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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전통사찰 114] 많은 문화재와 역사적 전통성 지닌 비구니 스님들의 수행도량 '보문사'
  • 이승준 기자
  • 등록 2023-10-14 07:30:54
  • 수정 2024-04-02 04:41: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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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준 기자] 서울의 전통사찰로 등록된 보문사는 서울특별시 성북구 보문동에 위치하고 있고 고려 예종 10년(1115)에 담진국사(曇眞國師)에 의해 창건됐다.


특히, 퇴경 권상로(退耕 權相老, 1879~1965)가 저술한 ‘퇴경전서-보문사일신건축기(普門寺一新建築記)’에는 옛 부터 비구니스님들이 상주하면서 국가의 안녕과 왕실의 번성을 기원하는 비구니 사찰로 기록하고 있다. 


그 사이의 내용은 전해지지 않다가 2017년 극락보전 중수 불사를 진행하던 중 온전한 상태의 상량문이 발견돼 역사적 사실이 입증됐다. 지금의 형태를 갖추게 된 극락보전은 건륭12년(1747. 조선 영조 23년) 최초 중건됐고, 도광4년(1824. 순조 24년) 1차 중수, 동치4년(1865. 고종 2년)에 2차 중수됐음이 밝혀졌다. 


퇴경전서에 의하면 1826년에 수봉법총(秀峰法聰)스님이 만세루를 신축했고, 1827년에 정운(正雲)스님이 좌우 승당을 건축했다고 한다. 1842년에는 영전(永典)스님이 만세루를 수리하고, 1872년에 금훈(錦勳)스님이 좌우 승당을 중수했다고 전하고 있다.


극락보전 상량문의 발견으로 보문사는 1800년대부터 줄곧 비구니 스님들이 상주하면서 수행.정진했다. 특히 동치4년 상량문에서는 왕실발원 사찰로 조선왕조의 왕실의 시주를 받아 불사를 진행하고 후궁과 상궁 등 궁인에서부터 사대부, 평민에 이르기까지 불사에 동참했음을 보여주고 있다. 



또 상량문과 함께 그 어느 건축물에서도 찾아보기 힘든 상량복장물도 함께 발견돼 문화재적 가치뿐만 아니라 역사성과 전통성을 모두 갖춘 총본산으로서의 면모를 확인하는 기회가 됐다. 이와 함께 보문사에는 왕실에서 하사한 연(輦)수식과 인로왕번(引路王幡)을 비롯해 조선 후기에 제작한 석가불도, 신중도, 지장보살도 등 서울시 유형문화재, 조선 전기에 제작된 묘법연화경이 국가지정문화재로 지정돼 있다. 그 밖에도 다수의 유.무형의 문화재들이 남아있다.


보문사에는 조선후기부터 불리워 온 탑골승방이라는 별칭이 있다. 조선후기 한양지도인 ‘수선전도(首善全圖)’에도 승방(僧房)으로 기록돼 전해지고 있다.


탑골승방은 서울의 낙산 아래 동망봉을 경계로 청룡사, 미타사 등 비구니 도량이 군집해 있어 생긴 이름이다. 보문사는 옥수동의 두뭇개승방, 석관동의 돌곶이승방, 숭인동의 새절승방(청룡사)과 함께 비구니 스님들이 거처하는 성 밖의 네 니사(尼寺)중 하나로, 단종의 왕비 송씨와 연관된 동망봉과 청룡사, 미타사가 이웃해 있어 이곳이 왕비와 후궁들의 기도처 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사진-보문사 홈페이지 캡처보문동이란 동명(同名) 또한 보문사에서 유래됐다. 보(普)는 몸체에 온갖 덕을 갖춘 것을 말하고, 문(門)은 쓰임이 나타나는 곳을 말한다. 따라서 보문은 곧 보살이 일체의 성덕(性德)을 모두 갖춘 상태에서 기회와 시기를 따라 그 묘용을 보임을 말하는 것으로 관세음보살의 넓은 구세화신(救世化身)의 원력행을 말한다. 1980년 7월 서울특별시조례에 의해 보문제1동과 보문제2동이 통폐합돼 보문동으로 조정돼 오늘에 이른다.


일제 강점기에는 절이 황폐할 지경에 이르렀는데 광복과 함께 주지 은영스님이 취임하면서 30여 년간을 불사의 중흥과 건물 중창에 전력해 대사찰의 면모를 갖추었다. 은영스님은 석굴암을 비롯한 많은 건축물을 새롭게 짓고, 보문종이라는 독립된 종단을 설립함으로써 비구니스님들만의 고유한 수행 풍토를 유지하고자 했다. 


