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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궐이야기 49] 왕실 이야기 듣는 ‘창경궁(1)
  • 박광준 기자
  • 등록 2024-03-03 22:30:12
  • 수정 2024-04-25 09:00: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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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광준 기자] 서울은 아름답고 활기찬 도시이다. 짧은 기간 동안 큰 성장을 이룬 최첨단 도시이면서도, 전통과 현대가 멋진 조화를 이루고 있다. 궁궐은 서울에서 만날 수 있는 다양한 전통 문화 가운데 규모가 가장 크고 잘 보전된 문화유산이다. 


600여 년 전에 개국한 조선 왕조는 서울을 수도로 정했다. 서울은 수려한 산에 둘러싸여 있고 강과 하천이 흘러 사람이 생활하기에 편리하고, 한반도의 중심에 자리 잡아 한 나라의 수도로서 적합하게 여겨졌기 때문이다. 서울을 수도로 정한 뒤에는 곧바로 궁궐을 짓고 종묘와 사직을 세웠고, 도성과 성문 등 나라를 다스리기 위해 필요한 시설들을 마련했다. 서울은 이로부터 오늘날까지 600년이 넘게 우리나라의 중심도시가 되고 있다. 


창경궁 전경서울 도심에는 넓은 도로와 고층 건물이 가득하다. 하지만 백여 년 전만해도 서울은 왕과 왕실 가족이 거처하는 궁궐을 중심으로 나라의 모든 활동이 이루어지는 전통 도시였다. 최고의 인재와 물산이 궁궐과 왕실이 있는 서울로 모여 들었고, 이를 바탕으로 서울에는 품격 있는 왕실 문화가 발달했다. 


궁궐은 나라 경영의 중추가 되는 소중한 장소이다. 서울에는 경복궁, 창덕궁, 창경궁, 덕수궁, 경희궁 등 조선시대의 다섯 궁궐이 있다. 궁궐은 아니지만 왕실의 사당인 종묘도 조선 왕조의 정신적 근간으로서 궁궐 못지않게 중요시되었다. 이들 궁궐과 종묘는 한 나라를 상징하는 대표적인 장소이기에, 당대 최고의 규모와 기술로 지어졌다. 창덕궁과 종묘는 전세계가 주목하는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되어 있다. 


조선 왕조는 예의와 도덕을 숭상하면서 이로써 나라의 질서를 바로잡고자 하였고, 검소함을 소중하게 여겼다. 이러한 기본 정신은 궁궐 건축에도 잘 드러나 있다. 화려하지 않으면서도 위엄이 있고 절제된 아름다움은 경복궁을 비롯한 여러 궁궐에서 만날 수 있는 미덕이다. 


홍화문궁궐은 우리 역사에 크고 작은 영향을 미친 사건이 일어난 역사적 장소이자 왕과 왕실 사람들이 생활하며 희로애락을 담아낸 삶의 공간이다. 궁궐이 전하는 역사, 인물, 건축, 자연 등 숱한 이야기 속에는 우리 선조들이 오랜 역사와 삶 속에서 터득해낸 지혜와 슬기로움이 담겨 있다. 


언제 어느 때 찾아도 자연의 아름다움과 깊은 역사 전통의 향기를 전해주는 서울의 궁궐, 서울의 궁궐은 우리가 살아온, 도 오래도록 살아갈 터전 서울을 가장 서울답게 하는 자랑이요, 힘이다.


# 왕실 이야기 듣는 ‘창경궁’


옥천교




창경궁은 경복궁, 창덕궁에 이어 세 번째로 지어진 조선시대 궁궐이다. 조선 왕조는 건국 초기부터 경복궁을 법궁으로, 창덕궁을 보조궁궐로 사용하는 양궐 체제를 이어왔다. 그러나 역대 왕들은 경복궁보다는 창덕궁에 거처하는 것을 더 좋아했고, 왕실 가족이 늘어나면서 차츰 창덕궁의 생활공간도 비좁아졌다. 이에 성종이 왕실의 웃어른인 세조 비 정희왕후, 예종 비 안순왕후, 덕종 비 소혜왕후 등 세 분의 대비가 편히 지낼 수 있도록 창덕궁 이웃에 마련한 궁궐이 창경궁이다. 


창경궁은 왕이 정사를 돌보기 위해 지은 것이 아니라 생활 공간을 넓힐 목적으로 세워졌고, 또한 애초 궁궐로서 계획된 것이 아니라 태종이 세종에게 왕위를 물려준 뒤 살았던 수강궁에 몇몇 전각을 보태어 새운 궁궐이다. 따라서 경복궁이나 창덕궁과 비교해볼 때 그 규모나 배치 등에 다른 점이 많다. 


