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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궐이야기 42] 왕과 왕비의 침소 ‘강녕전과 교태전’
  • 이승준 기자
  • 등록 2023-12-17 06:58:42
  • 수정 2024-04-15 17:37: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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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준 기자] ‘3문3조’의 마지막 권역인 연조공간은 왕과 왕비의 생활공간으로 내전 또는 침전이라고 한다. 왕과 왕비의 공간을 강녕전과 교태전으로 나눴다. 이는 양반가옥에서 사랑채와 안채를 나눈 것과 마찬가지이다. 외부인과 접촉이 많을 수밖에 없는 강녕전에는 대청 앞에 넓은 월대가 있어 크고 작은 행사장으로 사용했고, 교태전에는 월대가 없는 대신 행각들이 모두 연결돼 많은 시녀와 함께 생활하는 왕비의 복잡한 안살림을 엿볼 수 있다. 그래서 왕의 공간인 강녕전은 정면 열한 칸의 독립건물로 장중한 인상을 주고, 왕비의 공간인 교태전은 단아한 아름다움과 함께 행각으로 이어진 아늑한 분위기가 있다. 


강녕전과 교태전 건물에는 용마루가 없다. 왕은 곧 용을 상징하기 때문에 건물 자체가 용이 깃들어 있는 곳으로 용마루에 앉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는 창덕궁 대조전과 창경궁 통명전 등 왕과 왕비의 침전을 공통적으로 나타나 있다. 


강녕전과 교태전 건물에는 용마루가 없다. 왕은 곧 용을 상징하기 때문에 건물 자체가 용이 깃들어 있는 곳으로 용마루에 앉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는 창덕궁 대조전과 창경궁 통명전 등 왕과 왕비의 침전을 공통적으로 나타나 있다. 


강녕전과 교태전은 완전히 분리되어 있어 강녕전 뒤로 돌아가면 교태전으로 들어가는 솟을 대문인 양의문이 있고 대문 양날개로 펼펴진 담장에는 주황빛 전돌로 반듯하게 쌓아올린 굴뚝이 있다. 굴뚝에는 ‘천세만세’ ‘만수무강’이라는 글자무늬가 새겨져 있다.


# 경복궁 강녕전


사정전 뒤편에 위치한 임금의 침전(寢殿)으로, 왕이 일상을 보내던 공간이다. 전각의 명칭인 '강녕(康寧)'은 <서경(書經)> 홍범구주(洪範九疇)에 나오는 오복(五福)에서 따왔고 '근심 걱정 없이 안녕함'이라는 뜻이다. 전각의 이름은 정도전(鄭道傳, 1342~1398)이 지었고, 현판의 글씨는 1995년 강녕전을 복원할 때 서예가 김응현(金膺顯. 1927~2007)이 썼다. 


1395년(태조 4) 경복궁 창건 당시에 처음 지어진 전각으로, 임진왜란 이전까지 왕의 침전과 각종 연회 장소로 사용됐다. 1553년(명종 8) 경복궁에 발생한 화재로 소실됐다가 다음 해에 중건됐고, 이후 임진왜란을 겪으면서 경복궁과 함께 완전히 소실됐다. 1867년(고종 4) 경복궁을 중건하면서 강녕전도 새로 지어졌으나, 1876년(고종 13) 화재로 다시 소실됐고, 1888년(고종 25)에 다시 복원했다. 강녕전이 복원된 이후에는 주로 외국 공사를 접견하거나 연회의 장소로 활용됐다.



일제강점기에는 화재로 소실된 창덕궁의 내전을 복구하기 위해 강녕전을 해체해 창덕궁 희정당의 부재로 사용했고, 이후 강녕전 터는 빈 터로 남게 됐다.


1990년대 들어서 경복궁 복원 사업이 본격적으로 진행됐다. 역사바로잡기의 일환으로 1996년에 조선총독부 청사를 철거하고, 훼손된 경복궁의 전각들을 복원했다. 경복궁 1차 복원 사업은 1990년부터 2010년까지 21년 동안 진행됐는데, 강녕전 및 침전 권역 복원은 1995년에 완공되어 일반에 공개됐다.