또한, 보문사는 세계 유일의 비구니 종단인 대한불교보문종의 총본산이자 수사찰(首寺刹)로 도심 속에 큰 숲을 품고 있고, 어른 스님때부터 전해져 내려오는 스님들의 범패(梵唄)는 예로부터 알려진 무형자산이다. 비구니 스님들의 수행처인 만큼 정갈하고 단아한 가람. 그리고 정적인 분위기가 느껴지는 수행도량으로 많은 참배객과 외국인들이 찾아오는 관광의 명소이기도 하다. 보문사 대중스님들은 한국 불교 발전을 위해 포교, 사회복지, 교육 활동에 오늘도 전념하고 있다.


# 극락보전(極樂寶殿)


지금의 극락보전은 줄곧 대웅전으로 불려지다가 2017년 중수 불사를 진행하던 중 온전한 상태의 상량문이 발견돼 옛 이름을 다시 찾게 됐다.


왜 극락보전이 대웅전으로 불려 지게 됐는지 그 이유는 정확히 알 수는 없다. 직전의 대웅전 편액은 근대의 서화가인 해강 김규진(海岡 金奎鎭, 1868~1933)의 글씨로 극락보전 뒷편에 걸려 있다.



상량문에 의하면 지금의 형태를 갖추게 된 것은 건륭12년(1747. 조선 영조 23년) 최초 중건됐고, 도광4년(1824. 순조 24년) 1차 중수, 동치4년(1865. 고종 2년)에 2차 중수됐음을 알 수 있다. 이로 인해 보문사 극락보전은 서울 지역 불교건축 중 가장 이른 시기에 건축된 불교 건축물임과 동시에 예로부터 비구니스님들이 상주하면서 수행 정진한 도량임이 증명됐다. 


특히, 상량문과 함께 그 어느 건축물에서도 찾아보기 힘든 상량복장물도 함께 발견돼 문화재적 가치뿐만 아니라 역사성과 전통성을 모두 갖춘 총본산으로서의 면모를 확인하는 기회가 됐다.


극락보전은 팔작지붕 형태로 정면 3칸, 측면 2칸의 규모이다. 내부에는 서방정토 극락세계의 주존불이신 아미타불과 대세지보살, 관세음보살을 좌우 협시보살로 모시고 있다. 후불탱화는 영산회상도로 부처님께서 인도 영축산에서 법화경을 설하시는 장면을 도설화한 그림으로 동치6년(1867) 금어(金魚 - 불화를 그리는 사람의 총책임자) 경선응석(慶船應釋) 스님이 그린 석가불도(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98호)와 호법신장(護法神將)을 그린 신중탱화(제99호)가 봉안 됐다. 내부 불단의 구조는 뒷벽에서 약간 앞으로 나와 있어 부처님을 중심으로 사방을 돌면서 참배할 수 있는 전형적인 전통사찰의 면모를 보여주고 있다.


# 석굴암(石窟庵)


보문사에서 가장 주목되는 것은 바로 이 석굴암이다.



보문사 석굴암은 삼각산 자락의 암산을 살려 조성한 인공석굴로 경주 석굴암(국보 제24호)을 모본으로 조성했다. 1970년 3월에 시작해 23개월 동안 진행됐고, 호남지방의 화강석과 경기석 등 총 2,400톤의 화강석이 사용됐다. 주불은 15톤의 원석으로 제작됐고, 높이는 3.38미터이다. 전체적인 것은 경주 석굴암의 문이 정면에 하나인데 비해서 이곳은 세 곳의 문을 두었고 경주 석굴암 전실에 있는 팔부신장이 생략됐다.


석굴암 내부 성현(石窟巖 內部 聖賢)의 배치는 본존불을 기준으로 좌로부터 제석천왕 - 문수보살 - 다문제일아난존자 - 십일면관세음보살 - 설법제일부루나존자 - 해공제일수보리존자 - 두타제일가섭존자 - 신통제일목건련존자 - 지혜제일사리불존자 - 보현보살 - 대범천왕 순(順)이며, 위 감실 안의 좌상은 좌로부터 다보탑 - 선의보살 - 바수밀보살 - 동자보살 - 정취보살 - 외도보살 - 비구보살 - 미륵보살 - 장자보살 - 석가탑 순이다.


그리고 외부 입상은 좌로부터 나라연금강 - 다문천왕 - 증장천왕 - 광목천왕 - 지국천왕 - 밀적금강 순이다.


# 묘보탑(妙寶塔)/부처님 진신사리 봉안탑




석굴암이 있는 왼쪽 산자락에 자운(慈雲) 율사께서 스리랑카에서 모셔온 부처님의 치아(齒牙) .정골(頂骨)등 진신사리 3과가 봉안된 구층석탑 묘보탑(妙寶塔)이 자리하고 있다.


