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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서원 55 청도군 편] 청도여행 고택 '선암서원' 외
  • 이승준 기자
  • 등록 2022-08-19 16:40:29
  • 수정 2022-12-26 10:5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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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준 기자] 코로나19로 인해 잠정적으로 여행을 중단됐던 본지가 다시 한국의 서원을 준비했다. 현재까지 확인한 바 전국에 서원은 대략 620여 개의 서원들이 흩어져 있는 것으로 확인됐다. 이러한 서원들을 간략하게나마 살펴보면서 한국의 서원들에 대한 많은 관심을 갖기를 기대해 본다. 이번 호에서도 경북 청도군에 소재하고 있는 서원을 살펴본다. <편집자주>

 

# 선암서원[仙巖書院]


선암서원은 경상북도 청도군 금천면 신지리에 있는 서원으로, 삼족당(三足堂) 김대유(金大有)(1479∼1552)와 소요당(逍遙堂) 박하담(朴河淡)(1506∼1543)을 향사키 위해 건립했다. 



경상북도 청도군 금천면 신지리 335에 있다. 금천면사무소에서 신지리 방향으로 난 지방도 919번을 따라 오다 신지 1리 새마을 회관에서 약 100m 정도 직진한 후 좌회전한다. 이 길을 따라 다시 약 300m 정도 이동하면 선암서원이 있다.


삼족당 김대유와 소요당 박하담을 향사키 위해 건립한 이 서원은, 초창은 1568년 (선조 1)으로, 매전면에 있는 운수정에 두 사람의 위패를 봉안하고 향사해 향현사라 했다. 이후 1577년(선조 10)에 청도 군수 황응규의 주선으로 사우와 위패를 현재의 위치로 옮기고 선암서원이라 개칭했으나, 1868년 흥선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에 의해 훼철됐다. 지금의 건물은 1878년(고종 15)에 박하담의 후손들이 다시 중창해 선암 서당으로 고쳐 오늘에 이르고 있다.


김대유는 조선 전기 청도 출신의 문신으로, 무오사화로 삼촌 김일손이 화를 당했을 때 아버지 김준손과 함께 호남으로 유배를 당했다가 풀려났다. 이후 현량과에 병과로 급제하고 성균관 전적.칠원 현감 등을 역임했으나, 기묘사화가 일어나 현량과가 파방되자 삭탈 관직 당한 뒤, 청도의 산속에 들어가 살았다.



본관은 김해(金海). 자는 천우(天佑), 호는 삼족당(三足堂). 아버지는 직제학 김준손(金駿孫)이고 김일손(金馹孫)의 조카이다. 어머니는 첨정 고태익(高台翼)의 딸 제주 고씨이다.


김대유(金大有)(1479∼1551)는 경상북도 청도군 화양읍 토평리 백곡 마을 출신으로, 1498년(연산군 4) 무오사화로 김일손이 화를 당했을 때 아버지와 함께 호남에 유배됐다가 1506년(중종 1)에 풀려났다. 1507년 정시(庭試)에 장원해 진사가 되고, 1518년 행의(行誼) 있는 선비를 구할 때 전생서 직장(典牲署直長)에 서용됐으나 사직하고 고향인 청도로 돌아갔다. 1519년 현량과에 급제한 뒤 성균관 전적.호조 좌랑 겸 춘추관 기사관·정언 등을 두루 역임했다.


칠원 현감(漆原縣監)이 돼 선정을 베풀던 중 기묘사화가 일어나 현량과가 혁파되자, 관작과 과제(科第)(등과한 자격)를 삭탈당했다. 향리인 청도에 내려와 소요당 박하담과 함께 사창인 동창(東倉)을 창설해 구휼 사업에 매진했다. 1545년(인종 1) 현량과가 복과되면서 전적에 다시 서용돼 상경하던 도중에 병이 나 청도 운문산으로 되돌아 와서 여생을 마쳤다.



현량과 천목(薦目)에서 “기우(器宇)가 뛰어나고 견식(見識)이 명민하다.”라는 평가를 받았고, 조광조.조식 등과 친교를 맺었다. 저서로는 ‘탁영 연보(濯纓年譜)’가 있다.


경상북도 청도군 매전면 금곡산(金谷山)에 있다.


기묘명현(己卯名賢)으로, 경상북도 청도군 이서면 서원리에 있는 자계 서원(紫溪書院)과 선암사(仙巖祠)에 제향됐다.



선암서원은 튼 ‘ㅁ’자로 이뤄진 정침 뒤쪽에 북향했 있어, 제택(第宅)에 서당(書堂) 건물이 첨가된 형식이라 할 수 있다. 안채와 사랑채인 득월정(得月亭), 행랑채가 ‘ㄷ’자 평면을 이루고 그 뒤편으로 남향(南向)한 선암 서당이 있다.


안채(정침)는 정면 5칸, 측면 1칸으로 우좌 측으로부터 부엌, 방, 마루, 마루, 방의 순서로 평면이 구성돼 있다. 


