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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한산성 5] 남한산성 순교성지
  • 이승준 기자
  • 등록 2024-03-18 10:49: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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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준 기자] 남한산성 순교성지는 경기도 광주시 남한산성면 산성리의 남한산성에 있는 천주교 성지이다.


경기도 광주 지역은 삼국시대 이래 지리적 요충지로서 1595년(조선 선조 28) 남한산성이 축조됐다. 1626년(인조 4) 광주 유수(留守)의 치소와 마을이 성 안으로 이전되면서 천주교가 박해당할 때마다 신도들이 이곳에서 순교했다. 


1791년(정조 15) 조선시대 최초의 천주교도 박해사건인 신해박해(辛亥迫害) 때부터 신도들이 남한산성에 투옥됐다고 전하며, 1801년(순조 1) 신유박해(辛酉迫害) 때는 이곳에서 첫 순교자가 나왔다. 




이후 1839년(헌종 5)의 기해박해(己亥迫害)와 1866년(고종 3)의 병인박해(丙寅迫害) 등을 거치면서 약 300명의 신도들이 참수(斬首).옥사(獄死).장사(杖死) 등의 형태로 순교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남한산성은 1636년 12월 14일, 청나라의 침입을 받아 한양이 위태롭게 되자 인조가 세자와 백관들을 대동하고 피난해, 인조는 이곳에서 40여 일을 수성했지만, 모든 사정이 악화되자 결국 다음 해 1월 30일 성문을 열고 항복한다. 이후 조선에서는 청나라와 굴욕의 맹약을 맺은 삼전도에 세워진 청나라 태종의 송덕비를 가리켜 '치욕의 비' 또는 '한(汗)의 비'라 불렀다.


그로부터 200여 년이 지난 1839년의 박해 때 남한산성에서는 신앙인들의 노래는 훗날까지도 이어져 남한산성 한 모퉁이를 치명터로 만들었다. 당시 이곳이 치명터가 된 이유는, 산성리가 형성되고 광주 유수가 성안에 거처했기 때문이다. 박해가 계속되는 동안 광주 일대에서 체포된 수많은 신자들이 이곳으로 끌려와 모진 형벌을 받으면서 배교를 강요당했고, 신앙을 지키기 위해 세속의 모든 부귀와 육신의 고통을 버려야만 했다. 



남한산성에서 맨 먼저 호교의 노래를 부른 이는 광주 의일리(현 의왕시 학의동)에 살다가 1801년에 체포되어 동문 밖에서 참수된 한덕운(韓德運, 토마스). 그 뒤를 이어 광주의 거북뫼 곧 구산(현 하남시 망월동) 출신인 김만집(金萬集, 아우구스티노)이 기해박해 때 체포되어 남한산성 옥중에서 순교했고, 김만집의 형 김성우(金星禹, 안토니오) 성인은 이때 포도청과 형조에서 수많은 형벌을 받은 뒤 1841년에 교수형을 받아 순교했고, 셋째인 김문집(金文集, 베드로)은 김만집과 함께 체포되어 남한산성으로 끌려가 오랫동안 옥중 생활을 하다가 1858년경에 석방됐다.  






이천 단내(이천시 호법면 단천리)에 거주하던 정은(바오로)도 63세의 나이로 체포되어 재종손 정 베드로와 함께 1866년 12월 8일 남한산성에서 순교했다. 당시 남한산성의 광주 유수가 그들에게 내린 사형은 일명 도배형 또는 도모지(塗貌紙)라고 부르던 백지사(白紙死)였다. 


이 형벌은 먼저 팔과 양다리를 뒤로 해 나무에 결박하고, 여기에 풀어헤친 상투를 묶어 움직이지 못하게 한 다음 얼굴에 물을 뿌리고 창호지를 한 장씩 겹쳐 나감으로써 숨이 막혀 죽도록 하는 방법이었다. 이렇게 순교한 정은의 시신은 동문 밖에 짐승의 먹이로 버려졌다가 가족들에 의해 어렵게 거두어져 단내에 안장되었다.


박해자의 손길은 교우촌으로 알려져 있던 구산에 있는 김성우 성인을 비롯해 모두 7명이 여기서 순교했다.



이렇듯 치명터는 동문에 자리하고 있는데, 동문을 통해 신앙 선조들은 오랏줄에 묶여서 살아서 들어왔지만 혹독한 고문 끝에 결국은 시체가 되어 성 밖으로 던져졌다. 더욱이 살아서 동문을 들어온 이들이 죽어서는 물이 빠지도록 성 밑에 파놓은 수구문을 통해 내팽개쳐졌다. 그래서 수구문(水口門)은 시구문(屍口門)이 되었다. 


남한산성 로터리에는 천주교인들을 수감했던 옥터와 처형터가 있다. 동문 쪽에서 올라오면서 로터리에 도착하면 오른쪽에 있는 주차장이 옥터로 추정된다. 정면에는 섭정 10년간 2만여 명의 천주교인을 학살한 것으로 전해지는 대원군의 영세불망비(永世不忘碑)가 세워져 있어 세월의 무상함을 일러 주는 듯하다. 어느 사찰 승려들이 세워 준 것으로 전해지는 불망비와 마주한 곳이 바로 처형지였다고 교회사가들은 전한다. 여기서 처형된 교우들이 시체가 되어 산비탈로 질질 끌려 내려가 동문 밖 개울로 던져졌다고한다.




수원교구는 남한산성 순교성지의 교회사적 의미를 살리기 위해 1998년 9월 30일 남한산성을 성지로 선포하고, 공영주차장 인근 작은 개천 옆으로 1978년에 마련한 부지 위에 순교자현양비(2004년 9월)와 한옥 양식의 성당을 건립했다. 성당 뒤편 야산에는 야외 미사터와 십자가의 길 14처를 조성해 순례자들을 맞았다. 


2015년 4월 25일에는 기존의 협소한 성당을 대신할 새 성당을 맞은편에 건립해 봉헌식을 가졌다. 새 성당은 철근 콘크리트 구조와 목구조를 혼합한 한옥 형태의 2층 건물로 웅장하면서도 아름다운 모습을 지니고 있다. 기존의 성당 건물은 남한산성에서 순교한 복자 한덕운 토마스를 기념해 토마스홀로 명칭을 변경해 순례자들을 위한 공간으로 사용하고 있다. 


순교의 역사를 간직한 남한산성은 2014년 6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됐다./사진-이승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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