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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시 문화재 98] 서울 진관사 소 독성상 외
  • 박광준 기자
  • 등록 2024-03-10 21:05: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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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진관사 소 독성상-소 삼존불상-서울 진관사 소장 태극기 및 독립신문류-수륙재

[박광준 기자] # 서울 진관사 소 독성상 


이 불상은 현재 진관사 독성각에 봉안된 독성상으로 소조불이다. 독성은 나반존자라고도 하는데 남인도의 천태산에 거주하면서 부처님의 수기를 받고 열심히 정진하는 나한 중의 한 분으로서 우리나라에서는 조선 후기에 산신 및 칠성과 함께 삼성각에 봉안하거나 따로 독성각에 봉안해 신앙했다.


독성상은 현재 소조의 불상에 채색을 해 봉안하고 있는데 신체에 비해 얼굴이 크고 두 손을 무릎 위에 댄 모습 등 칠성각의 석불좌상과 닮았다. 얼굴은 거의 사각형에 가까울 정도로 각이 졌는데 눈과 눈 사이가 멀고, 코가 우뚝 솟아 있고, 입을 꼭 다물고 있는 등 의지가 강한 나한의 모습을 잘 표현하고 있다. 


사진-문화재청몸에 걸친 가사는 좌임(左임)으로, 왼쪽 어깨에는 가사를 고정한 금구장식이 표현됐다. 다소 긴 상체에 비하여 무릎이 낮아서 신체가 길어 보이며 낮게 표현된 무릎 위에 두 손을 단정히 대고 있다.


대부분 독성은 불화에서는 나이든 나한의 모습으로 표현되는 것이 원칙이지만 여기에서는 젊은 나한의 모습으로 표현한 것이 특이하다. 이 불상은 소조로 만든 독성상으로서 서울, 경기 일원에는 거의 남아 있지 않은 독성 조각이라는 점에서 중요한 의의가 있다. 또한 당시 독성상의 특징과 조각양식을 알 수 있는 자료로 평가된다./사진-문화재청 


# 서울 진관사 소 삼존불상


이 불상은 塑造의 釋迦三尊佛像으로 현재 津寬寺 羅漢殿의 本尊像으로 봉안되어 있다. 중앙의 釋迦如來坐像을 중심으로 두 菩薩像이 侍立하고 있는데, 현재 腹藏이 개봉되지 않았고 改金 또한 두터워 정확한 연대를 알기어려우나 三尊佛의 머리표현과 얼굴 형태, 法衣의 주름 등 전체적인 양식적 특징으로 볼 때 16세기 후반~17세기 전반경의 양식을 보여준다.세 불상은 모두 塑造佛로 조성됐는데, 손 부분은 후에 나무로 만들어 새로 끼웠다. 


本尊은 상체가 약간 긴 듯한 체구이지만 사각형에 가까운 얼굴과 좁지 않은 어깨로 인해 다소 건장한 느낌을 준다. 이목구비가 단정하게 표현된 얼굴, 활형의 눈썹과 이와 연결된 우뚝한 콧등 등에서 16세기 말~17세기 초반 불상의 특징이 잘 나타나 있다. 



머리는 螺髮로서 肉髻가 아주 낮게 표현됐는데, 頂上髻珠와 中間髻珠가 거의 붙을 정도로 가깝게 보인다. 法衣는 通肩으로 가슴 가운데에는 수평으로 裙衣가 표현 됐고 오른쪽 어깨를 감싸고 흘러 내린 옷자락은 오른쪽 겨드랑이를 돌아 왼쪽 겨드랑이 밑으로 끼워져 있는데 온 몸을 감싼 Ω형의 굵은 주름의 옷자락이 유려하게 흘러내리고 있다. 


좌우의 脇侍菩薩 역시 本尊과 유사한 양식을 보여주고 있는데 좌우 手印을 서로 대칭적으로 표현해 균형을 맞추고 있다. 머리에는 화려하고 정교한 寶冠을 쓰고 있으며 굵으면서도 단순한 옷주름과 다소 긴 듯한 상체 표현 등이 本尊佛과 닮아 있다. 