정면 11칸, 측면 5칸 규모의 건축물로, 일정한 길이로 가공한 장대석을 쌓아 월대와 기단을 만들었다. 방형의 주춧돌 위에 사각 기둥을 세우고 그 위에 이익공 형식의 공포를 올렸다. 지붕은 팔작지붕으로 용마루는 없고, 박공마루, 추녀마루에는 회반죽을 발라 양성바름을 했고, 용두와 잡상 등을 설치해 지붕 위를 장식했다. 양 측면의 툇마루 부분은 장주초석을 세워 마치 누각처럼 보이게 했다. 강녕전의 내부는 중앙에 정면 3칸, 측면 3칸의 대청이 놓여있고, 대청을 중심으로 양쪽에 정면 3칸, 측면 3칸의 온돌방을 두었다.



강녕전과 교태전은 완전히 분리돼 있어 강녕전 뒤로 돌아가면 교태전으로 들어가는 솟을 대문인 양의문이 있고 대문 양날개로 펼펴진 담장에는 주황빛 전돌로 반듯하게 쌓아올린 굴뚝이 있다. 굴뚝에는 ‘천세만세’ ‘만수무강’이라는 글자무늬가 새겨져 있다.


전각의 명칭인 '강녕(康寧)'은 ‘서경(書經)’ 홍범구주(洪範九疇)에 나오는 오복(五福)에서 따왔으며 '근심 걱정 없이 안녕함'이라는 뜻이다. 전각의 이름은 정도전(鄭道傳, 1342~1398)이 지었고, 현판의 글씨는 1995년 강녕전을 복원할 때 서예가 김응현(金膺顯. 1927~2007)이 썼다. 


1395년(태조 4) 경복궁 창건 당시에 처음 지어진 전각으로, 임진왜란 이전까지 왕의 침전과 각종 연회 장소로 사용됐다. 1553년(명종 8) 경복궁에 발생한 화재로 소실됐다가 이듬해에 중건됐고, 이후 임진왜란을 겪으면서 경복궁과 함께 완전히 소실됐다. 1867년(고종 4) 경복궁을 중건하면서 강녕전도 새로 지어졌으나, 1876년(고종 13) 화재로 다시 소실됐고, 1888년(고종 25)에 다시 복원하였다. 강녕전이 복원된 이후에는 주로 외국 공사를 접견하거나 연회의 장소로 활용됐다.


# 경복궁 연생전


경복궁 강녕전의 서남쪽에 위치한 강녕전의 부속 전각으로 임금의 보조 침전으로 사용됐다. 전각의 명칭인 '연생(延生)'은 '생명의 기운을 맞이한다'라는 뜻으로 '봄'을 의미하고, 정도전(鄭道傳, 1342 ~ 1398)이 지었다. 강녕전 서쪽에 위치한 경성전과 좌우 대칭을 이루고 있고, 경성전(慶成殿)의 이름은 '한 해 농사의 결실을 기뻐한다'라는 뜻으로 '가을'을 의미한다. 



1394년(태조 3) 경복궁 창건 당시 처음 지어진 건축물이다. 1553년(명종 8) 경복궁에 발생한 화재로 소실됐다가 이듬해에 중건됐고, 이후 임진왜란을 겪으면서 경복궁과 함께 완전히 소실됐다. 1867년(고종 4) 경복궁을 중건하면서 연생전도 새로 지어졌으나, 1876년(고종 13) 경복궁 화재로 다시 한번 소실됐다가 1888년(고종 25)에 복구됐다. 이후 1917년 화재로 훼손된 창덕궁을 복구할 때 경복궁의 전각을 사용하게 되면서 1920년 연생전은 또 다시 철거됐다. 1990년대 들어서 경복궁 복원 사업이 본격적으로 진행됐고, 1995년 경복궁의 침전 영역과 함께 연생전은 다시 복원됐다.