득월정은 정면 4칸, 측면 1칸의 소규모 건물로 정침과는 토담으로 구분됐다. 온돌방 2칸, 대청 2칸의 단순한 평면이고, 팔작지붕의 홑처마는 선자가 걸린 귀보다 중앙 부분이 훨씬 튀어 나오도록 서까래를 길게 걸었다. 측면은 간주(間柱)를 세워 2칸통(二間通)처럼 하고 충량을 올려 대량에 턱을 걸었다.


부속 건물은 정침으로 출입하게 된 대문칸채(정면 9칸, 측면 1칸)와 맞은편채(정면 8칸, 측면 1칸)인데 고간(庫間)으로 구성됐다. 



소요당은 정면 5칸, 측면 2칸의 규모로, 평면 구성은 좌우 퇴칸에 전퇴를 둔 방이 각 한 칸씩 있다.


2012년 현재 유지 관리가 잘 되고 있다. 1975년 8월 18일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79호로 지정됐고, 지난해 11월 19일 문화재청 고시에 의해 문화재 지정번호가 폐지돼 경상북도 유형문화재로 재지정됐다.


선암서원은 서원이나 사당으로서의 역할보다는 향리 토호(土豪)의 제택의 기능이 큰 건물로 소요당보다도 정침과 사랑채인 득월정(得月亭), 그리고 좌우의 부속 건물의 건축 기법이 흥미롭고 독특한 서원이다.


# 용강 서원[龍岡書院]


용강서원은 경상북도 청도군 이서면 학산리에 있는 서원이다.





이서면사무소에 팔조령 방향으로 난 국도 30호선을 따라 약 950m 정도 이동하면 학산 1리 노인 회관이 길 우측에 있고, 노인 회관의 좌측으로 난 길을 따라 마을 야산으로 가면 용강 서원이 자리 잡고 있다.


충숙공(忠肅公) 박익(朴翊)(1332∼1398)과 임진왜란 당시의 14의사(義士)를 제향키 위해 1780년에 건립한 서원이다.



박익은 고려 말 후손이 청도로 이주한 문신으로, 본관은 밀양(密陽). 초명은 천익(天翊), 자는 태시(太始), 호는 송은(松隱). 판도 판서(版圖判書) 박영균(朴永均)의 아들이고, 모친은 능주 구씨(綾州具氏)로 좌정승 구위(具褘)의 딸이다.


박익(朴翊)(1332∼1398)은 고려의 신하로서 1386년(우왕 12) 동경(東京) 판관(判官) 재직 중 권농 방어사를 겸했다. 그 후 사재 소감(司宰少監).예부 시랑(禮部侍郞).중서령(中書令).세자 이사(世子貳師) 등의 벼슬을 지내고, 왜구와 여진을 토벌해 여러 차례 전공을 세웠다. 우왕.창왕 때에 정치가 어지러워 동생 박천경과 함께 밀양으로 낙향해 정몽주.이색과 교류하다 다시 상경해예조 판서를 역임했다.


조선이 개국되자 두문동(杜門洞)의 귀은제(歸隱第)로 들어가 은거했다. 1395년(태조 4) 공조 판서.형조 판서.예조 판서.이조 판서 등에 제수됐으나 거절하고 나가지 않았고, 이듬해에 다시 좌의정에 임명됐지만 부임하지 않았다. 거주지 뒤의 산을 송악(松岳), 마을을 송계(松溪), 호를 송은(松隱), 집을 송암(松庵)이라 했듯이, 은거 생활 중에서도 송경(松京)을 동경하다 생을 마쳤다.



박익의 아들 박융이 이후 탁영 김일손이 청도 고을 교수직으로 있을 때 향교 중수에 힘썼다. 또한 손자 소고(嘯皐) 박건(朴乾)이 당시 청도 지역에 큰 세력을 형성하고 있던 병조판서 김철성(金哲誠) 가문과 혼인하면서 밀양에서 청도로 이주해 정착했다. 박건은 청도 지역의 밀양 박씨 소고공파의 입향조가 됐다.


학문과 저술포은 정몽주와 도의로 교유했고, ‘송은집’이 있다.


경상남도 밀양시 청도면 고법리에 있다.


좌의정에 추증되고 충숙(忠肅)이라는 시호가 내렸고, 밀양 덕남 서원(德南書院)과 산청 신계 서원(新溪書院), 청도 용강사(龍岡祠)에 제향됐다.



용강서원의 전체적인 배치는 외삼문(外三門), 강당(講堂), 내삼문(內三門), 여충사(麗忠祠)를 동일 축선 상에 배치했다. 강당의 우측에는 임진왜란 14의사를 모신 충렬사(忠烈祠)가 별도의 공간을 이룬다. 강당의 좌측에는 용강재(龍岡齋)와 주사(廚舍)를 우측에는 보인당(輔仁堂)을 각각 배치하였다.