명정전우선 창경궁은 전각의 수가 많지 않고 규모가 아담하다. 공간의 구조와 배치도 경복궁처럼 평지에 일직선의 축을 이루도록 구획된 것이 아니라 창덕궁처럼 높고 낮은 자세를 거스리지 않고 언덕과 평지를 따라가며 터를 잡아 필요한 전각을 지었기에 좀 더 자유로운 분위기이다. 정조가 어머니 혜경궁 홍씨를 위해 지은 자경전도 언덕에 지어졌다. 


창경궁의 도 다른 독특함은 조선시대 다른 궁궐과 주요 전각들이 남향으로 지어진 것과 달리 동쪽을 바라보고 있는 점이다. 창경궁의 경우 정문인 홍화문과 정전이 명정전은 동쪽을 향하고, 관청 건물인 궐내각사와 내전의 주요 전각들은 남쪽을 향해 있다. 남.서.북쪽이 구릉이고, 동쪽이 평지인 지세라서 이를 거스리지 않았기 때문인 것으로 짐작된다.


문정전왕실 가족의 생활 공간으로 발전해온 궁궐이기에 내전이 외전에 비해 상대적으로 더 넓은 것도 창경궁의 특색이다. 따라서 창경궁에는 왕들의 지극한 효심과 사랑, 왕과 세자의 애증, 왕비와 후궁의 갈등 등 왕실 가족 사이에 일어나 이야기도 풍부하게 전해온다. 세간에 널리 알려진 장희빈과 인현왕후, 영조와 사도세자의 이야기도 사건이 일어난 현장인 창경궁에서 들으면 더 생생하게 들린다. 


창덕궁과 함께 ‘동궐’로 불렸던 창경궁은 서쪽으로 창덕궁과 맞닿아 있고, 남쪽으로는 낮은 언덕을 지나 역대 왕과 왕비의 신주를 모신 종묘와 이어져 본래 한 영역을 이루었다.  


# 왕과 신하와 백성이 교감하는 –외전

‘맑은 물 흐르듯 바른 정치를 바라다’


숭문당창경궁은 왕실이 웃어른을 편안히 모시기 위한 궁궐로 지었기 때문에 정치 공간인 외전보다는 생활공간인 내전이 더 넓고 발달했다. 창경궁의 외전은 다른 궁궐과 달리 동쪽을 바라보고 있으며, 규모도 아담하고, 조정에 이르는 문의 수도 적다. 


명정전은 임진왜란 후광해군이 창경궁을 중건할 때 지은 그대로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다. 단층 지붕에 아담한 규모이지만, 궁궐의 정전가운데서는 가장 오래되었다. 명정전 주위에는 왕이 일상 업무을 보았던 문정전, 독서하거나 국사를 논하던 숭문당이 자리 잡고 있다. 창경궁 외전이 전체적으로 동향인 것과 달리 문정전은 남향하고 있다. 



왕의 혼례는 중요한 국가 행사 중 하나였다. 정전인 명정전에서는 66세의 영조가 15세의 정순왕후를 맞이하는 가례식이 치러지기도 했다. 영조와 정순왕후의 가례식은 ‘영조정순왕후가례도감의궤’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모든 궁궐 마당에는 시냇물이 흐른다. 법전이 있는 궁궐의 안쪽과 외부의 공간을 구분하는 역할을 하며, 궁궐 뒤의 산과 짝을 이루어 좋은 운을 불러들이는 길지가 되라고 궁궐 앞쪽에 일부러 낸 물길이다. 이를 ‘금천’이라 부른다. 


자경전터창경궁의 금천은 옥천이라 부르는데, 이 옥천에 놓인 다리가 옥천교이다. 나쁜 기운이 궁궐로 넘어오지 못하도록 옥천교 무지개 사이에는 도깨비 얼굴을 새겼다. 앵두나무, 자두나무, 살구나무 등이 활짝 피는 옥천교 주변의 봄 풍경이 매우 화사하다.


조선시대에 왕이 백성을 만나는 일은 흔치 않았다. 그러나 창경궁 홍화문 앞에서는 달랐다. 홍화문 앞에서 영조는 균역법에 대한 찬반 여부를 백성에게 직접 물었고 효심 깊은 정조는 어머니 혜경궁 홍씨의 회갑을 기념해 백성에게 손수 쌀을 나누어 주면서 기쁨을 함께했다/사진-박광준 기자, 다음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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