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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서원 52 상주시 편] 절의(節義)의 큰 선비, 남계(藍溪) 표연말(表沿沫) '임호서원'
  • 이승준 기자
  • 등록 2022-08-19 02:54:09
  • 수정 2022-12-26 10:50: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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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준 기자] 코로나19로 인해 잠정적으로 여행을 중단됐던 본지가 다시 한국의 서원을 준비했다. 현재까지 확인한 바 전국에 서원은 대략 500여 개의 서원들이 흩어져 있다. 이러한 서원들을 간략하게나마 살펴보면서 한국의 서원들에 대한 많은 관심을 갖기를 기대해 본다. 지난호에 이어 이번 호에서도 경북 상주시에 소재하고 있는 서원을 살펴본다.<편집자주>

 


[이승준 기자] 임호서원은 경상북도 상주시 공검면에 있는 조선후기 표연말 등 5인의 선현을 추모키 위해 창건한 서원이다. 


1693년(숙종 19)에 지방유림의 공의로 표연말(表沿沫).홍귀달(洪貴達).채수(蔡壽).권달수(權達手).채무일(蔡無逸)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키 위해 창건해 위패를 모셨다.


표연말은 조선 전기 경상남도 함양군 출신 문신이다.


표연말(表沿沫)(1449~1498)의 자는 소유(少游), 호는 남계(藍溪).평석(平石)이다. 본관은 신창(新昌)이다. 할아버지는 표을충(表乙忠), 아버지는 감찰 표계(表繼)이다. 어머니는 정랑 안홍기(安鴻起)의 딸이다.


표연말은 경상남도 함양군 수동면 효리에서 출생했다고 한다. 그러나 ‘함양군지’ 등에는 아버지 표계와 함께 함양군의 동쪽 백석(栢石)에 거주했다고 기록돼 있다. 



백석은 백토면 백석동으로, 지금의 경상남도 함양군 수동면 상백(上栢)이다. 즉 효리에서 출생해 상백에서 성장했거나 상백에서 출생해 효리에서 성장한 것으로 추정된다. 출생 시점과 관련하여서도 옛 보첩(譜牒)에는 1431년으로 돼 있으나 중간에는 1449년으로 돼 있다. 


1431년으로 보면 김종직(金宗直)(1431~1492)의 출생 연도와 같다. 표연말이 김종직의 제자로 보면 1449년이 타당하지만 이종윤(李從允)(1431~1494)의 묘기(墓記)에 의하면 표연말이 이종윤과 동갑이라고 한다면 1431년도 배제하기 어렵다.


표연말은 약관에 문행(文行)이 세상에 알려지고 당대의 김굉필(金宏弼)(1454~1504), 정여창(鄭汝昌)(1450~1504) 등과 함께 문장에 뛰어났다. 같은 문하의 조위(曺偉)(1454~1503), 김일손(金馹孫)(1464~1498) 등과도 교유했다. 김종직의 문인이다.


표연말은 1469년(예종 원년) 사마양시에 합격했고, 1472년(성종 3)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해 예문관에 들어갔다. 1485년(성종 16) 사의(司議) 자격으로 ‘동국통감(東國通鑑)’ 찬수에 참여했다.


이듬해 문과중시에 다시 병과로 급제한 뒤 장령, 사간 등을 거쳐 동지중추부사가 됐다. 1490년(성종 21)에는 이조참의.대사성이 되고, 1492년(성종 23)에는 대제학을 지냈다. ‘성종실록(成宗實錄)’ 편찬에 참여했다.



표연말은 과거 시험 인연으로 서거정(徐居正)이 편찬한 한문 수필집 ‘필원잡기(筆苑雜記)’의 서문과 김종직 문인 중심의 초기 사림파 학문관과 정치관 일단을 보여 주는 ‘논학(論學)’을 작성했다.


1854년(철종 5)에 후손 표석준(表奭峻)[1866~1926]이 간행한 ‘남계문집(藍溪文集)’ 4권 2책이 전한다.


표연말은 무오사화에 연루돼 유배지인 함경도 경원으로 가는 도중에 1498년 8월 19일 은계역(銀溪驛)에서 세상을 떠났다. 임시로 매장됐다가 1504년(연산군 10) 갑자사화 때 부관참시(剖棺斬屍) 당했다.


중종 4년에 선영이 있는 경상북도 상주시 함창읍 대조리에 장사를 지냈다는 기록이 있다. ‘함양군지’에는 묘소가 두현(斗縣)에 있다고 하는데 두현은 현재 경상남도 함양군 지곡면 시목마을이다.



표연말은 사화에 연루돼 세상을 떠난 후 1507년(중종 2)에 신원(伸寃)되고, 경상남도 함양군 수동면에 있는 구천서원(龜川書院)과 경상북도 상주시 공검면에 있는 임호서원(臨湖書院)에 제향됐다. 1517년(중종 12)에는 이조판서에 추증됐다.


선현배향과 지방교육의 일익을 담당해오던 중 1868년(고종 5)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됐다가 1979년에 복원했다. 경내의 건물로는 3칸의 묘우, 신문(神門), 3칸의 강당, 4칸의 주소(廚所) 등이 있다.


사우에는 표연수.홍귀달.채수.권달수.채무일의 위패가 봉안돼 있다. 중앙의 마루와 양쪽 협실로 된 강당은 원내의 여러 행사와 유림의 회합 및 학문강론 장소로 사용되고 있다. 주소는 향사 때 제수를 마련해두는 곳이고, 고자(庫子)들이 거처하기도 한다.


이 서원에서는 매년 3월 상정(上丁: 첫번째丁日)에 향사를 지내고 있고, 제품(祭品)은 4변(籩) 4두(豆)이다. 유물로는 문집 몇 권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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