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 메일전송
[서울시 구석 구석 288] 개화파 정치인-일제강점기 조선에서 활동한 계몽운동가이자 독립운동가 월남 '이상재' 동상
  • 우성훈 기자
  • 등록 2024-03-09 19:23:21
  • 수정 2024-04-10 23:27:50

기사수정

[우성훈 기자] 1850년 10월 26일 충청도 한산군 북부면 종지리(현 충청남도 서천군 한산면 종지리)에서 종9품 선공감 가감역관(繕工監假監役官)을 지낸 가난한 선비였던 아버지 이희택(李羲宅)과 어머니 밀양 박씨 사이의 아들로 태어났다.


1867년 과거 시험에 낙방한 후 개화파 박정양의 식객(食客)이 됐다. 박정양보다 8살 연하의 이상재는 처음에 나라의 여러 부패 문제 등을 두고 울분을 토하다 차츰 박정양의 신문물 이야기에 빠져들었다고 한다. 박정양은 1866년 과거에 합격해 막 승지일을 보고 있던 참이었는데 1880년까지 박정양의 옆에서 비서 아닌 비서로서 모시던 이상재는 박정양이 1881년 '조사시찰단'으로 도일하자 같이 일본에 갔다.


1884년 갑신정변이 일어나자 개화파들이 모두 실각했는데 김옥균의 당여인 급진 개화파들은 일소됐지만 갑신정변에 참여하지 않았던 개화당 인사들까지 모두 찍혔다. 당시 박정양은 한성부 좌윤(오늘날 서울특별시 부시장)을 거쳐 도승지(오늘날 대통령 비서실장)에 올랐었는데 고종을 김옥균 파에게 일시적이나마 뺏겼던 책임을 지고 모든 공직에서 물러났고 이상재 역시 서천으로 낙향했다. 


조정이 민씨 척족 등의 수구파 일색이 된 후에야 온건 개화파들이 조금씩 복귀할 수 있었다. 온건 개화파들은 구한말 국정에 참여는 했지만 청나라 양무운동 방식의 근대화를 밀어붙인 민씨 척족들과는 궤가 다르며 그들에게 눌려 있었다.


YMCA 청년회 사무를 보는 월남 이상재1887년 박정양이 '초대 주미 공사'에 재기용되자 박정양을 따라 그도 젊은 시절 미국에 가서 공사관 2등 서기관에 올라 첫 관직 생활을 경험했다. 그러나 박정양은 청나라의 압력으로 귀국해야 했는데 조선의 독자적인 외교 활동을 막기 위해 모든 대미 접촉을 청나라를 통해 하라는 약속(영약삼단)을 깨고 박정양이 미국 대통령을 만났기 때문이다. 이 때 귀국한 이상재는 다시 실각한 박정양 옆에서 야인 생활을 버텼다.


1894년 청일전쟁의 패배로 청나라가 쫓겨가고 일본에 망명 중이었던 박영효 등 급진 개화파들이 일본을 등에 업고 귀국하자 박정양과 함께 조정에 복귀했다. 갑오개혁 때 이상재는 학무국장 겸 학무아문 참의로서 '신교육령'을 반포시켰으나 갑오개혁은 결국 실패한다.


한성감옥에서의 사진(맨 왼쪽 서있는 사람이 이승만,앞줄 오른쪽 두 번째에 앉은 이가 이상재, 뒷줄 오른쪽 두 번째는 그의 아들)

1895년 일본이 삼국간섭으로 러시아에 뤼순항과 요동 지배권을 뺏기자 고종의 마음이 러시아로 기울었다. 1896년 아관파천으로 급진 개화파들은 다시 일본 망명길에 올랐지만 이상재를 비롯한 온건 개화파들은 수구당과 손을 잡고고종이 대한제국을 선포하는데 힘을 보탠다. 


그는 이 때 중추원 1등 의관, 의정부 총무국장 등을 지냈고 1896년 독립협회 출범 때는 물론 1898년 3월 '만민 공동회'와 10월 '관민 공동회'에 정부 측 인사로서 자리를 차지한다. 


1920년 11월 4일에 개최된 1920년 전국체육대회 개회식에서 이상재(우측)가 시구를 하는 모습

그러나 '독립협회가 군주제를 폐지하고 공화제를 꾀하고 있다'는 어용 단체 황국협회의 무고(익명서 사건)로 남궁억 등 16명과 함께 1898년 11월 체포됐다. 이 때 이승만이 배재학당 학생들을 이끌고 경무처와 평리원에 가서 밤샘 농성을 벌여 석방시켰다.


