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 메일전송
[한국의 서원 51 상주시 편] 김담수 등 3인의 선현 추모키 창건한 상주 ‘낙암서원’ 外
  • 이승준 기자
  • 등록 2022-08-18 09:59:21
  • 수정 2022-12-26 10:50:09

기사수정

[이승준 기자] 코로나19로 인해 잠정적으로 여행을 중단됐던 본지가 다시 한국의 서원을 준비했다. 현재까지 확인한 바 전국에 서원은 대략 500여 개의 서원들이 흩어져 있다. 이러한 서원들을 간략하게나마 살펴보면서 한국의 서원들에 대한 많은 관심을 갖기를 기대해 본다. 지난호에 이어 이번 호에서도 경북 상주시에 소재하고 있는 서원을 살펴본다.<편집자주>


# 낙암서원



낙암서원은 경상북도 상주시 중동면에 있는 조선후기 김담수 등 3인의 선현을 추모하기 위해 창건한 서원이다. 


1745년(영조 21)에 지방 유림의 공의로 김담수(金聃壽).김정룡(金廷龍).김정견(金廷堅)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키 위해 서원을 창건해 위패를 모셨다.


김담수의 본관은 의성(義城). 자는 태수(台叟), 호는 서계(西溪). 경상도 성주 출신. 아버지는 참봉 김관석(金關石)이고, 어머니는 순천박씨로 박탄(朴坦)의 딸이다.



어려서는 조식을 사사했고, 오건(吳健)에게서 ‘심경’ ‘근사록’을 배웠고, 황준량(黃俊良)에게서 ‘중용’과 ‘대학’을 강의받았는데, 모두 지극한 칭찬을 받았다. 김우옹(金宇顒).정구(鄭逑)와 도의로 사귀었고, 벗을 사귐에서는 어진 이를 가까이하고 선행을 즐겼고, 모든 행실이 겸손했다. 특히 지극한 효성으로 명성이 있었다. 


1564년(명종 19) 사마시에 합격했으나 건강으로 과거를 포기하고 두문불출, 경전 공부에 정진했다. 그리고 항상 가내 법규를 엄중히 해 친척 간에 친애함과 불의를 행하지 말 것을 강조해 우애가 돈독했다.



1591년 학행(學行)으로 천거돼 선공감참봉(繕工監參奉)을 제수받았으나 부임하지 않았고, 이듬 해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어머니와 함께 가야산으로 피란했다. 주로 도학을 닦고 후학의 진흥에 힘썼다. 


성주의 청천서원(晴川書院)과 상주의 낙암서원(洛巖書院)에 제향됐다. 저서로는 ‘서계일고(西溪逸稿)’ 3권 1책이 규장각도서에 전한다.


선현 배향과 지방교육의 일익을 담당해오던 중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1868년(고종 5)에 훼철됐으나, 그 뒤 묘우(廟宇) 자리에 단소(壇所)를 만들었다.



경내의 건물로는 3칸의 강당(講堂)과 1칸의 장판각(藏板閣)이 있고, 동재.서재와 전사청(典祀廳) 등은 터만 남아 있다. 강당은 중앙의 마루와 양쪽 협실로 돼 있는데, 원내의 여러 행사와 유림의 회합 및 학문의 토론장소로 사용된다.


장판각은 문집의 판각을 보관하는 곳인데 현재 판각은 없고 판각된 문집만 몇 권 남아 있다. 매년 한 차례의 향사를 지내고 있다.


# 봉강서원 




봉강서원은 1817년(순조 17) 강세백(姜世白)이 고려절신인 강회중(姜淮仲)과 갑자사화 피화인강형(姜詗을 배향한 경덕사(敬德祠)를 봉대(鳳臺)에 창건, 이후 현 위치로 이건했다. 


1868년(고종 5) 서원훼철령으로 훼철했으나, 1976년 옥동서원의 발의로 서원으로 승격됐다. 1990년 중건했고, 1998년 경덕사(景德祠)를 중건했다. 매년 3월 중정(中丁)에 향사를 지내고 있다.


