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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서원 54 청도군 편] 이운룡 장군을 추모하는 공간 ‘금호서원’
  • 이승준 기자
  • 등록 2022-08-19 03:46:07
  • 수정 2022-12-26 10:51: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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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준 기자] 코로나19로 인해 잠정적으로 여행을 중단됐던 본지가 다시 한국의 서원을 준비했다. 현재까지 확인한 바 전국에 서원은 대략 620여 개의 서원들이 흩어져 있는 것으로 확인됐다. 이러한 서원들을 간략하게나마 살펴보면서 한국의 서원들에 대한 많은 관심을 갖기를 기대해 본다. 이번 호에서도 경북 청도군에 소재하고 있는 서원을 살펴본다. <편집자주>

 

금호서원은 건물은 임란 때 혁혁한 전공을 세워 경상우수사 겸 삼도수군통제사를 지낸 식성군(息城君) 이운룡(李雲龍)장군의 영정을 봉안키 위해 세운 서원이다. 


1868년(조선시대고종 5년)에 대원군의 서원 훼철령에 의해 훼철되고 같은 해 남은 강당을 당시의 연지(지금의 풍야지)안 대월산 기슭에 이건해 효충사(孝忠祠)라 개칭하여 장군의 영정을 봉안해 오다가 1947년에 장군의 방손인 이임호(李林浩)를 비롯해 이정태, 김정곤, 박종현, 최재향, 박효수, 제씨 등 사림 2백여명이 발의해 금호서원을 중창, 향내사림에서 춘추로 향사해 오늘에 이르고 있다. 강당은 2001년 다시 중건했다.


이운룡은 조선 후기 청도 출신의 무신으로, 임진왜란 때 옥포 만호로 있으면서 패전한 원균(元均)을 대신해, 이순신(李舜臣)에게 구원을 요청했다. 이순신의 막하에서 여러 번 싸움에 나아가 큰 전공을 세워, 경상좌도 수군 절도사가 됐다. 오랑캐가 북쪽 변방에 침입했을 때 함경남도 병마 절도사가 돼 적을 진압했다.




본관은 재령(載寧). 자는 경견(景見), 호는 동계(東溪). 아버지는 남해 현령을 지낸 이몽상(李夢祥)이고, 어머니는 정부인 밀양 변씨(密陽卞氏)이다.


이운룡(李雲龍)(1562∼1610)은 24세이던 1585년(선조 18)에 무과에 합격했고, 병조판서 유성룡의 후원으로 1587년 무반 청요직인 선전관에 임명됐다. 


1589년 옥포 만호에 제수돼 복무하던 중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원균이 인솔한 경상도 수군과 이순신이 지휘하는 전라도 수군이 합세해 거제도 동쪽 옥포양(玉浦洋)에서 적선을 맞아 싸웠는데, 이운룡은 선봉장이 되어 적선 50여 척을 불사르는 큰 전과를 올렸다. 


이 싸움이 바로 임진왜란 최초로 승전보를 울린 옥포 해전이다. 그 뒤 사천.진해.한산양.안골포.부산해 등 여러 해전에 참가해 선두에 서서 용감히 싸워 조선 수군이 남해의 제해권을 장악하는 데에 큰 공을 세웠다.




왜적을 물리친 공로를 인정받아 1593년 웅천 현감으로 승진했다. 1595년 통정대부로 가자(加資)(공로로 계급을 올려 줌)됐다. 1596년 이순신의 천거로 경상 좌수사에 승진돼 전쟁이 끝날 때까지 경상도의 수군을 주도했다.


1604년 선무공신(宣武功臣) 3등에 녹훈되고, 식성군(息城君)에 봉해졌다. 1605년 도총부 부총관, 경상 우수사 겸 삼도 수군통제사(三道水軍統制使) 등을 역임했고, 1607년 북방의 방비가 급해지자 비변사의 천거로 함경남병사(咸鏡南兵使)로 전직돼, 기병 별대를 창설하고, 갑산성 수축에 공을 세웠다. 이어 1609년(광해군 1)에 충청 수사로 제수됐다가 이듬해 체직(遞職)돼 청도인 고향으로 돌아와 49세의 나이로 별세했다.


임진왜란 참전 당시를 기록했던 ‘식성군실기(息城君實記)’ 2권이 있다.


경상북도 청도군 법귀산(法龜山) 선영에 있었으나 1630년 이운룡의 아들 평택 현감 이암에 의해 경상남도 의령군 지정면 웅곡(熊谷)으로 이장했다.




증직으로는 자혜대부 병조판서(資憲大夫 兵曹判書) 겸 지의금부사(知義禁府事)를 받았다. 신도비(神道碑)와 기적비(紀蹟碑)는 전서지인 충무에 건립돼 있다. 청도 금호 서원(琴湖書院), 의령 기강 서원(岐江書院)에서 배향되고 있다.


한편, 이운룡장군 영정은 1604년(선조 37)에 선무공신 3등에 책훈되고 식성군에 봉해졌을 때, 나라에서 초상을 그려 영구히 보존하라는 교서에 의해 제작됐다. 원래 이운룡 장군의 출생지인 매전면 온막리에 상충사를 건립해 봉안했다가 1818년(순조 18)에 유령 등 400여 명이 발의해 이서면 금촌리에 금호 서원을 건립해 영정을 옮겨 봉안해 왔다.


고종의 서원 철폐령에 의해 금호 서원이 훼철되자 1928년 대월산 아래로 이건해 충효사로 개칭해 봉안했고, 1919년 개모해 구 영정은 청도읍 원정리 흑석에 있는 충현사로 옮겨 봉안하고 있다.



영정은 비단 바탕에 채색이 돼 있다. 영정의 크기는 가로 146㎝, 세로 178㎝로 호랑이 모양의 흉배를 부착하고 조선 시대 종이품 벼슬아치가 관복이나 조복에 띠던 띠인 학정금대를 착용하고 있고, 공신호 책록 당시 이운룡 장군의 품계, 즉 오위도총부 부총관이라는 종이품 품계와 부합된다. 17세기 초 공신 도상의 전형적인 형식을 보여주는 가작이다.


이운룡장군 영정은 1975년 12월 30일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89호로 지정됐고, 지난해 11월 19일 문화재청 고시에 의해 문화재 지정번호가 폐지돼 경상북도 유형문화재로 재지정됐다. 


1977년 8월 19일 영정의 원본을 도난당했다. 현재는 작은 흑백 사진과 1950년대에 원본을 모사한 이모본(移模本) 및 원본 도난 시 그림의 주요 부분만 칼로 오려가면서 남은 사방 약 5㎝ 남짓의 비단 조각만 전하고 있다. 그래서 자세한 내용을 파악하기 어려운 형편이다./사진출처-청도군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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