# 경복궁 연길당


경복궁 강녕전의 동쪽에 위치한 전각으로 소주방에서 만들어진 수라상 음식를 임금에게 올리기 전 데워 올리는 중간 부엌으로 사용됐다. 경복궁 내 임금의 처소인 강녕전에 딸린 부속건물이고, 강녕전 서쪽에 위치한 경복궁 응지당과 좌우 대칭을 이루고 있다.


1867년(고종 4) 경복궁을 중건하면서 지어진 건물이다. 1876년(고종 13) 경복궁 화재로 소실됐으나, 1888년(고종 25)에 재건됐다. 이후 1917년 화재로 훼손된 창덕궁을 복구할 때 경복궁의 전각을 사용하게 되면서 1920년 연길당은 다시 철거됐다. 1990년대 들어서 경복궁 복원 사업이 본격적으로 진행됐고, 1995년 경복궁의 침전 영역과 함께 다시 복원됐다.


정면 4칸, 측면 3칸 규모의 건축물로 일정한 길이로 가공한 장대석을 쌓아 기단을 만들었다. 방형의 주춧돌 위에 사각 기둥을 세우고 그 위에 물익공 형식의 공포를 올렸다. 지붕은 팔작지붕으로 망새와 용두, 잡상 등을 설치해 지붕 위를 장식했다. 서쪽 2칸은 대청으로, 동쪽 2칸은 온돌방으로 이뤄져 있고, 앞면 서쪽 3칸에는 툇마루를 두었다. 연길당의 서쪽 측면에는 문이 설치되어 있는데, 이는 과거에 연길당과 강녕전이 복도각으로 이어졌음을 보여주는 흔적이다.



사람들은 양의문 양옆에 있는 이 굴뚝이 당연히 안채인 교태전의 굴뚝인 줄 알고 지나가지만 이는 앞건물인 강녕전의 굴뚝을 여기까지 빼낸 것이다. 


또한 교태전 뒤쪽으로 돌아서면 홀연히 아름다운 꽃동산이 나타난다. 아미산 화계(花階)라고 불리는 이 꽃동산은 여성적인 공간이다. 아미산 화계는 경회루에 연못을 만들면서 퍼낸 흙을 모아 가산을 만들면서 네 개의 꽃계단으로 축조했다. 그래서 꽃계단, 화계라 부른다. 화계에는 모란, 진달래, 국화, 앵두, 미선나무 등이 예쁜 꽃과 아담한 나무로 꽃밭을 이루고 석분에 올라앉은 괴석과 수련을 담은 석조 같은 식물이 배치됐다.


# 경복궁 경성전


경복궁 강녕전의 서남쪽에 위치한 강녕전의 부속 전각으로 임금의 보조 침전으로 사용됐다. 전각의 명칭인 '경성(慶成)'은 정도전(鄭道傳, 1342 ~ 1398)이 지었고, '한 해 농사의 결실을 기뻐한다' 즉 '가을'을 의미한다. 강녕전 동쪽에 위치한 연생전과 좌우 대칭을 이루고 있으며, 연생전(延生殿)의 이름은 '생명의 기운을 맞이한다'라는 뜻으로 '봄'을 의미하고 있다. 현판의 글씨는 1995년에 서예가 양진니(楊鎭尼, 1928 ~ 2018)가 썼다.



1394년(태조 3) 경복궁 창건 당시 처음 지어진 건축물이다. 1553년(명종 8) 경복궁에 발생한 화재로 소실됐다가 이듬해에 중건됐고, 이후 임진왜란을 겪으면서 경복궁과 함께 완전히 소실됐다. 1867년(고종 4) 경복궁을 중건하면서 경성전도 새로 지어졌으나, 1876년(고종 13) 경복궁 화재로 다시 한번 소실됐다가 1888년(고종 25)에 복구됐다. 이후 1917년 화재로 훼손된 창덕궁을 복구할 때 경복궁의 전각을 사용하게 되면서 1920년 경성전은 또다시 철거됐다. 1990년대에 경복궁 복원 사업이 본격적으로 진행됐고고, 1995년 경복궁의 침전 영역과 함께 경성전은 다시 복원됐다.