1902년 '개혁당 사건'으로 아들 이승인과 함께 3년형을 사는 동안 개신교로 개종했다. 이후 이승인이 옥 중에서 사망하는데 이 때 이승만이 준 성경을 읽고 '원수도 사랑하라'는 말에 원한맺힌 마음을 푼다. 이승만과는 이 때부터 사제 지간이 됐다고 한다.


서울특별시 종로구 종로 157에 위치한 사적 제125호 종묘 앞에 있는 한복 입은 동상의 주인공이 월남 이상재

1904년 러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하자 풀려나 곧바로 낙향한 그는 고향에 초갓집 교회를 열었고 '조선 기독교 청년회(YMCA)'에도 참여해 기독교 운동에 매진한다. 1905년 루즈벨트 대통령의 딸이 방한하자 맞이하는 자리에 함께 하면서 조선의 독립에 대해 미국에 설명하고 도움을 요청한다. 


그러나 미국은 이미 미서전쟁의 전리품인 필리핀의 지배와 북태평양 제해권을 러시아로부터 지키기 위해 일본과 동맹한 상태였다. 을사조약을 지켜본 그는 고종의 부름을 받고 잠시 의정부 참찬을 맡지만 곧 사직하고 낙향한다. 이 때 자신의 가장 큰 지지자이자 스승이면서 선배인 박정양의 죽음을 맞아 큰 슬픔에 빠지기도 했다.


서울특별시 종로구 종로 157에 위치한 사적 제125호 종묘 앞에 있는 한복 입은 동상의 주인공이 월남 이상재

1906년 조선에 은혜를 입은 일본인 소다 가이치를 기독교인이 되도록 전도하고 소다 가이치는 훗날 조선 아이들을 돌보고 조선의 독립 운동을 도우며 미쳐가는 자국에 맞서 조국의 악행을 회개하는 진정한 크리스천이 된다.


1910년 경술국치 후 대한제국이 망하고 일제 치하가 되자 관직을 버리지 않은 자들은 과거 친일 개화파였든 수구파였든 누구든 친일파로 변질되는데 이상재는 양심 인사로서 일체의 관직을 내려놓고 은거한다. 그러면서 그는 계몽 활동에 나서 교육자로서 길을 걷기 시작했다.



1919년 3.1 운동 때 이상재는 '민족 대표 33인'에 참여해달라는 요청을 받았으나 거절한다. 1921년에는 '조선교육협회' 회장이 됐고 1922년 '조선민립대학기성회'를 결성해 민립대학설립운동을 주도했고 1923년 현재의 보이스카우트 전신(前身)격인 '소년 연합 척후대'의 초대 총재가 됐다. 1924년 조선일보의 사장으로 부임했으나 늘 검소한 생활을 했다.


1927년 2월 좌우합작 항일운동단체였던 신간회 회장에 추대되었으나, 한달 뒤인 1927년 3월, 노환으로 사망했다. 장례는 '사회장(社會葬)'으로 열렸는데, 4남 중 3남이 모두 이상재 본인보다 먼저 세상을 떠난 상태였고, 유일하게 생존한 막내아들 이승준이 상주(喪主)를 맡았고, 유산으로는 미곡 27가마의 빚을 남겼다고 한다. 묘지는 처음에는 고향인 한산군 선여에 장지를 마련했다가 1957년 경기도 양주군 장흥면 삼하리(현 경기도 양주시 장흥면 삼하리)로 이장했다. 묘비는 변영로가 직접 썼다.


1927년 4월 7일, 이상재 사회장. 당시 그의 장례행렬은 수 많은 인파가 몰렸다.1962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대한민국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됐다.


서울특별시 종로구 종로 157에 위치한 사적 제125호 종묘 앞에 있는 한복 입은 동상의 주인공이 월남 이상재다. 2011년 7월 이상재의 육성을 녹음한 레코드판이 독립기념관에 기증되기도 했다./사진-우성훈 기자, 국가보훈부

0
  • 목록 바로가기
  • 인쇄


 한국의 전통사찰더보기
 박정기의 공연산책더보기
 조선왕릉 이어보기더보기
 한국의 서원더보기
 전시더보기
 한국의 향교더보기
 궁궐이야기더보기
 문화재단소식더보기
리스트페이지_004
모바일 버전 바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