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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서원 63] 장현광을 추모하고 있는 구미 '동락서원'
  • 이승준 기자
  • 등록 2022-08-23 19:01:07
  • 수정 2023-06-26 05:1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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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준 기자] 경상북도 구미시에 있는 조선후기 장현광을 추모하기 위해 창건한 서원이다. 

            

1655년(효종 6)에 지방유림의 공의로 장현광(張顯光)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키 위해 창건해 영정과 위패를 봉안했다. 1676년(숙종 2)에 ‘동락’이라고 사액돼 사액서원으로 승격됐고, 선현배향과 지방교육의 일익을 담당해 오다가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1871년(고종 8)에 훼철됐다. 


1904년(광무 8) 영당을 건립했다. 그 뒤 지방유림에 의해 복원되면서 장경우(張慶遇)를 추가로 배향했다. 



장현광(張顯光.1553.명종 9∼1637.인조 15)은 조선 중기의 학자. 본관 인동(仁同), 자 덕회(德晦), 호 여헌(旅軒), 시호 문강(文康). 부윤 안세(安世)의 후손. 20세 전에 학문에 통달하고, 23세에 재사(才士)로 추천됐, 재상 유성룡(柳成龍)의 천거로 1595년(선조 28) 보은현감(報恩縣監)을 지냈다.


광해군 때 군수.사헌.지평 등에 임명됐으나, 모두 사퇴, 인조(仁祖)가 즉위하매, 지평(持平).장령(掌令).집의(執義).공조참의(工曹參議).이조참판(吏曹參判).대사헌(大司憲) 등에 임명됐으나, 모두 사퇴했다.


1632년(인조 10) 공조판서도 병을 이유로 사퇴했고, 다음해 의정부(議政府) 우참찬(右參贊), 1636년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 등에 임명됐으나, 모두 사퇴했고, 1637년 청나라에 항복했다는 소식을 듣고 동해안의 입암산(立嵒山)에 들어가 있다가 죽으니, 1658년(효종 9)영의정이 추증되고, 사호가 내렸다. 일찍부터 벼슬에 뜻을 두지 않고, 성리학(性理學) 연구에만 힘썼고, 의학(醫學)에도 밝았다. 

 


공은 조용히 학문에만 정진하고 면학요회, 역봉총설, 급구설, 우주설, 태극설, 도서발휘 등을 저술하였다.


영천의 입암서원(立巖書院), 선산(善山)의 금오서원(金烏書院), 의성 빙계서원(氷溪書院), 영천 임고서원, 성주 천곡서원(川谷書院), 인동(仁東) 동락서원(東洛書院), 청송 송학서원(松鶴書院) 등에 제향됐고, 묘는 구미시 오태동(吳太洞) 금오산(金烏山) 밑 오산(吳山)에 있다.


모원당은 경상북도 구미시(龜尾市) 인의동(仁義洞)에 있는 장현광의 고택(古宅)으로, 규모는 2칸 방이 하나, 2칸 마루가 하나, 마루 옆에 좁은 협실이 있는데 아마도 서책을 보관했을 것으로 보인다. 선생은 초라한 집이나마 여기서 안정된 마음으로 제자들에게 강론을 했을 것이다.



언제 지은 지는 정확히 알 수 없고 다만 1889년에 개축한 기록이 있다. 새 재목으로 짓지 않은 듯하고 100년이 지난 1983년에 집을 완전히 헐고 새 재목으로 지은 것이 현재의 건물이다.


경내에는 청천당과 묘우가 있다. 2000년 9월 5일에 경상북도 문화재 자료 제390호로 지정됐다. 당 앞에 있는 해묵은 회화나무는 보호수로 지정돼 시에서 관리하고 있다.


경덕묘(景德廟)는 경북 구미시 임수동 동락서원에 있는 조선 사당으로, 숙종 2년(1676) 동락서원(東洛書院)이라 사액을 받았으나 고종 8년(1871) 훼철된 후 1932년 중건돼 여헌 장현광(旅軒 張顯光)의 위패와 경정을 봉안 향사하다가 1933년 만해당(晩海堂) 장경우(張慶遇)를 종향, 오늘에 이르고 있고 향사는 매년 봄, 가을로 봉행하고 있다.



