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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서원 50 상주시편] 생전에 노수신이 유생들을 위해 강학하던 ‘봉산서원’ 外
  • 이승준
  • 등록 2022-08-18 08:52:09
  • 수정 2022-12-26 10:4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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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준 기자] 코로나19로 인해 잠정적으로 여행을 중단됐던 본지가 다시 한국의 서원을 준비했다. 현재까지 확인한 바 전국에 서원은 대략 500여 개의 서원들이 흩어져 있다. 이러한 서원들을 간략하게나마 살펴보면서 한국의 서원들에 대한 많은 관심을 갖기를 기대해 본다. 이번 호에서도 지난해에 이어 경북 상주시에 소재하고 있는 서원을 살펴본다.<편집자주>



# 봉산서원


서원의 전신은 명종 년간에 신잠목사가 세운 상주의 18개 서당의 하나인 봉산서당(鳳山書堂)이다. 


이곳은 노수신이 생전에 이곳에서 지역의 유생들을 위해 강학을 하던 곳으로 소재 선생이 시호를 받아 나라에서 선생의 사당에 치제를 하니 이곳의 유생들이 생전에 선생이 강학을 하시던 서당을 서원으로 승원(陞院)키로 해 1688년(숙종 14) 노수신(盧守愼)을 주벽으로 하고 배향에 심희수(沈喜壽), 성윤해(成允諧) 세분을 모시고 서원으로 출발했다. 



노수신은 본관 광주(光州). 자 과회(寡悔). 호 소재(蘇齋).이재(伊齋).암실(暗室).여봉노인(茹峰老人). 시호 문의(文懿).문간(文簡). 1531년(중종 26) 이연경(李延慶)의 사위로 문하생이 되고, 1543년 식년문과(式年文科)에 장원, 1544년 시강원(侍講院) 사서가 되고 사가독서(賜暇讀書)했다. 인종이 즉위하자 대윤(大尹)으로서 정언(正言)이 돼 이기(李芑)를 논핵, 파직시켰다.


그러나 1545년 명종이 즉위하자 소윤(小尹) 윤원형(尹元衡)이 이기와 함께 을사사화를 일으켜 그는 이조좌랑에서 파직, 1547년(명종 2) 순천(順天)에 유배됐다. 양재역 벽서사건(良才驛壁書事件)으로 가중처벌돼 진도(珍島)로 이배, 19년 동안 귀양살이했다. 



1565년 다시 괴산(槐山)으로 옮겼다가, 1567년 선조가 즉위하자 풀려서 교리(校理)에 기용돼 대사간.부제학.대사헌.이조판서.대제학을 거쳐, 1573년(선조 6) 우의정, 1578년에 좌의정, 1585년에 영의정에 이르렀다.


1588년 중추부영사(中樞府領事)가 됐으나, 다음해 기축옥사 때 과거 정여립(鄭汝立)을 천거했다 해 대간(臺諫)의 탄핵을 받고 파직됐다. 문장과 서예에 능했고, 양명학(陽明學)을 연구해 주자학파(朱子學派)의 공격을 받았고, 휴정(休靜).선수(善脩) 등과도 교제해 불교의 영향을 받기도 했다. 



충주의 팔봉서원(八峰書院), 상주의 도남서원(道南書院).봉산서원(鳳山書院), 괴산의 화암서원(花巖書院), 진도의 봉암사(鳳巖祠) 등에 배향됏다. 문집에 ‘소재집’이 있다.


봉산서원은 오래전부터 서당이 있던 곳으로 소재선생이 고향에 오시면 자주 들리던 곳에 서당을 짓고 서원으로 했다. 후에 추배로 김홍미(金弘微), 조우인(曺友仁), 정호선(丁好善), 황익재(黃翼再)를 더해 칠현을 모시게 됐다. 1770년(영조 46), 1841년(헌종 7) 두 차례에 걸쳐 중수했으나, 1868년(고종 5)에 훼철됐다. 1923년 단(壇9)을 건립했고, 1975년도에 복원해 오늘까지 음력 3월 하정(下丁)일에 원근의 유림을 봉청하고 위 일곱분 자손들의 협조를 받아 향사를 지속하고 있다.


