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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궐 이야기 41] 동.서양이 만난 정자 ‘정관헌’
  • 이승준 기자
  • 등록 2023-12-07 10:12:21
  • 수정 2024-04-15 17:35: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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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준 기자] 함녕전과 덕흥전 뒤쪽 높은 지대에는 널찍한 화계가 쌓여 있고, 이 꽃계단에는 아담한 자태의 소나무와 장식무늬가 새겨진 굴뚝이 서 있어, 조선 궁궐 정원의 품격을 한껏 자랑한다. 꽃담 사이에는 유현문(惟賢門)이라는 근대식 벽돌 기와 나들목이 있다.


화계 맨 위쪽에는 정관현(靜觀軒)이라는 근대식 정자 건물이 있다. ‘조용히 관조하는 집’이라는 이 양관은, 러시아 건축가 사바틴이 설계한 1900년경 건립된 것으로 추측된다.



정관헌을 건축한 사바틴은 우리나라 근대 건축의 개막을 알려준 러시아인 건축기사로, 서재필은 ‘독립신문’에서 그를 스위스 건축기사로 소개했지만 실제로 그는 우크라이나 귀족 출신이다. 사비틴은 상트페테르부르크 왕립예술아카데미에서 일반인을 대상으로 하는 1년짜리 코스를 수료하고 러시아 해군 양성소에 입교해 항해사가 되어 블라디보스토크의  극동 함대로 임관했다. 1883년 24세 때 조선의 외교 고문이던 뮐렌도르프에게 토목기사로 고용되어 조선에 들어와 조선에서 처음 맡은 임무는 영조교사(營造敎士)로서 벽돌을 만드는 가마를 짓는 임무였다.




이후 제물포에 정착한 그는 인천해관청사(1883)를 지은 후 인천항 부두(1884), 인천 만국공원(오늘의 자유공원, 1888), 러시아공사관(1890), 독립문(1897), 경복궁 관문각(1892), 덕수궁 정관헌 등 수많은 서구식 근대건축물을 설계했다. 


그는 고종의 지우를 얻은 뒤 조선의 유력 인사들과 친분을 쌓았고 1895년 을미사변 당시 명성황후가 쓰러지는 모습을 직접 보았던 증인 중 한 사람이다. 그는 영어를 익혀서 영국 신문의 극동특파원을 겸임하기도 했고 중국 심양의 북대하(北戴河) 등지에서 주택개발사업을 벌이다, 1905년 러일전쟁 직후 신경쇠약에 걸려 블라디보스토크로 떠난 이후, 시베리아와 우랄 지방 곳곳을 방황하다 1921년 사망했다고 한다. 




여기서 다시 정관헌에 대해 살펴보자. 정관헌은 서양 파빌리온풍이지만 북쪽은 벽으로 막히고 궁궐이 내다보이는 동서남 3면은 열린 개방형 구조이다. 3단의 넓은 돌축대 위에 정면 7칸, 측면 5칸의 나무기둥 열주(列柱)가 날개를 펴고 있다. 그 안쪽에 로마네스크 양식의 인조석 기둥을 세워 넓은 베란다가 생겨 안쪽 공간을 보호하고 있다. 안쪽 주두엔 코린트식 꽃무늬가 장식돼 있고 바같 기둥 위쪽에는 청룡, 박쥐, 꽃병 등의 전통 문양이 새겨져 있다.


고종은 여기에서 외교관을 맞이하기도 했고 화가를 불러 자신을 그리게도 했고 음악을 감상하면서 다과와 커피도 즐겼다고 한다. 서구 문화에 관심이 많았던 고종은 아관파천 때 러시아공사관에서 커피를 즐겼다고 한다. 당시 커피는 양탕(洋湯)이라고 불렸다. 커피맛을 잘 알았던 고종은 1898년 평소와 맛이 다른 것을 알고 곧장 뱉어버렸다. 이 사건이 바로 김홍륙이 고종에게 앙심을 품고 커피에 독을 탔던 커피 독살 미수 사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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