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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시 구석 구석 302] 조선 초기에 지은 이궁(離宮) '연희궁터 서잠실터'
  • 우성훈 기자
  • 등록 2024-03-22 18:02:47
  • 수정 2024-04-10 23:37: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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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성훈 기자] 연희궁은 조선 초기에 지은 이궁(離宮)의 하나로, 1420년 세종이 부왕인 태종을 위해 고쳐지었고 세종 자신도 1426 년에 이 곳에 잠시 머물렀다. 또한 세종은 이 궁에 국립양잠소 격인 잠실도회(蠶室都會)를 설치했고, 그 뒤 세조는 서잠 실(西蠶室)이라고 했다. 1505년에는 연산군이 이를 개축해 연회장으로 사용하기도 했다.


'경성 서쪽 15리 양주(楊州) 땅에 있다. 정종(定宗)이 왕위를 선양한 후에 이 곳에 머물렀다'고 해 도성 밖 서쪽 15 리에 연희궁(宮)이 있었다고 적었다. 지금의 연희입체교차로가 있는 부근으로 비정되고 있으나 궁지는 찾을 수 없다.



연희궁은 조선의 2대 군주 정종(定宗)이 태종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이궁(離宮)의 하나인 이곳 연희궁(延禧宮;衍禧宮)에 머무른 데서 붙여진 이름으로, 세종(世宗)이 부왕 태종(太宗)을 위해 세종 2년에 중건했고, 세종 7년(1425)에 '衍禧宮'이라 명명하고 세종 자신도 자주 들렀었다. 이래서 세종의 효성이 깃든 궁이라고 오늘에 전해오고 있다.



한편 조선시대에 이 곳은 잠실(蠶室)로 이용되기도 했다. 누에를 장려해 곳곳에 뽕나무밭을 만들고 잠실을 두었는데, 지금의 송파구 잠실에는 동잠실(東蠶室), 지금의 강남구 신사동에는 남잠실(南蠶室), 이 곳 연희동에는 서잠실(西蠶室)을 두었다. 


세종은 궁내에 누에를 키우는 잠실도회(蠶室都會)를 설치했고, 세조(世祖)도 서잠실(西蠶室)이라 부르며 양잠(養蠶)을 독려했다고 한다.


현재 연세대학교 교문을 들어서서 우측에 보면 ‘연희궁터 서잠실터’라는 글씨가 쓰여 있는 표지석이 세워져있다. 


사진-현재 주변 이미지

세종실록 권33권, 세종 8년 8월 22일(계미) 2번째기사에 의하면 '임금이 간관(諫官)을 불러 이르기를, “나는 본래 복자(卜者)의 말을 믿지 않는다. 그러나 또한 헤아리기 어려운 것이 있는 것은, 연전에 복자들이 모두 말하기를, ‘7, 8월에 액(厄)이 있다.’ 하더니, 7월에 이르러 내가 마침 병이 발생하였다. 복자가 또 이르기를, ‘금년에도 역시 액이 있다.’ 하므로, 연희궁(衍禧宮)으로 이어(移御)하여 이를 피하려고 하였더니, 그대들이 앞서 글을 올려 말하기를, ‘하늘의 경계를 능히 삼갈 따름이요, 피할 것은 없다.’ 하였으므로, 내가 곧 이를 윤허하고 그대들에게 이르기를, ‘우선 이를 중지하고 12월에야 이어(移御)하겠다.’ 하고, 그 뒤에 정전(正殿)에 거처하지 아니하고, 늘 삼가고 경계하던 중, 드디어 7월에 또 경미한 질병을 얻었으니, 복자의 말이 허망하지 않은 것 같다. 만약 12월에는 얼고 추울 것이므로 다음 달 초1일에 이어하고자 하니, 숙위 군사(宿衛軍士)는 6번으로 나누게 하고, 조계(朝啓)할 때의 각 관아는, 육조(六曹)에서는 번을 나누어 윤번으로 하고, 대성(臺省)1115) 에서는 아래로 지평(持平)·정언(正言)에 이르기까지 윤번으로 차례로 나아오면 폐를 가히 없앨 수 있을 것이니, 그대들은 그리 알라.”고 쓰여져있다./사진-우성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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