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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궐이야기 52] 왕-신하와 백성이 교감하는 창경궁의 외전/창경궁(4)
  • 박광준 기자
  • 등록 2024-03-09 08:47:44
  • 수정 2024-04-15 17:45: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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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홍화문-옥천교-숭문당-함인정

[박광준 기자] 왕의 혼례는 중요한 국가 행사 중 하나였다. 정전인 명정전에서는 66세의 영조가 15세의 정순왕후를 맞이하는 가례식이 치러지기도 했다. 영조와 정순왕후의 가례식은 ‘영조정순왕후가례도감의궤’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모든 궁궐 마당에는 시냇물이 흐른다. 법전이 있는 궁궐의 안쪽과 외부의 공간을 구분하는 역할을 하며, 궁궐 뒤의 산과 짝을 이루어 좋은 운을 불러들이는 길지가 되라고 궁궐 앞쪽에 일부러 낸 물길이다. 이를 ‘금천’이라 부른다. 


창경궁의 금천은 옥천이라 부르는데, 이 옥천에 놓인 다리가 옥천교이다. 나쁜 기운이 궁궐로 넘어오지 못하돍 옥천교 무지개 사이에는 도깨비 얼굴을 새겼다. 앵두나무, 자두나무, 살구나무 등이 활짝피는 옥천교 주변의 봄 풍광이 매우 화사하다.


조선시대에 왕이 백성을 만나는 일은 흔치 않았다. 그러나 창경궁 홍화문 앞에서는 달랐다. 홍화문 앞에서 영조는 균역법에 대한 찬반 여부를 백성에게 직접 물었고, 효심 깊은 정조는 어머니 혜경궁 홍씨의 회갑을 기념해 백성에게 손수 쌀을 나누어 주면서 기쁨을 함게 했다. 


# 창경궁의 정문 홍화문(弘化門)



홍화문은 창경궁의 정문이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중층 우진각지붕으로 동쪽을 향해 있고, 문 왼쪽인 서북쪽 모서리에 계단이 있어서 위층으로 오르내릴 수 있다. 명정문은 흥화문과 같이 동향을 했는데, 명정전으로 이어지는 동서 중심축 선상에 정확하게 놓이지 않고, 남쪽으로 약 1.2m 벗어나 있다.



문의 좌우에 연결된 동행각을 명정문에 맞추어 배치했기 때문에, 행각으로 둘러싸인 명정전 앞뜰은 반듯한 사각형이 아니라 약간 기울어진 모습을 하고 있다. 행각은 2칸 폭의 복랑이고, 경복궁의 것에 비해 높이가 낮다. 정문으로 성종 15년(1484)에 세웠으나 임진왜란 때 불타 광해군 8년(1616)에 다시 지었다. 정면 3간 측면 2간 중층 우진각지붕의 건물로 창덕궁의 정문인 돈화문과 비슷한 모습을 이루고 있다.



본래 석조기단을 만들고 그 위에 초석을 놓았는데, 지금은 기단이 땅에 묻혀 있다. 다듬은돌초석 위에 두리기둥을 세웠는데, 앞과 뒤쪽은 평주이고 문짝을 단 중앙기둥은 아래위층을 두 기둥으로 연결해 고주를 이루고 있다. 이층 바닥은 마루를 깔고 앞뒤, 양옆에 창문을 내어 사방을 감시할 수 있도록 했다.



공포의 짜임은 다포식으로 외2출목 내3출목고, 쇠서는 날카로운 앙서로 되어 있고 안쪽은 교두형이다. 처마는 겹처마이고 용마루와 추녀마루는 양성을 했고, 용마루에는 취두를, 내림마루에는 용두를 놓았고, 또 잡상을 늘어놓아 장식했다.


# 자연수가 흐르는 다리 옥천교(玉川橋)




창경궁 금천 위에 놓은 금천교(禁川橋)로서 궁궐의 정문인 홍화문을 들어서면 마주하는 정전의 정문, 명전문 앞쪽에 자리 잡고 있다. 조선 성종 15년(1484)에 세운 것으로 생각된다. 




길이 9.5m, 폭 5.8m로, 개천의 중앙에 초석을 놓은 후 이 초석 위에 동서 양쪽으로 뻗은 홍예(아치)의 뿌리를 놓고 다른 쪽 뿌리는 개천 양쪽 바닥 끝에 놓아 두 개의 홍예를 형성했다. 이 홍예 위에 장대석들로 귀틀을 짜고 마룻널 모양의 판석을 귀틀 사이에 깔아 다리바닥을 형성했다.