# 청암서원


청암서원은 경상북도 상주시 공검면에 있는 조선후기 유포 등 11인의 선현을 추모키 위해 창건한 서원이다. 



1752년(영조 28)에 도계정사(陶溪精祠)와 아곡정사(雅谷精祠)를 합사해 유포(柳砲).유달존(柳達尊).박눌(朴訥).이겸(李謙).유종인(柳宗仁).홍약창(洪約昌).남영(南嶸).정윤해(鄭允諧).박성민(朴成敏).이영갑(李英甲).남근명(南近明)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키 위해 창건해 위패를 모셨다.


유포는 본관이 진주(晋州). 자는 자포(子包), 호는 가촌(嘉村). 현 경상북도 의성군 구천면 모흥리 일대에서 세거했었다고 한다. 이 지역은 조선 시대에는 경상도 비안현에 속했던 곳으로, 유포의 후손들이 비안 지역을 모두 떠난 상태라 정확한 가계는 확인되지 않는다. 



유포(柳砲)의 생몰 연대는 미상이고, 이력은 명확하지 않으나 ‘경상도속찬지리지(慶尙道續撰地理誌)’와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등의 조선 전기 지리지에는 효행이 특출했다고 기재돼 있다. 아직 성리학적 생활 규범이 완전히 정착되지 않았던 시기에 부모 상례(喪禮) 후 3년 간 여묘(廬墓)살이를 했기 때문이다. 이에 세종 연간에 경산 현령(慶山 縣令)으로 발탁되기도 했다. 


‘경상도속찬지리지’에 의하면, 유포의 효행으로 나라에서 정려(旌閭)를 내렸다고 하나, 그 적은 확인되지 않는다. 현 경상북도 의성군 구천면 모흥리에 위치했던 백천 서원(白川 書院)에 배향됐다. 모흥리는 유포의 진주 유씨 일파가 조선 시대까지 거주했던 마을이다. 백천 서원은 1723년(경종 3)에 건립됐으나, 흥선 대원군의 서원 철폐 이후 복설되지 못하고 있다. 



경상도 함창현(咸昌縣)[현 경상북도 상주시 소속]에 있었던 청암 사우(淸巖祠宇)(경상북도 상주시 공검면 예주리 소재)]에도 배향돼 있다. 


선현배향과 지방교육의 일익을 담당해오던 중, 1868년(고종 5)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됐다가 1981년 복원해 지금에 이르고 있다. 경내의 건물로는 3칸의 묘우(廟宇), 신문(神門), 4칸의 강당, 주소(厨所) 등이 있고, 좌묘유학(左廟右學)으로 한 일자형의 건물배치가 특이하다.



사우에는 11현의 위패가 봉안돼 있고, 강당은 중앙의 마루와 양쪽 협실로 돼 있는데 원내의 여러 행사와 유림의 회합 및 학문강론장소로 사용되고 있다. 주소는 향사(享祀) 때 제수를 마련해두는 곳이며 고자(庫子)들이 거처하는 곳이기도 하다.


이 서원에서는 매년 3월 중정(中丁 : 두 번째 丁日)에 향사를 지내고 있고, 제품(祭品)은 2변(籩) 2두(豆)이다. 유물로는 11현의 문집 이외에 약간의 문헌이 있다./사진제공-청암서원  


# 옥성서원



옥성서원은 1551년(명종 6)에 신잠(申潛)이 상주 목사로 부임해 세운 18개의 서당 중의 하나인 수양서당(首陽書堂)이 그 모태이고, 1633년(인조 11)에 서원으로 승격됐다.


1648년(인조 26) 수해로 옥성서원이 있던 서산이 무너져 서원이 묻혀버렸다. 1710년(숙종 36) 현재의 자리인 외남면 신상리 진등 마루에 새롭게 건물을 지어 서원을 복원했다. 대원군의 훼철령으로 훼철됐으나 1977년 사림의 중론에 의해 복원됐다.



신잠은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1553년 상주목사를 지냈다. 선정을 베풀어 백성들이 부모처럼 받들었고 시, 서, 화에 모두 능해 삼절(三絶)이라 했다.


