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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서원 59 문경시 편] 인천채씨 4현 제향한 ‘웅연서원’ 외
  • 이승준 기자
  • 등록 2022-08-21 19:29:03
  • 수정 2022-12-26 10:55: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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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준 기자] 코로나19로 인해 잠정적으로 여행을 중단됐던 본지가 다시 한국의 서원을 준비했다. 현재까지 확인한 바 전국에 서원은 대략 620여 개의 서원들이 흩어져 있는 것으로 확인됐다. 이러한 서원들을 간략하게나마 살펴보면서 한국의 서원들에 대한 많은 관심을 갖기를 기대해 본다. 이번 호에서도 경북 청도군에 소재하고 있는 서원을 살펴본다. <편집자주>


# 웅연서원 


웅연서원은 경상북도 문경시 산북면에 있었던 조선후기 인천채씨 4현을 제향하기 위해 창건한 서원.



1795년(정조 19)에 인천채씨 4현을 모신 웅연세덕사로 창건돼 채귀하(蔡貴河), 채수(蔡壽, 1449∼1515), 채소권(蔡紹權, 1480∼1548), 채득기(蔡得沂)를 제향하던 서원이다. 1798년(정조 22)에 서원으로 승격됐다가 1868년(고종 5)에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으로 훼철됐다. 현재는 유허비만 남아있다.



채귀하는 자가 청일(淸一), 호는 다의당(多義堂)이다. 고려가 망하자 불사이군의 충절로 두문동에 들어간 두문동 72현 중 한 사람이다. 조선 초에 태조가 호조판서로 여러 번 불렀으나 끝내 나아가지 않았다. 


저서로 ‘다의당선생실기(多義堂先生實記)’가 있다. 채수는 자가 기지(耆之), 호는 나재(懶齋)이다. 세조 때 문과에 장원급제해 관찰사, 한성좌윤, 대사성 등을 역임했다. 중종반정에 가담해 분의정국공신(奮義靖國功臣) 4등에 녹훈되고 인천군(仁川君)에 봉군됐다. 시호는 양정(襄靖)이고 저서로 ‘나재집’ 2권이 있다.



채소권은 채소의 아들로, 자는 효중(孝仲), 호는 졸옹(拙翁)이다. 1506년 별시문과에 급제해 청주목사, 경기도관찰사, 형조판서 등을 역임했다. 조정에 있을 때는 이현보(李賢輔)와 주세붕(周世鵬), 귀향해서는 황준량(黃俊良)과 친교했다. 채득기는 자가 영이(詠而), 호는 우담(雩潭), 학정(鶴汀)으로 청음 김상헌의 문인이다. 대명처사로 칭해졌고 사후 집의에 증직됐다. 삼강록, 존주록, 배신록 등에 기재돼 있다.


1798년 세덕사가 웅연서원으로 승격됐을 때 ‘웅연서원상량문(熊淵書院上梁文)’과 ‘웅연서원봉안문(尙州熊淵書院奉安文)’ 및 상향축문은 정종로(鄭宗魯)가 지었다.


# 노봉서원 



노봉서원은 권산해(權山海:1403~1456)의 충절을 기리고 후진을 양성키 위해 건립한 서원으로, 1985년 8월 5일 경상북도 문화재자료로 지정됐다.


1794년(정조 18)에 처음 건립됐고, 1866년(고종 3) 흥선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으로 철훼됐다. 이후 1921년 안동시의 도산서원, 병산서원(倂山書院), 역동서원(易東書院), 문경시의 호계서원(虎溪書院)과 도내의 유림들이 중심이 돼 재건했다.



노봉서원이란 이름은 단종(端宗:노산군)을 숭상하는 선비들이 건립한 것 같다고 해 붙인 것이다. 보호구역은 726평이며, 현재 건물은 현판 ‘몽양재’가 걸린 강당(15평), 숭의사(7평), 존사소(5평), 정문(1평), 신도문(4평) 등 5개 동으로 총 32평이고, 봄과 가을에 안동권씨 문중에서 향사를 지낸다. 1949년 10월 강당을 빌어 신당초등학교가 개교했으나 곧 근처로 이전했다.



권산해는 1403(태종 3)∼1456(세조 2). 조선 전기의 의인(義人)으로,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덕보(德甫), 호는 죽림(竹林). 시호는 충민(忠愍)이다.


1440년(세종 22)에 천거돼 녹사.주부가 됐으나 모두 나가지 않았다. 1454년(단종 2)에 처음으로 종부시첨정(宗簿寺僉正)이 됐다.


1455년에 수양대군이 어린 조카인 단종의 왕위를 빼앗자 울분을 못이겨 조정에 나가지 않았다. 세조가 조정에 나올 것을 종용했으나 병을 치료한다는 핑계로 나가지 않았다. 이듬해 성삼문(成三問).박팽년(朴彭年) 등이 단종의 복위를 도모하다가 참형됐다는 소식을 듣고, 그 사건에 가담하지 못한 것을 스스로 한탄하다 끝내 자살하고 말았다.



