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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서원 57 문경시 편] 한음 이덕형을 배향한 문경 ‘근암서원’
  • 이승준 기자
  • 등록 2022-08-20 20:28:35
  • 수정 2022-12-26 10:53: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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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준 기자] 근암서원은 경상북도 문경시 산북면에 있는 조선후기 홍언충과 이덕형을 추모키 위해 창건한 서원이다. 


1665년(현종 6)에 지방유림의 공의로 홍언충(洪彦忠)과 이덕형(李德馨)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창건하고 위패를 모셨다. 


1693년에 김홍민(金弘敏)과 홍여하(洪汝河)를 추가 배향했고, 1786년에 이구(李榘).이만부(李萬敷).권상일(權相一)을 추가로 배향했다.



이덕형의 본관은 광주(廣州). 자 명보(明甫). 호 한음(漢陰).쌍송(雙松).포옹산인(抱雍散人). 시호 문익(文翼). 1561년 출생했고 부친은 지중추부사를 역임한 이민성(李民聖)이다. 당시 대사간이자 동인에 속한 이산해(李山海)의 딸과 혼인해 그의 사위가 됐다. 이때 토정비결로 유명한 이지함(이산해의 작은아버지)이 이덕형의 인물됨을 알아보고 사윗감으로 추천했다고 전해진다. 이덕형의 부인 한산이씨는 임진왜란 때 왜적을 피해 절벽에서 뛰어내려 자결했다.


1580년(선조 13) 별시문과에 을과로 급제해 승문원에 보직되고 대제학 이이(李珥)에게 발탁돼  정자(正字)를 거쳐 사가독서(賜暇讀書)했다. 이듬해 박사(博士)가 되고 수찬.교리 등을 역임했다. 1591년 예조참판에 오르고 겨우 31세에 대제학을 겸임했다. 당시 이덕형의 학문과 인품을 잘 보여주는 사례이고 조선역사에서 가장 젊은 나이에 대제학에 올랐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중추부동지사(中樞府同知事)로서 대동강까지 파죽지세로 공격해온 왜군의 사신 겐소[玄蘇]와 홀로 배를 타고나가 화의를 교섭했으나 실패했다. 왕을 정주(定州)까지 호종했고 청원사(請援使)가 돼 명나라로 가서 원병을 요청해 성공했다. 


귀국 후 한성부판윤이 되고, 이여송(李如松)의 접반관으로 활약했다. 1593년 선조는 이덕형의 공을 인정해 병조판서에 임명했고 이듬해에는 이조판서가 되고 조선의 군사편제를 새롭게 만든 훈련도감(訓鍊都監) 당상에 임명했다.




1598년 우의정에 승진했고 이어 좌의정에 올랐다. 1601년 경상.전라.충청.강원도의 4도 도체찰사가 돼 전쟁 후의 민심 수습과 군대 정비에 노력하고 이듬해 영의정에 올랐다. 잠시 한직에 있다가 1608년 광해군의 즉위와 함께 영의정에 복직했다. 명나라에서 광해군(光海君)을 적통을 이어받은 왕으로 인정하지 않자 진주사(陳奏使)가 돼 명나라를 다녀왔다. 


1613년(광해군 5) 영창대군(永昌大君)의 처형과 인목대비(仁穆大妃) 폐모론을 반대하다가 북인(대북파)와 대립했고 결국 모든 관직이 삭직되고 낙향해 경기도 양근(楊根)으로 물러났다가 경기도 광주 사저에 머물다 병을 얻어 1613년 사망했다.


이덕형은 남북인(南北人)의 중간 노선을 지키다가 뒤에 남인에 가담했으나 당색이 강하지 않았다. 장인 이산해는 대북 강경파로 당색이 달랐고 장인이 영수로 있는 대북파에 의해 목숨을 잃을 위기에 처하게 됐으나 광해군의 총애로 위기를 넘겼다. 절친한 사이로 잘 알려진 이항복(李恒福)과는 기발한 장난과 우정이 얽힌 많은 일화를 남겼고 1613년 사망했을 때 이항복이 가장 슬퍼하면서 이덕형을 직접 염을 했다고 전해진다. 인조 때 복관되고, 포천의 용연서원(龍淵書院)에 제향됐다. 문집 ‘한음문고(漢陰文稿)’가 있다.



선현배향과 지방교육의 일익을 담당해오던 중,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 따라 1868년(고종 5)에 훼철됐다가, 1982년 9월 유림에 의해 복원돼 지금에 이르고 있다.


경내의 건물로는 3칸의 묘우(廟宇), 4칸의 강당, 신문(神門), 4칸의 고자처(庫子處) 등이 있다. 사우의 중앙에는 홍언충과 이덕형의 위패가 봉안돼 있고, 양쪽에는 김홍민.홍여하.이구.이만부.권상일의 위패가 각각 봉안돼 있다.


강당은 중앙의 마루와 양쪽 협실로 돼 있고, 원내의 여러 행사와 유림의 회합 및 학문의 토론장소로 사용된다. 고자처는 항례 때 제수를 마련해 두는 곳이고, 평상시에는 고자들이 기거하는 곳이다.


매년 3월 상정(上丁)에 향사를 지내고 있고, 제품(祭品)은 4변(邊) 4두(豆)이다. 유물로는 ‘청대집(淸臺集)’ 외에 약간이 보관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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