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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시 구석 구석 301] 한양을 방어하기 위해 앃은 성곽 '한양도성'
  • 박광준 기자
  • 등록 2024-03-15 13:22:25
  • 수정 2024-04-10 23:36: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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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청문[박광준 기자] 서울 한양도성은 조선시대 수도였던 한양을 방어하기 위해 쌓은 성곽으로, 백악산과 인왕산, 목멱산, 남산을 연결해 쌓은 평산성으로 둘레는 18,127m에 달한다. 1396년(조선 태조 5) 축성을 시작해 2년 뒤인 1398년에 완공했다. 1422년(세종 4)에 토성을 석성으로 개축했고, 영조 대를 거쳐 숙종 대에 대대적인 개축이 이루어졌다. 성벽에는 숙청문과 흥인문, 돈의문, 숭례문 등 사대문과 혜화문, 광희문, 창의문, 소덕문 등 사소문 등 8개의 성문이 있었다.


흥인지문/자료사진숭례문돈의문/자료사진서울 한양도성은태조 이성계가 조선을 건국하고 한양으로 천도하기 위해 '도성축조도감'을 설치하고 1396년부터 2년에 걸쳐 성곽을 축조했다. 성곽의 축조는 전체 규모인 59,500척을 1구간 600척씩 97구간으로 나누어 축성하되, 2개 구간마다 판사, 부판사 1명씩을 배치하고 사, 부사, 판관 등 12명을 배치해 공사를 감독했다. 


1구간은 다시 6호로 나누어 책임자를 두는 등 치밀한 계획을 수립하고 공사에 임했다. 각 구간마다 천자문의 순서를 따라 '천, 지, 현, 황...' 순으로 번호를 매겨 적(吊)자에서 끝나고 있다.


광희문혜화문창의문소의문(자료사진)축성 공사에 동원된 인원수는 총 11만 8,490명에 달한다. 성벽 외측 면석에는 감독자의 이름과 담당 군명, 자호 등을 새겨 넣었다. 성터가 높고 험한 곳은 석축으로 쌓았고, 평지 구간은 토성으로 쌓았다. 태조 때 쌓은 성곽은 둘레 89,610척, 높이 40척, 여장 4,664첩이고, 치성 6군데가 신축됐다. 사대문과 사소문은 1398년에 완성됐다.


태조 때의 석축 성벽은 가공하지 않은 편암계의 할석을 사용한 허튼층쌓기 방식을 특징으로 한다. 주로 남산 구간에서 태조 때 쌓은 성벽이 확인된다.





이어서 1422년(세종 4)에 대대적인 수축이 이루어졌다. 세종은 '도성수축도감'을 설치하고 각도에서 차출된 32만 2천 명의 인부와 수백 명의 감독관을 동원해 38일 만에 성곽 수축 공사를 끝마쳤다. 이때의 개축으로 도성은 둘레 89,610척, 높이 40척 2촌, 여장 4,664첩(堞), 치성(雉城) 6군데가 되었고, 곡성(曲城) 1군데, 성랑(城廊) 15군데를 만들었다. 태조 때 토성으로 쌓은 구간을 모두 석축으로 개축했고, 성벽의 높이도 처음보다 1척을 높게 쌓았다. 세종 대에 수축된 성벽은 지대석 위에 너비 3척, 두께 2척 정도의 장대석을 2~3단 정도 놓고, 너비 30cm 크기의 잘 가공된 화강암 성돌로 정연하게 쌓은 성벽을 특징으로 한다.


그 뒤 1426년(세종 8)에 수성금화도감(修城禁火都監)을 두고 성문과 성벽을 보호하게 했고, 1447년(세종 29)에 남대문(서울 숭례문)을 다시 세웠고 1479년(성종 10)에는 남대문을 중수했다.


한양도성 낙산 각석



1451년(문종 1) 1월부터는 경기.충청도의 수군(水軍) 3천 명으로 성벽을 수축했다.


임진왜란 때 함락되어 왜군에 의해 왜루(倭壘)가 쌓아졌지만, 다음 해 수복해 왜루를 철거하고 그 돌로 다시 수축했다. 1616년(광해군 8)에 부분적인 수축을 했다.


이후 1704년(숙종 30)에 5개월간 대대적인 수축 공사가 이루어졌다. 숙종 대에 수축한 성벽은 가로 2척, 세로 1.5척 정도 크기의 대형 장방형 석재를 사용해 화포 공격을 받더라도 성벽이 쉽게 붕괴되지 않도록 했다. 숙종 대의 성돌은 직육면체에 가깝지만, 순조 대 성돌의 경우 외면은 정방형으로 정연하지만 뒤 뿌리 쪽은 무게를 줄이기 위헤 과도하게 뾰족하게 해 사각추 형태에 가깝다.



광희문 각석

광희문 각석1743년(영조 19)에 부분 보수를 했고, 성첩도 회분(灰粉)으로 단장했고, 순조 대에도 지속적으로 수축이 이루어졌고, 가로 2척, 세로 2척의 정방형으로 규격화된 성돌은 순조 대에 수축한 성벽의 특징이다.


대한제국 시기에 새로운 교통 수단인 전차가 등장하면서 1898년 동대문(서울 흥인지문)과 서대문(돈의문), 남대문 일대의 성벽을 허물기 시작했고, 국권을 상실한 1905년 이후에는 대대적으로 훼손되기에 이르렀다. 1907년에는 일본 왕자의 서울 방문을 앞두고 경호상의 이유를 들어 '성벽처리위원회'라는 조직을 동원하여 사대문과 사소문 주변의 성벽을 훼손했다. 서울의 도시화로 인해 성벽의 훼손은 가속화되어 삼청동, 장충동 일대와 산지 구간 일부만 성벽이 남게 됐다.


서울 한양도성에 대한 보수 정비는 1963년에야 시작되어 인왕산과 북악산 일대의 성벽을 보수라고, 이후 창의문과 혜화문이 복원되고, 숙청문, 광희문 문루가 복원되는 등 계속적인 복원 공사가 이루어지고 있다. 하지만 서울 성곽의 복원 사업은 학술적인 고증이 간과된 상태에서 이루어져 성벽의 몸체 부분과 여장은 기형적으로 복원됐고, 성곽을 방어하기 위한 시설이었던 성랑은 전혀 복원되지 않아 흔적을 찾기도 어려운 실정이다./사진-박광준 기자, 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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