경성전은 정면 7칸, 측면 4칸 규모의 건축물로, 일정한 길이로 가공한 장대석을 쌓아 기단을 만들었다. 방형의 주춧돌 위에 사각기둥을 세우고 그 위에 익공 형식의 공포를 올렸다. 지붕은 팔작지붕으로 용마루와 박공마루, 추녀마루에는 회반죽을 발라 양성바름을 했고, 망새와 용두, 잡상 등을 설치해 지붕 위를 장식했다. 전각의 중앙에는 대청마루를 두었고, 양옆으로 온돌방을 설치했다.


# 경복궁 교태전


경복궁 강녕전 뒤편에 위치한 왕비의 침전(寢殿)으로, 왕비가 일상을 보내던 공간이다. 전각의 명칭인 '교태(交泰)'는 <주역(周易)>의 64괘 중 11괘인 '태괘(泰卦)'의 '천지교태(天地交泰)'에서 유래한 것으로, '하늘과 땅의 기운이 조화롭게 화합하여 만물이 생성한다.'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현판의 글씨는 완림군 이재원(李載元,1831 ~ 1891)이 썼다. 



세종대에 지어진 전각으로, 조선 초기에는 왕비의 침전이 아닌 왕이 신하들과 정사를 논의하고 연회를 베푸는 공간으로 사용됐다. 1553년(명종 8) 경복궁에 발생한 화재로 소실됐다가 이듬해에 중건됐고, 이후 임진왜란을 겪으면서 경복궁과 함께 완전히 소실됐다. 1867년(고종 4) 경복궁을 중건하면서 교태전도 새로 지어졌고, 이때부터 교태전이 왕비의 침전으로 사용되기 시작했다. 1876년(고종 13) 화재로 다시 소실됐으나, 1888년(고종 25)에 다시 복원했다. 일제강점기에는 화재로 소실된 창덕궁의 내전을 복구하기 위해 교태전을 해체해 창덕궁 대조전의 부재로 사용했다. 


1990년대 들어서 경복궁 복원 사업이 본격적으로 진행됐다. 역사바로잡기의 일환으로 1996년에 조선총독부 청사를 철거하고, 훼손된 경복궁의 전각들을 복원했다. 경복궁 1차 복원 사업은 1990년부터 2010년까지 21년 동안 진행됐는데, 교태전 및 침전 권역 복원은 1995년에 완공되어 일반에 공개됐다.


정면 9칸, 측면 4칸 규모의 건축물로, 일정한 길이로 가공한 장대석을 쌓아 기단을 만들었다. 방형의 주춧돌 위에 사각 기둥을 세우고 그 위에 이익공 형식의 공포를 올렸다. 지붕은 팔작지붕으로 용마루는 없고, 박공마루, 추녀마루에는 회반죽을 발라 양성바름을 했고, 용두와 잡상 등을 설치해 지붕 위를 장식했다. 기단의 양 끝에는 작은 초록색 문이 설치돼 있는데, 문 안에는 아궁이가 위치한다. 교태전의 내부는 중앙에 정면 3칸, 측면 2칸의 대청이 놓여있고, 대청을 중심으로 양쪽에 정면 2칸, 측면 2칸의 온돌방을 두었다. 



# 경복궁 아미산 굴뚝


원유(苑囿)를 구성하는 요소 중의 하나이다. 아미산은 중국 쓰촨성(四川省)에 있는 이름난 산으로, 저장성(浙江省)의 보타산(普陀山), 안후이성(安徽省)의 구화산(九華山), 산시성(山西省)의 오대산과 함께 중국 불교 4대 명산의 하나이다. 여기서는 그 이름을 상징적으로 붙인 것이다.


인접한 경회루의 연못을 파면서 그 흙을 이용해 아미산을 쌓았다. 파낸 흙으로 가산을 쌓는 일거양득의 이와 같은 방식은 조원의 일반적인 기법으로 우리 나라에서도 곳곳에서 찾아볼 수 있고, 중국의 대표적인 경우로 북경(北京) 이화원(頤和園)의 곤명호(昆明湖)와 만수산(萬壽山)이 그 좋은 예이다.



