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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서원 60] 길재 선생의 충절.학행 추모 구미 ‘금오서원’
  • 이승준 기자
  • 등록 2022-08-22 18:06:31
  • 수정 2022-08-22 18:1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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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준 기자] 금오서원은 야은 길재선생의 충절과 학행을 추모키 위해 1567년 사림에 의해 서원 건립이 청원돼 1572년 봄에 야은선생이 노년을 보냈던 금오산에 창건됐다. 1575년에 사액을 받았다. 


또 임진왜란 때 선산지역 의병장의 지휘소로 사용되다 모두 불에 타고 1602년에 현재의 선산읍 원리 남산자락으로 이건해 1609년 다시 사액 받았다. 이때 김종직, 정붕, 박영 선생의 위패를 추가로 모셨고 1642년(인조20)에 마지막으로 장현광선생의 위패를 추가로 모시면서 현재와 같은 서원의 모습을 갖추게 됐다. 이들 배향인물은 조선시대 성리학을 이끌던 대유학자로 두 번의 사액으로 금오서원이 가진 위상을 보여준다.




길재의 본관은 해평(海平). 자는 재보(再父), 호는 야은(冶隱)·=.금오산인(金烏山人). 아버지는 지금주사(知錦州事)길원진(吉元進)이고, 어머니는 판도판서(版圖判書)에 추증된 김희적(金希迪)의 딸이다. 이색.정몽주와 함께 고려의 삼은(三隱)으로 불린다.


1363년(공민왕 12) 냉산(冷山) 도리사(桃李寺)에서 처음 글을 배웠고, 1370년 상산사록(商山司錄)박분(朴賁)에게서 ‘논어’와 ‘맹자’ 등을 배우면서 성리학을 접했다. 아버지를 뵈려고 개경에 이르러 이색(李穡).정몽주(鄭夢周).권근(權近) 등 여러 선생의 문하에서 지내며 비로소 학문의 지극한 이론을 듣게 됐다.



1374년 국자감에 들어가 생원시에 합격하고, 1383년(우왕 9) 사마감시(司馬監試)에 합격했다. 1386년 진사시에 제6위로 급제해 같은 해 가을 청주목사록(淸州牧司錄)에 임명됐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이때 이방원(李芳遠)과 한 마을에 살면서 서로 오가면서 함께 학문을 강론하고 연마했다.


1387년 성균학정(成均學正)이 되고, 이듬 해 순유박사(諄諭博士)를 거쳐 성균박사(成均博士)로 승진됐다. 당시 공직에 있을 때에는 태학(太學)의 생도들이, 집에서는 양반자제들이 모두 그에게 모여들어 배우기를 청했다. 1389년(창왕 1) 문하주서(門下注書)가 됐으나, 나라가 장차 망할 것을 알고서 이듬 해 봄 늙은 어머니를 모셔야 한다는 핑계로 벼슬을 버리고 고향인 선산으로 돌아왔다.




1391년(공양왕 3) 계림부(鷄林府)와 안변(安邊) 등의 교수(敎授)로 임명됐으나 모두 부임하지 않았고, 우왕의 부고를 듣고 채과(菜果)와 혜장(醯醬) 따위를 먹지 않고 3년상을 행했다. 1400년(정종 2) 가을 세자 방원이 그를 불러 봉상박사(奉常博士)에 임명했으나 글을 올려 두 왕을 섬기지 않는다는 뜻을 펴니, 그 절의를 갸륵하게 여겨 예를 다해 대접해 보내주고 세금과 부역을 면제해 줬다.


1403년(태종 3) 군사 이양(李楊)이 그가 사는 곳이 외지고 농토가 척박해 살기에 마땅하지 못하다 해 오동동의 전원(田園)으로 옮겨 풍부한 생활을 누리도록 했다. 그러나 그는 소용에 필요한 만큼만 남겨두고 나머지는 모두 돌려보냈다.



그를 흠모하는 학자들이 사방에서 모여들어 항상 그들과 경전을 토론하고 성리학을 강해(講解)했고, 오직 도학(道學)을 밝히고 이단(異端)을 물리치는 것으로 일을 삼으면서 후학의 교육에만 힘썼다. 그의 문하에서는 김숙자(金叔滋) 등 많은 학자가 배출돼, 김종직(金宗直).김굉필(金宏弼).정여창(鄭汝昌).조광조(趙光祖)로 그 학통이 이어졌다.


저서로는 ‘야은집(冶隱集)’과 ‘야은속집(冶隱續集)’이 있고, 그 밖에 그의 언행록인 ‘야은언행습유록(冶隱言行拾遺錄)’이 전해지고 있다.


금산의 성곡서원(星谷書院), 선산의 금오서원(金烏書院), 인동(仁同)의 오산서원(吳山書院) 등에 제향됐고, 시호는 충절(忠節)이다.


금오서원 정학당은 학문을 강론하는 장소이고, 건축학적으로 창문틀 가운데에 설주가 있는 영쌍창 등 오래된 고식의 수법이 잘 남아있고 지붕의 구조와 부재의 형식에서 절제미와 조형미가 돋보인다.



정면의 정칸에 비해 퇴칸을 좀 더 크게 해 일반적인 건물과 반대로 했는데 이는 미학적 관점을 크게 고려한 것으로 보고 서원의 보편적 가치와 지역의 고유한 특징을 잘 갖추고 있고 임진왜란 이후 건립된 조선 후기 강당 건축의 모범이 되므로 보물로서 충분한 지정 가치가 있다.


상현묘는 성현을 배향하는 공간으로 지붕의 세부구조에서 17세기의 시대적 특징을 잘 간직하고 있고, 앞면에 퇴칸을 두지 않은 것으로 특히 출목익공(出目翼工)의 지붕구조는 종묘(사적 제125호)의 정전보다 6년이나 앞선 사례로 매우 중요한 학술적 가치를 가지고 있다.


이와 같이 금오서원은 구미지역의 성리학을 상징하는 대표 문화유적으로서 특히 1871년(고종8) 서원철폐령에도 훼철되지 않은 전국 47개소 사액서원 중 하나로 조선시대 서원의 변천과정을 살펴볼 수 있는 뛰어난 역사적 문화유산이다./사진출처-구미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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