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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시 구석 구석 297] 조선시대 서울 북쪽 지역의 주민 행정 담당하던 관아터 '한성부 북부관아 터'
  • 박광준 기자
  • 등록 2024-03-13 09:16:27
  • 수정 2024-04-10 23:34: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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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광준 기자] 한성부는 한양 전도(奠都) 후 궁궐 및 각 관아의 설치와 함께 광화문 앞 ‘육조거리’에 건립됐던 것으로 그 위치는 중부 징청방(澄淸坊)에 있었으니, 이는 현재 종로구 세종로 84번지(정보통신부 및 한국전기통신공사)로 비정(比定)된다. 즉 남쪽에는 호조가, 북쪽에는 이조가 있었고, 동쪽으로는 큰 개울이 흐르고, 서쪽으로는 대로가 있었는데 그 건너편에는 병조가 있었다. 또한 한성부 청사의 대문은 서쪽으로, 후문은 동쪽으로 나 있었다. 


한성부 청사 

이 청사가 지어진 곳은 전의 한양부 성황당이 있던 곳으로, 처음 건축할 때에는 성황당을 다른 곳으로 이전했다가 태종 6년(1406) 6월에 예조의 계청(啓請)에 의해 한성부 청사 부근에 성황당을 다시 짓고 봉사(奉祀)했다. 세종 28년(1446)에는 평원대군[平原大君, 세종의 7남, 임(琳)]이 부근에 저택을 짓는 바람에 청사 일부가 철거를 당하기도 했다.


경조오부도(京兆五部圖), 김정호, 1861(허영환, '정도 600년 서울지도', 범우사, 1994)조선 후기에 와서 고종 2년(1865)에 대원군이 삼군부(三軍府)를 설치하고 예조가 있던 청사를 사용하게 되자 예조가 한성부 청사를 사용하게 되어 자연 한성부는 경희궁 동쪽(전 서울고등학교 동쪽, 종로구 신문로 2가 1번지 일대)에 있는 훈국신영(訓局新營)으로 이전했다.



그런데 훈국신영(訓局新營)으로 옮긴 한성부가 중부 징청방으로 다시 돌아 온 것은 언제인지 알 수 없으나 1895년 당시 이 곳에 있었음은 확실하다. 즉 1895년 5월 1일 경무청(警務廳)이 한성부 청사를 사용하게 되자 한성부는 현재 서울특별시청 자리인 전일의 군기시(중구 태평로 1가 31번지) 자리로 옮겨 왔다.



이어서 광무 5년(1901) 5월 20일에는 현재 제일은행 본점이 위치한 북쪽 일대인 중서 견평방 전동으로 이전했다가 2년 후인 광무 7년(1903)에는 다시 현재 적십자병원 남서쪽(중구 충정로 1가 90번지)인 경기감영(京畿監營) 자리로 옮긴 것으로 추정된다. 


그 후 융희 2년(1908)에는 현재 세종문화회관 부근인 서서(西署) 적선방으로 옮겼는데 1908년에 제작된 '한국경성실측지도(韓國京城實測地圖)'를 보면 전일의 군기시 자리는 숙영소(宿營所)로 표기되어 있다. 융희 4년(1910)에는 다시 현재 문화체육부(종로구 세종로 82번지)가 위치한 중추원 건물로 이전해 중추원과 같은 건물을 사용했다.



한성부는 경중(京中)의 호구장부 작성을 위시해 시장, 점포, 가옥, 전토(田土), 사산(四山)의 산림 관리, 도로, 교량, 개천, 탈세와 관물의 낭비에 대한 추심, 부채(負債), 투구(鬪毆), 주간순찰(晝間巡察), 검시(檢屍), 차량(車輛), 고실우마(故失牛馬), 낙계(烙契) 등의 일을 관장했다. 한성부는 수도의 행정을 관장하는 외에 전국의 호적 관리와 토지.가옥.묘지 등의 소송을 맡아 처리했다. 그래서 형조.사헌부와 함께 삼법사(三法司)라 칭했다./사진-박광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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