아미산의 정상부는 비교적 평평하면서 동서로 길게 뻗어서 교태전 일곽의 맨 뒷부분에 해당하는 담장이 능선을 따라 거의 일직선으로 지나가고 있다. 이 담장 아래로 화계(花階)를 만들어서 후원을 구성했는데, 화계의 석축은 2단으로, 각 단은 4단씩의 장대석을 쌓았다. 그 높이는 3척을 기준으로 했고 첫째단과 둘째단의 간격이 넉넉하여서 전체적으로 완만함을 느끼게 한다.





화계에는 석분(石盆)과 석련지(石蓮池)를 여러 개 배치하고 괴석을 놓거나 수련을 심고, 주위에는 여러 가지 화초를 심었는데 특히 덩굴류의 화초를 많이 심었다. 또한 교태전의 구들과 연결된 굴뚝은 모두 네 개로 아미산을 아름답게 장식하고 있다.


화계의 석축이 동서로 길게 뻗어서 강한 수평선을 이루고 있는데, 상단의 석축은 화초나 석분 등으로 가려 석축이 갖는 딱딱한 느낌을 줄였고, 하단은 덩굴류의 화초를 간간이 심어 아래로 늘어지게 함으로써 길게 뻗은 장대석의 단조로움을 덜어 주고 있다. 뒷담 아래 제일 높은 언덕에는 비교적 키가 큰 나무를 심어 아늑한 맛을 느끼도록 처리하는 등 중궁전의 후원답게 아기자기한 기교를 부렸다.




경복궁 교태전 뒤편 아미산에 설치된 굴뚝 4기이다. 1867년(고종 4) 경복궁을 중건하면서 왕비의 침전인 교태전도 새로 지어졌는데, 이때 교태전 뒤편의 작은 언덕 아미산을 화원으로 조성하고, 이곳에 굴뚝 4기를 설치했다.


화강석 받침돌 위에 황토색 벽돌을 30단으로 쌓아 만든 육각형의 굴뚝이다. 굴뚝의 높이는 약 260cm이고, 굴뚝 한 면의 폭은 88cm이다. 굴뚝의 각 면에는 두루미.박쥐.봉황.대나무.매화 등의 문양을 장식했고, 굴뚝의 상부에는 기와로 지붕을 올렸다. 각각의 지붕 위에는 연기가 빠져나오는 연통 4개를 설치했는데 이는 교태전의 아궁이와 연결되어 있다.


경복궁 아미산 굴뚝은 경복궁 자경전 십장생굴뚝과 함께 조선시대 궁궐에 있는 가장 아름다운 작품으로 평가받고 있다. 1867년 중건 당시의 원형이 잘 보존되어 있어 1985년 1월 8일 제811호로 보물로 지정됐다. 



일제강점기에는 화재로 소실된 창덕궁의 내전을 복구하기 위해 강녕전을 해체해 창덕궁 희정당의 부재로 사용했고, 이후 강녕전 터는 빈 터로 남게 됐다.


1990년대 들어서 경복궁 복원 사업이 본격적으로 진행됐다. 역사바로잡기의 일환으로 1996년에 조선총독부 청사를 철거하고, 훼손된 경복궁의 전각들을 복원했다. 경복궁 1차 복원 사업은 1990년부터 2010년까지 21년 동안 진행됐는데, 강녕전 및 침전 권역 복원은 1995년에 완공되어 일반에 공개됐다.


1890년대에 그려진 ‘북궐도형(北闕圖形)’과 같은 때 편찬된 ‘궁궐지’ 등을 토대로 중건된 교태전의 규모 및 배치형식을 알 수 있고, 더구나 ‘조선고적도보(朝鮮古蹟圖譜)’에는 1920년 당시의 사진과 평면도가 실려 있어서 원형을 추정하는 것이 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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