다리의 양쪽에는 엄지기둥을 세우고, 이 엄지기둥 사이에 같은 간격으로 기둥을 세웠다. 기둥과 기둥 사이에 난간두겁대석을 끼우고, 이들 난간 두겁대와 기둥 사이에 하엽을 부조하고 안상을 파낸 넓은 판석을 끼워 마무리했다. 



다리의 양측 엄지기둥에는 서수(瑞獸)를 조각해 앉혔는데, 앞쪽의 두 마리는 서로 마주 보게 하고 안쪽 두 마리는 명정문 쪽을 바라보게 해 변화를 이루고 있다.


'조선고적도보'에 실린 옥천교# 창경궁의 편전 숭문당


창경궁의 편전으로, '숭문(崇文)' 뜻은 '학문(文)을 숭상(崇)한다'이다. 참고로 창덕궁 희정당의 원래 이름 역시 숭문당이었다. 현판 글씨는 영조가 직접 썼다.


성종 시기 창경궁 창건 때는 없었고, 임진왜란 이후 1616년(광해군 8년)에 창경궁을 복구할 때 처음 지었다. 이후 창덕궁 희정당처럼 왕이 좀 더 편한 분위기에서 국정을 돌보고 경연을 하는 공간으로 기능했다. 그러나 창경궁 자체가 공식적인 국사보다는 왕실 구성원들의 거주, 행사에 초점을 둔 궁이라 숭문당을 자주 활용하진 않았다. 



조선 후기 들어 공식 편전 문정전을 혼전으로 활용할 때, 숭문당을 곡하는 곳으로 많이 사용했다. 1830년(순조 30년) 화재로 불탄 후 1833년(순조 33년)에 재건해 오늘에 이른다.


명정전 뒤편으로 나있는 4칸의 복도를 거쳐 빈양문을 지나면 바로 숭문당이 나오며 문정전과도 담과 문의 구분 없이 바로 뚫려있다.


'동궐도'의 숭문당 영역. 제일 좌측에 있는 건물이 숭문당이다. 그러나 '동궐도'를 보면 조선시대 당시에는 다른 건물 영역과 분리하는 담과 문이 있었다. 하지만 일제 때 헐려 지금은 없는 것이다. 그래도 예전에 있던 담과 문도 굉장히 작고 낮은 크기였기에 붙어있다는 표현이 틀린 것은 아니다.



창경궁 중심축을 따라 동향했다. 정면 4칸, 측면 4칸으로 정면(동쪽 면) 기준 앞면과 뒷면(서쪽 면), 남쪽 측면 가장자리의 바닥은 툇마루이다. 정면부 기단을 뒤로 물리고 대신 앞쪽의 1열을 돌 기둥으로 세워 누 처럼 보이게 했는데 이는 17세기 건축을 대표하는 양식 중 하나로 꼽힌다. 뒷 부분은 평범하게(?) 기단을 쌓고 주춧돌을 받쳤다.


지붕은 팔작지붕, 처마는 홑처마에 공포는 초익공 양식으로, 용마루와 내림마루, 추녀마루는 기와로 마감하고 용두와 취두를 올렸으나 잡상은 놓지 않았다. 기둥은 네모나고 단청은 긋기단청을 해 소박한 느낌을 주었다. 정면의 바깥 면엔 창문과, 문, 벽을 두지 않아 외부와 통해있다. 


그리고 기둥 사이마다 난간을 설치했고, 정면과 남쪽 측면이 만나는 툇마루 앞에 사다리를 놓아 통행할 수 있게 했다. 툇마루 안쪽에 벽과 문, 창을 설치했다. 각 칸의 바깥 면마다 중방을 놓았는데 정면 기준 왼쪽에서 3번째 칸을 제외한 나머지 칸은 중방 위가 벽이다.



왼쪽에서 1번째 칸은 중방 아래를 띠살문으로 두었고, 2, 4번째 칸은 문선을 세운 뒤 창을 놓았고 3번째 칸은 중방 위에 교창을, 아래를 띠살문으로 두었다. 남쪽 측면과 뒷면(서쪽 면)의 외부 역시 교창과 문인데, 문 창살의 경우 남쪽 측면의 동쪽 1칸만 띠살문이고 나머지는 전부 ‘정(井)’자 살이다. 


뒷면의 2번째 칸(뒷면에서 봤을 때 기준)의 툇마루는 밖으로 통하게 만들어 출입이 가능하다. 북쪽 측면의 중방 아래는 문이나 위는 교창이 아닌 나무 판이며, 남쪽 측면과 마찬가지로 동쪽 1칸만 띠살이고 나머지는 ‘정(井)’자 살이다.