本尊에 비해 무릎의 폭이 낮고 시선을 다소 아래로 향하고 있는 점이 차이점이라고 하겠다. 이 삼존불상은 규모는 그리 크지 않으나 서울 인근 지역에 있는 조선 후기 불상 중에서 비교적 연대도 빠르고 三尊像이 모두 다 갖추어져 있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또한 최근 改金을 했지만 원래의 상태가 잘 보존되어 있고, 특히 보살상의 보관 역시흐트러짐이나 缺損된 부분 없이 보존상태가 양호하다./사진-문화재청


# 서울 진관사 소장 태극기 및 독립신문류


사진-문화재청‘서울 진관사 태극기’는 2009년 5월 26일 서울시 은평구 진관사의 부속건물인 칠성각(七星閣)을 해체.복원하는 과정에서 내부 불단(佛壇)안쪽 벽체에서 발견된 것으로, 태극기에 보자기처럼 싸인 독립신문류 19점이 함께 발견되었다. 


신문류는 ‘경고문’ ‘조선독립신문’ ‘자유신종보(自由晨鐘報)’ ‘신대한(新大韓)’ ‘독립신문’ 등 5종으로, 1919년 6월 6일부터 12월 25일까지 발행된 사실로 미루어 진관사 소장 태극기 역시 3.1만세운동이 일어나고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수립된 1919년 즈음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학계에서는 태극기를 숨긴 인물로 진관사 승려였던 백초월(白初月) 혹은 그와 밀접한 연관이 있던 승려로 추정하고 있다. 진관사 태극기의 가장 큰 특징은 일장기 위에 태극과 4괘의 형상을 먹으로 덧칠해 항일(抗日) 의지를 극대화했다는 점이다. 


경고문/사진-문화재청특히, 왼쪽 윗부분 끝자락이 불에 타 손상되었고 여러 곳에 구멍이 뚫린 흔적이 있어 만세운동 당시 혹은 그 이후 현장에서 사용되었을 가능성이 매우 크다. 따라서 현재 1919년에 제작된 태극기가 거의 알려지지 않은 상황에서, 이 태극기는 1919년에 제작된 실물이라는 자체만으로도 중요한 의미가 있다. 


이와 함께 진관사 태극기와 함께 발견된 독립신문류에도 태극기와 태극문양 및 태극기 관련 기사가 실려 있어 더욱 의의가 있다. 특히, 태극과 4괘가 우주 만물의 기본 요소나 만물의 생성.변화.발전하는 모습을 의미한다는 기존의 견해와 달리, ‘힘과 사랑’을 토대로 ‘자유와 평등’을 온 세상에 실현해나가는 뜻으로 새롭게 해석한 점은 주목할 만하다. 이처럼 독립신문은 당시 태극기에 대한 인식을 함께 살펴볼 수 있어 ‘진관사 태극기’를 이해하는데 도움을 줄 뿐 아니라 더 나아가 태극기의 변천사와 그 의미를 밝히는 데 중요한 근거를 제공해준다. 


‘진관사 태극기’는 우리나라 사찰에서 최초로 발견된 일제강점기의 태극기로, 불교 사찰이 독립운동의 배후 근거지나 거점지로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형태상으로도 일장기 위에 태극의 청색부분과 4괘를 검정색 먹물로 덧칠해 항일 독립의지와 애국심을 강렬하게 표현했고, 일장기 위에 태극기를 그린 유일하고 가장 오래된 사례라는 점에서 독립운동사에서 차지하는 상징적 의미가 매우 크다./사진-문화재청


# 서울 진관사 수륙재


사진-문화재청‘수륙재(水陸齋)’는 온 천지와 수륙에 존재하는 모든 고혼(孤魂)의 천도를 위해 지내는 의례로 개인 천도의 성격을 띤 영산재에 비해 공익성이 두드러지는 불교 의례이다. 조선초기부터 국행 수륙재로서 대규모로 설행되어 왔던 사실이 ‘조선왕조실록’을 비롯한 문헌에 나타나 있다.서울 진관사는 조선시대에 왕실 주도의 대규모 수륙재를 주로 담당했던 중심 사찰이었고 의식, 설단, 장엄 등 수륙재의 여러 분야에 대한 전승이 이루어지고 있다./사진-문화재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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