고, 이듬해 다시 장령이 됐다. 이때 인조의 계비인 조대비(趙大妃)의 복상 기간을, 서인 송시열 등이 주도해 1년으로 한 것은 잘못이므로 3년으로 바로잡아야 한다고 주장함으로써 예송(禮訟) 논쟁이 시작됐다. 그러나 허목의 의견은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이 일로 허목은 삼척부사로 좌천됐다. 그 후 허목은 삼척에서 향약을 실시하고 읍지를 편찬했다.



1674년 효종의 비가 죽었을 때 조대비의 복제를 송시열 등이 주장한 9개월복 대신 기년복으로 해야 한다는 주장이 승리하고 남인이 집권함에 따라 대사헌에 임명됐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1675년(숙종 1) 산림직인 성균관 좨주를 비롯해 이조참판.우참찬.이조판서 등을 거치고 우의정에 임명됨으로써 과거를 거치지 않고 진출한 산림 중에서 정승까지 승진한 흔하지 않은 인물이 됐다.



이때 왕통을 문란하게 했다는 송시열의 죄를 엄하게 다스릴 것을 주장해, 온건론자인 허적(許積)이 이끄는 탁남(濁南)에 대비되는 청남(淸南)의 영수가 됐었다. 1676년 사직하고 특명으로 기로소에 들어간 후로는 허적의 전횡을 비판하는 격렬한 상소를 올렸을 뿐 관직에는 나아가지 않았다. 1680년 경신환국(庚申換局)으로 남인이 실각할 때 관작을 삭탈당하고 학문과 후진양성에 몰두했다.




허목은 퇴계 이황에서 한강(寒岡) 정구(鄭逑)[1543~1620]와 여헌(旅軒) 장현광(張顯光)[1554~1637]으로 이어지는 학통을 이어받아 이익에게 연결시킴으로써 기호 남인의 선구이자 남인 실학파의 기반이 됐다. 사서나 주희의 저술보다는 오경 속에 담겨 있는 원시 유학의 세계에 깊은 관심을 보였다. 중국 진한(秦漢) 이전의 문물에 대한 탐구는 문자에도 적용돼 특히 전서(篆書)에 독보적 경지를 이뤘다.



저서로 '동사(東事)' '경설(經說)' '기언(記言)' '경례유찬(經禮類纂)' '방국왕조례(邦國王朝禮)' 등이 있다.


묘소는 경기도 연천군 왕징면 강서리에 있다. 경기도 연천의 미강서원(湄江書院), 전라남도 나주의 미천서원(眉泉書院), 경상남도 창원의 회원서원(檜原書院)에 봉향됐고, 시호는 문정(文正)이다./사진-윤정숙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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