실내는 툇마루를 제외한 남쪽과 북쪽에 각각 온돌방 2칸 씩 총 4칸이 있고 온돌방 사이에 대청을 두었다. 이렇게 대청을 중심으로 양 옆에 온돌을 둔 구조는 숭문당과 마찬가지로 일상 편전이었던 창덕궁 희정당, 경희궁 흥정당과 비슷하다. 



대청에 '일감재자(日監在玆)'란 게판이 걸려있다. '시경(詩經)'에 나오는 말로, 직역하면 '날(日)마다 보는 것(監)이 여기에(玆) 있다(在)'로, '하늘이 내려다보고 있으니 공경하는 마음을 잃지 말라'는 뜻이다. 제멋대로 행동하고 사치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걸었다고 한다.


# 궁궐의 누정, 영조의 어진 정치를 보여준 창경궁 함인정


창경궁 명정전 서북쪽에 있는 정자로, 임금이 신하들과 함께 경서를 읽거나, 국상 때에 향을 올리는 등의 용도로 사용됐다. 전각의 명칭인 함인(涵: 젖을 함, 仁: 어질 인)은 '인(仁)에 젖는다.' 라는 뜻이다.


성종 때 건립한 창경궁 인양전(仁陽殿)이 있었던 자리에 세워진 정자로, 인양전은 왕실에서 잔치나 연회를 베푸는 장소로 사용되던 전각이었다. 임진왜란을 겪으면서 인양전을 포함한 창경궁 전체가 모두 화재로 소실됐고, 1616년(광해군 8)에 중건됐다. 1624년(인조 2) 이괄의 난으로 인해 인양전.환경전.통명전.양화당 등 많은 건물이 소실됐다가 1633년(인조 11)에 중건했다. 이때 인양전 터에 함인정을 새로 지었다. 




1830년(순조 30) 대화재가 발생해 함인정을 비롯한 창경궁의 많은 전각이 다시 소실됐고, 1834년(순조 34)에 중건됐다. 1909년(순종 3) 일제는 창경궁 안의 전각들을 헐어버리고 동물원과 식물원을 설치했고, 강제로 한일병합조약(韓日倂合條約)이 이뤄진 이후인 1911년에는 창경궁을 창경원으로 격하시켰다. 이 과정에서 함인정 주변의 행각이 모두 철거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정면 3칸, 측면 3칸 규모의 건축물로, 일정한 길이로 가공한 장대석을 쌓아 3벌대의 기단을 만들었다. 방형의 주춧돌 위에 사각 기둥을 세우고 이익공 형식의 공포를 올렸고, 지붕은 팔작지붕으로 용마루, 박공마루, 추녀마루에는 기와를 얹어 마감했다. 



실내의 바닥은 전부 우물마루로 깔았다. 가운데 한 칸을 크게 하고 나머지 칸들을 툇마루처럼 만들었다. 높이 또한 가운데 칸이 다른 칸보다 높다. 가운데 칸의 천장에는 우물반자를 설치했으나, 나머지 주변 칸은 서까래와 구조들이 훤히 보이는 연등천장으로 만들었다.



가운데 칸의 도리 사방에는 사계절을 노래하는 시, '사시(四時)'가 현판으로 걸려있다. 각 계절이 상징하는 방위에 맞춰서 봄 시는 동쪽, 여름시는 남쪽, 가을 시는 서쪽, 겨울 시는 북쪽에 두었다.


하지만 1828년에서 1830년 사이에 제작한 '동궐도'를 보면, 남쪽을 제외한 나머지 3면에 창호 문을 달았음을 알 수 있고, 조선시대에는 함인정 주변에 행각과 담, 문이 있었으나, 현재는 사방이 뚫려있는 형태로 전하고 있다.


내전에 있는 정자 건물로, 건물 내부 상부 사방에는 도연명이 사계절을 소재로 해 지은 시 네구절이 현판으로 걸려 있다.


春水滿四澤(춘수만사택)봄의 물은 사방 연못 속에 넘치고

夏雲多奇峰(하운다기봉)여름에는 구름이 기이한 봉우리에 많다

秋月揚明輝(추월양명휘)가을 달빛 밝게 비치고

冬嶺秀孤松(동령수고송)겨울 산마루에 외로운 소나무가 빼어나다

정자인 함인정은 정면 3칸, 측면 3칸의 정사각형 평면 건물로 이익공(二翼栱)의 간결한 구조가 돋보인다./다음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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