관직을 박탈당했고 자손들도 백 년 동안 벼슬길이 막혔다.


1789년(정조 13) 신원복관((伸寃復官: 억울함이 풀리고 관작도 복관됨)되고 1791년(정조 15) 이조참판, 1885년(고종 22) 이조판서에 추증됐다. 예천 노봉서원(魯峯書院)에서 봉향하고 경주 운곡서원(雲谷書院)에 배향됐다.


# 의산서원


의산서원은 경상북도 문경시 산양면에 있는 조선후기 엄흥도를 추모하기 위해 창건한 서원이다. 


영월에 안치돼있던 단종이 시해되자 시신을 수습해 장사 지낸 영월(寧越)의 호장(戶長) 엄흥도(嚴興道)를 제향키 위해 문경에 건립된 서원이다. 1750년(영조 26)에 먼저 별묘(別廟)를 세우고, 1756년(영조 32)에는 상절사(尙節祠)를 건립했다. 1833년(순조 33) 서원으로 승격해 의산서원(義山書院)이라 했다. 



1864년(고종 1)에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으로 훼철된 뒤 1924년 서원터에 단소(壇所)를 설치했다. 1900년 무렵에는 강당인 상의재(尙義齋)를 복원하고, 1990년에는 사당을 복원해 ‘충절사(忠節祠)’라 했다. 충절사와 상의재는 1995년 1월 14일에 경상북도 문화재자료로 지정됐다. 매년 음력 3월 중정일(中丁日)에 향사를 봉행하고 있다.



엄흥도는 단종이 세조에 의해 노산군(魯山君)으로 강봉돼 영월에 안치됐다가 시해되자 후환을 두려워하지 않고 시신을 수습한 인물이다. 숙종 때 공조참의에 증직(贈職)됐고, 영조 때 정문(旌門)을 내렸다. 뒤에 공조판서에 증직됐고, 사육신과 함께 영월의 창절사(彰節祠)에 배향됐다. 김홍락(金鴻洛)이 신도비명(神道碑銘)을 지었고, 시호는 충의(忠毅)이다.



서원에는 사우인 충절사, 강당인 상의재(尙義齋) 및 단소가 하나의 일곽을 이루고 있고 그 서쪽에 고직사가 배치돼 있다. 충절사는 전퇴칸을 두고 3칸을 통칸으로 해 위패가 배설되는 재사건물로 어칸을 퇴칸보다 조금 넓게 잡았다. 상의재는 퇴칸을 둔 전형적인 중당협실형(中堂挾室形) 평면이고 방과 마루와는 사분합들문을 달았다.


양식은 5량 구조에 제형판대공을 세워 팔작지붕을 만들었다. 현 단소 자리에는 과거 사당이 있었으나 훼철된 후 사당을 중건하지 못하고 설단(設壇)만 했고 강당 전면 좌우에 동.서재가 있었다고 한다.



의산서원이 낙성된 뒤 엄흥도의 후손 엄주호(嚴柱鎬)와 엄복영(嚴福永)이 고유문 작성을 의뢰하면서 보낸 간찰이 현재 한국국학진흥원에 소장돼 있다. 1928년에는 의산서원에서 엄흥도의 행적과 충절을 기록한 2권 1책의 목활자본 ‘엄선생정충록(嚴先生旌忠錄)’을 간행했다. 한국학중앙연구원에 소장돼 있다.


# 한천서원


한천서원은 경상북도 문경시 농암면 농암리에 있는 서원으로 안귀손, 신숙빈, 성만징을 배향하고 있다.


1697년(숙종 23)에 명현을 제사하고 후학을 양성키위해 건립했다. 사직(司直) 안귀손(安貴孫)과 처사(處士) 신숙빈(申叔彬)을 제향했고 1787년(정조 11)에 추담 성만징(秋潭 成晩徵)을 추배했다. 1868년(고종 5)에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됐으나 후에 다시 짓고 매년 3월 중정(中丁, 음력으로 그달의 중순에 드는 정일(丁日))에 제사를 지내고 있다. 경상북도 문경시 농암면 농암리에 있다.


안귀손(安貴孫)의 본관은 순흥(順興)이고 문성공(文成公) 유(裕)의 현손으로 연산군 때 사직(司直)으로 있다가 무오사화에 선비들이 억울한 죽음을 당하는 것을 보고 가은으로 낙향했다.


신숙빈(申叔彬)은 문희공(文僖公) 개(槩)의 후손으로 거창현감을 지내다가 빙부(聘父:장인)인 안귀손과 함께 가은 소양에 복거했다.


성만징(成晩徵)은 본관은 창녕(昌寧)이고 호는 추담(秋潭)이다. 왕자사부(王子師傅)에 제수됐으나 나가지 않았다./사진출쳐-문화재청, 문경시<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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