# 도남서원


도남서원은 경상북도 상주시에 있었던 조선후기 정몽주 등 5인의 선현을 추모하기 위해 창건한 서원이다. 



1606년(선조 39) 지방유림의 공의로 정몽주(鄭夢周).김굉필(金宏弼).정여창(鄭汝昌).이언적(李彦迪).이황(李滉)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키 위해 창건해 위패를 모셨다.


그 뒤 1616년(광해군 8) 노수신(盧守愼).유성룡(柳成龍), 1635년(인조 13) 정경세(鄭經世)를 추가배향했다. 1677년(숙종 3) ‘도남(道南)’이라고 사액돼 사액서원으로 승격했고, 선현배향과 지방교육의 일익을 담당해왔다.



경내의 건물로는 묘우인 도정사(道正祠), 동재인 손학재(遜學齋), 서재인 민구재(敏求齋), 신문(神門)인 입덕문(入德門), 강당인 일관당(一貫堂), 누각인 정허헌(靜虛軒)과 풍우단(風雩壇).영귀문(詠歸門) 등이 있었다.



그 뒤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1868년(고종 5)에 훼철된 뒤 복원하지 못했다. 현재는 강당인 일관당만 남아 있고, 묘우와 강당자리에는 초석(礎石)이 원형대로 남아 있다.


서원 경내에 단소를 모아, 도내의 유림이 매년 3월 회일(晦日 : 그믐날)에 단장(壇長, 1인)과 유사(有司, 2인)를 선출해 향사를 치르고 있다.


# 효곡서원


효곡서원은 1685년(숙종 11)에 지방유림의 공의로 송량(宋亮)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키 위해 창건해 위패를 모셨다. 


그 뒤 김충(金沖).고인계(高仁繼).김광두(金光斗)를 추가배향해 선현배향과 지방교육의 일익을 담당해왔다.


송량의 본관은 여산(礪山). 자는 경명(景明), 호는 우곡(愚谷). 아버지는 부호군 송당(宋璫)이고, 어머니는 재령강씨(載寧康氏)로 선무랑 강완(康琬)의 딸이다. 상주 소곡리에서 출생했다.



성운(成運)의 문인으로 성리학에 전념했고, 학행으로 정구(鄭逑)의 천거로 헌릉참봉(獻陵參奉)에 임명됐고, 그 뒤 유곡도찰방(幽谷道察訪).한성참군(漢城參軍) 등을 역임했다. 1566년(명종 21) 노기(盧麒).정국성(鄭國成)과 함께 낙사계(洛社契)를 창설해 향음례(鄕飮禮)를 행하고 조약을 만들어 풍속을 교화시키는 데 힘썼다.


1580년(선조 13) 유성룡(柳成龍)이 상주목사로 부임해 향강(鄕講)을 설치하고 송량과 ‘심경’ ‘근사록(近思錄)’ 등을 강론했다.


1602년 사포서별제(司圃署別提).사헌부감찰에 임명됐으나 나아가지 않고, 동지들과 함께 오현원(五賢院)을 창건하고 학규(學規)를 만들어 후진 양성에 전력했다. 상주의 효곡서원(孝谷書院)에 봉향됐다. 저서로는 ‘우곡문집(愚谷文集)’ 4권 2책이 있다.



1868년(고종 5)에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됐다가 1957년 지방유림에 의해 복원됐다. 경내의 건물로는 3칸의 숭덕사(崇德祠), 4칸의 효곡당, 신문(神門), 고직사(庫直舍) 등이 있다. 


사우인 숭덕사에는 송량을 주벽(主壁)으로 좌우에 김충.고인계.김광두의 위패가 봉안돼 있다.


강당인 효곡당은 중앙의 마루와 양쪽 협실로 돼 있다. 원내의 여러 행사와 유림의 회합 및 학문강론장소로 사용되고 있다.


이 서원에서는 매년 3월 하정(下丁 : 세 번째 丁日)에 향사를 지내고 있다. 제품은 4변(籩)4두(豆)이다. 유물로는 배향자의 문집과 약간의 문헌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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