동락서원(東洛書院)은 효종 6년(1655)에 장현광의 제자들에 의해 경북 구미시 임수동 부지암에 세워졌던 서원이 숙종 2년(1676) 사액(賜額)을 받아 동락서원이 됐다. 고종 8년(1871)에는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철거됐가 1971년 서원 건물 전체를 다시 세웠다.


경내의 건물로는 3칸의 경덕사, 6칸의 중정당, 각 3칸의 동재와 서재, 신문, 3칸의 문루, 4칸의 고사 등이 있다. 이 가운데 강당인 중정당은 중앙에 마루를 두고 양쪽에 방을 두었는데 마루는 회합장소로 쓰고 있다. 이곳에서는 해마다 음력 2월과 8월에 제사를 지내고 있다. 경내에는 신도비가 있다.


동락서원은 여헌(旅軒) 장현광(張顯光))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키 위해 1655년(효종 6)에 제자들이 건립한 건물로, 애초에는 부지암정사(不知巖精舍)였다. 1610년 만회당공이 중심이 돼 동문제생이 협력해 부지암정사를 창건하고 선생의 강도지소로 삼은 것이다.



이곳은 여헌 연보에 의하면 서진사의 옛 터라 했고 만회당 연보에 의하면 만회당 외가의 정기라 했다. 어쨌거나 모든 계획과 주선은 만회당이 한 것으로 짐작된다. 이 때 선생의 연세가 57세이었으니까 오랜 햇수 동안 여기서 강학하시다 1637년에 선생이 서거후 17년 뒤인 1654년에 부지암정사에다 묘우를 지어 서원 체제를 갖췄다.


1655년 위판을 봉안하고 부지암서원이라 개칭했다. 1676년(숙종 2) 동락서원이라 사액됐다. 동락이란 동국(東國)의 이락(理洛) 이란 뜻이다. 이락은 정주학을 상징하는 말이라고도 할 수 있다. 정명도와 정이천은 낙양 사람이고 이수와 낙수 사이에서 강학을 했다고 한다.


1871년(고종 8) 조정의 명령에 의해서 서원이 훼철됐다. 1932년 국내 사론에 의해서 묘우를 건립해위판과 영정을 봉안했다. 1933년 만회당공을 종향했다. 1970년 7월에 국비 보조와 사림 부담으로 서원 복원에 착수해 이듬해 3월 준공을 보게 되어 여헌과 만회당 두 분의 위판을 봉안했다.



묘우는 경덕묘, 강당은 중정당, 동재는 윤회재, 서재는 근집재, 외삼문은 준도문이다. 준도문 바로 앞에 400여 년 묵은 은행나무가 있는데 여헌 선생께서 손수 심은 나무로 알려져 있고 보호수로 지정됐다. 


강당 서쪽 처마와 연접해 신도비가 있다. 비문은 미수 허목 선생의 찬이고 글씨는 옥천 조선생이 썼다. 1985년 8월 5일에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21호로 지정했다. 향사는 매년 음력 2월 중정 8월 말정에 올리고 있다.


부지암정사는 만회당이 중심이 돼 선생의 강학을 목적으로 창건했다가 선생이 서거하시자 서원으로 바뀌었고 지금의 부지암정사는 당초의 뜻을 살리기 위해 서원 복원 후 잇달아 건축했다. 중창 기문은 후손 병규공이 썼다.



400년 전 창건 당시의 기문은 여헌 선생이 썼다. 선생은 그 기문에서 부지(不知)의 뜻을 두 가지로 말씀하셨다. 첫째 나에게 있어서 부지(不知)는 내가 알 필요가 없는 것을 모르는 것은 부지의 소득이고 내가 꼭 알아야 할 것을 모르는 것은 부지의 실책이다. 둘째는 남에게 있어서 부지는, 내가 남이 알아줄 만한 실제 덕이 없어서 알아주지 않는 것은 괴이할 것이 없고 나에게 남이 알아줄 만한 실제의 덕이 있는데 알아주지 않는 것은 그 사람의 탓이니 개의할 것이 없다고 했다.


장현광 신도비(張顯光 神道碑)는 경상북도 구미시(龜尾市) 임수동(臨洙洞) 동락서원(東洛書院) 내에 위치하고 있다. 조선조 인조 때 우참찬을 역임하고 영의정으로 추증된 여헌 장현광의 신도비이고, 영조 12년(1736)에 세워졌다./사진출쳐-구미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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