강당은 정면 5칸, 측면 1.5칸 규모의 팔작 기와집이다. 평면 구성은 중앙의 3통칸 대청마루를 중심으로 좌우에 각각 1칸 온돌방을 둔 중당 협실형(中堂挾室形)으로 전면에는 반 칸 규모의 툇간마루를 설치했다.


담장 밖 우측 입구에는 방형의 토석 담장을 두른 별도의 공간 안에 14의사 묘정 비각(十四義士 廟庭 碑閣)이 있다. 


# 남강 서원[南岡書院]


남강서원은 경상북도 청도군 각북면 남산리에 있는 서원이다. 




각북면사무소 정면에 있는 지방도 902호선을 따라 덕산 초등학교 방향으로 약 650m 정도 이동해 남산리로 들어가서 좌측길로 들어서면 뒤멧산 자락 아래에 남강 서원이 있다.


1864년(숙종 20)에 오졸재(迂拙齋) 박한주(朴漢柱)와 국담(菊潭) 박수춘(朴壽春)를 배향키 위해 사림의 건의로 창건됐다. 이후 1868년(고종5)에 서원 철폐령에 의해여 훼철됐다. 


현재의 남강 서원은 밀양 박씨 국담 공파 사우당 문중의 기부금으로 2000년에 건립했다.



박한주의 본관은 밀양(密陽). 자는 천지(天支), 호는 우졸재(迂拙齋). 박돈인(朴敦仁)의 아들이다. 김종직(金宗直)의 문인이다.


박한주는 1483년(성종 14) 생원시.진사시에 합격하고 1485년 문과별시(文科別試)에 급제했다.


전생서직장(典牲署直長)에 제수된 뒤 한성부참군.사헌부감찰.사간원정언.성균관전적 등을 지내고 부모의 봉양을 위해 자진해서 창녕현감으로 나왔다. 이때 백성들을 지성으로 보살피고 교화시켜 임금이 비단과 교서(敎書)로서 포상, 가자(加資)했다.



임기를 마치고 다시 내직으로 들어가 종부시주부를 거쳐 1497년(연산군 3) 사간원헌납이 됐다. 이때 연산군의 실덕(失德)을 직간(直諫)했고, 또 임사홍(任士弘) 등의 간악함을 탄핵하는 차자(箚子)를 올렸다. 연산군의 횡포가 점차 심해지자 외직을 청해 평해군수.예천군수 등을 지냈다.


1498년 무오사화가 일어나자 김종직의 문도(門徒)로 붕당을 지어 국정을 비방한다는 죄명으로 장(杖) 80대에 평안북도 벽동(碧潼)으로 유배됐다. 1500년 평안도로 이배됐다. 이때 아버지의 상을 당했다. 1504년 갑자사화에 연루돼 처형당했다.


1506년(중종 1) 중종반정으로 신원됐고, 1517년 김정(金淨).조광조(趙光祖) 등의 계(啓)에 의해 도승지 겸 예문관직제학이 추증됐다. 밀양 예림서원(禮林書院), 함안 덕암서원(德巖書院), 대구 남강서원(南岡書院)에 배향됐다. 저서로는 ‘우졸재집(迂拙齋集)』이 있다.



전면에 세운 3칸 규모의 산형 대문(山形大門)을 들어서면 마당을 사이에 두고 정면 5칸 측면, 2칸 규모의 팔작 기와집인 강당(講堂)이 있다. 양 측면에는 동재(東齋)와 서재(西齋)를 배치했다. 


강당 뒤의 경사진 대지 위에는 사당인 양현사(兩賢祠)가 별도의 영역을 이루면서 배치돼 있고, 전면에는 3칸 규모의 내삼문(內三門)을 세워 사당으로 출입하게 했다.


남강 서원의 문중에서 관리하고 있다. 


# 훈령서원


훈령서원은 경상북도 청도군 이서면 신촌리에 있는 서원으로, 두촌(杜村) 박양무(朴陽茂), 화은(華隱) 박계은(朴繼恩), 호재(湖齋) 박맹문(朴孟文), 농암(聾巖) 박란(朴鸞)을 향사키 위해 건립했다. 




경상북도 청도군 이서면 신촌리 611에 있다. 가창면에서 이서면 방향으로 난 30호선 국도를 따라 가다 이서 덕신 경로 회관에서 우회전해 약 300m 정도 이동하면 길 우측에 위치한 야산 자락 아래에 자리하고 있다.


훈령 서원은 1845년에 건립됐으나, 흥선 대원군 때 훼철된 후 서당으로 존속해 왔다. 1972년에 현재의 모습으로 중건됐고, 1998년에는 서원으로 승격됐다.



3칸 규모의 산형 대문(山形大門)을 들어서면 마당을 사이에 두고 정면 7칸, 측면 1칸 반 규모의 팔작 기와집인 강당이 자리 잡고 있다. 강당의 우측 전면에는 4칸 규모의 팔작 기와집인 동재를 뒀고, 강당의 뒤에는 3칸 규모의 맞배 기와집인 숭절사(崇節祠)를 배치했다./사진출처-성주군 제공<성주군편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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