본관은 고령(高靈)이며 호는 영천자(靈川子)·아차산인(峨嵯山人), 자는 원량(元亮)이다. 영의정 숙주(叔舟)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증예조참판(贈禮曹參判) 주(澍)이고 아버지는 예조참판 종호(從濩)이다. 



1513년(중종 8) 진사(進士)가 되고 1519년 현량과(賢良科)에 병과로 급제해 예문관 검열(檢閱)이 됐으나 그 해에 기묘사화(己卯士禍)로 파직됐다. 그 후 20여 년 간 양주 아차산 아래에 은거하면서 서화에만 몰두했다. 1543년(중종 38) 재등용돼 사옹원주부(司饔院主簿).태인현감(泰仁縣監).간성군수(杆城郡守) 등을 역임하고 1553년(명종 8) 상주목사(尙州牧使)에 임명돼 재직 중 죽었다. 선정을 베풀어 백성들이 부모처럼 받들었다 한다.


시.서.화에 모두 능해 삼절(三絶)이라 불렸다. 특히 묵죽(墨竹)과 포도 그림을 잘 그렸다고 한다. 저서에 ‘영천집(靈川集)’, 그림에 ‘설중기려도(雪中騎驢圖)’ 등이 있다.


# 기산서원 


기산서원은 1702년(숙종 28)에 지방유림의 공의로 이관징(李觀徵)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키 위해 창건해 위패를 모셨다.


선현배향과 지방교육의 일익을 담당해오던 중,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1868년(고종 5)에 훼철된 뒤 복원치 못했고, 현재는 유허지만 남아 있다.


이관징(李觀徵)은 조선후기 대사헌, 경연관, 보양관 등을 역임한 문신. 본관은 연안(延安). 자는 국빈(國賓), 호는 근옹(芹翁).근곡(芹谷). 이주(李澍)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이창정(李昌庭)이다. 아버지는 이심(李示+尋)이고, 어머니는 이민환(李民寏)의 딸이다.


1639년(인조 17) 사마시에 합격하고, 성균관 유생으로서 뛰어난 재질을 보여 천거로 참봉이 되고, 1653년(효종 4)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했다. 이후 여러 관직을 역임한 뒤 사헌부장령이 됐다.


1660년(현종 1) 효종이 죽자, 효종의 계모인 조대비(趙大妃)의 복상문제가 있을 때 당시 기년설(朞年說)을 주장한 송시열(宋時烈) 등 서인에 대해 만3년설을 주장하다가 쫓겨난 남인 허목(許穆) 등을 구제하려다가 전라도도사로 좌천됐다.


1664년 다시 장령이 되고, 1672년 승지가 됐다. 1674년 숙종이 즉위해 남인이 집권하자, 이듬해 대사성.대사헌을 지내는 한편, 경연관(經筵官)이 돼 숙종의 신임을 얻었다. 1680년(숙종 6) 동지사(冬至使)로 청나라에 다녀왔고, 1689년 예조판서를 거쳐, 세자와 세손을 교육하는 보양관(輔養官)에 임명됐다. 그 뒤 이조판서를 지내고 행판중추부사(行判中樞府事)로 치사(致仕)하고, 봉조하(奉朝賀)가 됐다.


1694년에 노론인 김춘택(金春澤) 등이 숙종의 폐비 민씨의 복위운동을 일으킴으로써 노론과 소론 일파를 제거하려던 남인들이 오히려 참화를 당한 갑술옥사가 일어나자, 앞서 1689년에 일어났던 기사환국 때의 발계인(發啓人)주 02)으로 삭출(削黜)됐다.


해서(楷書)에 일가를 이뤘고, 만년에는 김생(金生)의 필법을 연구했다. 저서로는 ‘근곡집(芹谷集)’이 있다. 시호는 정간(貞簡)이다.<상주시편 끝>

0
  • 목록 바로가기
  • 인쇄


 한국의 전통사찰더보기
 박정기의 공연산책더보기
 조선왕릉 이어보기더보기
 한국의 서원더보기
 전시더보기
 한국의 향교더보기
 궁궐이야기더보기
 문화재단소식더보기
리스트페이지_004
모바일 버전 바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