보문사 팔각 구층 사리석탑은 월정사 구층탑을 모본으로 해 1977년도 동원정사 신축공사 직후 조성하기 시작해 1979년 완성했다. 탑신은 위로 올라 갈수록 점점 좁아진다. 노반(露盤), 복발(覆鉢), 앙화(仰花), 보륜(寶輪), 보개(寶蓋), 수연(水煙) 등은 모두 석재로 만들었고 하단에는 팔정도를 뜻하는 팔엽화(八葉花)가 조각돼 있다.


# 산령각(山靈閣)



석굴암 오른쪽에는 산신과 독성님을 함께 봉안한 산령각이 자리한다.


산신은 불교가 전래되기 전에 많이 믿던 토착신으로 산지가 70%나 되는 한국에서는 삼국시대부터 조선말에 이르기까지 산신신앙이 널리 유행했다. 이 산신은 불교에 수용되면서 호법신중(護法神衆)의 하나로 자리 잡았고, 보문사에서 가장 명당이라는 이곳에 은영스님이 1963년에 건축해 지금까지 불자들의 귀의처가 되고 있다.


# 선불장(選佛場)


1958년 조성된 선불장은 앞면 5칸, 옆면 3칸의 팔작지붕 건물로 상하2층 205평의 건물이다.


사진-보문사선불장이란 장래의 부처가 될 수행자들이 모여 공부하는 곳으로써 “부처를 선발하는 자리“란 뜻으로 주로 강당이나 요사로 사용된다. 보문사 선불장은 건축당시에는 아래층에는 ‘보문강원(普門講院)’을 윗층에는 수선안거를 위한 ‘선방(禪房)’으로 사용했다. 건축당시 보문사 대중은 200여명에 달했는데 이 곳 선불장에서 아침, 저녁 발우공양을 했고 조석예불 후에는 전 대중이 참선정진을 했던 이름 그대로 선불장이었다. 


특히, 절 안의 대소사(大小事)나 대중공사 등을 행했던 큰방 역할을 하던 곳이다. 지금의 선불장은 1층은 종단 유지법인인 재단법인 사무국과 보문종 총무원, 보문사 종무소가 위치하고 있고, 2층 법당은 대중 법회장소로 사용하고 있다. 법당 내부에는 석가모니불을 주존(主尊)으로 모시고 신중탱화와 칠성탱화를 봉안해 인등을 밝히고 있다.


# 삼성각(三聖閣)


삼성(三聖)은 칠성(七星), 독성(獨聖), 산신(山神)을 뜻한다.


칠성은 인도 혹은 중국의 북두칠성을 숭배하는 도교신앙이 불교에 융합돼 나타난 것으로 치성광여래와 칠원성군, 삼태육성이 일반 민중을 보살피고 극락으로 인도한다고 믿는 것이다.



독성은 나반존자라고도 하는데 천태산에서 홀로 깨달음을 얻은 성자를 말한다. 또 산신은 산지가람이 대부분인 우리나라 사찰에서 오래 전부터 신앙됐고, 호법신중의 하나로 인식되어 왔다.


안에 봉안된 칠성탱화의 조성연대는 1874년으로 비단에 바탕채색을 하고 가부좌를 한 본존여래를 중심으로 좌우 칠여래와 그 밖의 권속들이 에워싼 구도이다. 붉은색과 녹색이 주로 사용됐고 중간의 금니(金泥)가 곳곳의 화사함을 더해주고 있다.


# 관음전(觀音殿)



극락보전 위쪽 언덕에 위치한 관음전에는 여인의 인자하고 정숙한 모습의 관세음보살을 봉안하고 있다.


후불탱화인 관음탱화에는 관세음보살님으로 좌측에 남순동자 우측에 해상용왕이 관세음보살을 좌우보처로 보좌하고 있다. 관음탱화는 서울시 지정문화재로 지정된 극락보전의 후불탱화인 영산회상도와 같은 시기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될 정도로 그 그림의 섬세 수려함이 정말 아름답다.


# 묘승전(妙勝殿)



묘승전은 팔작지붕으로 정면 4칸, 옆면 2칸의 건물이다. 근대의 양식을 갖추고 있으며, 지금의 묘승전은 법준스님이 중건했다. 안에는 1867년에 조성된 지장탱화(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100호)가 봉안돼 있고, 비교적 상세한 화기(畵紀)도 함께 기록되어 있어 당시의 보문사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된다.


묘승전의 지장탱화는 구도에서 매우 독특한 면을 보여주고 있는데, 화면 중앙에 커다란 원을 그리고 그 안에 지장삼존을 묘사하고 있어 눈길을 끈다. 커다란 원 좌우에는 도명존자와 무독귀왕을 그리고 위, 아래 두 줄로 시왕을 나눠 배치했고, 위와 아래 네 곳에는 석류를 비록한 지물을 지닌 동자, 동녀를 각각 배치했고, 아래쪽에는 판관, 녹사, 우두와 마두, 나찰, 사자 등이 역시 위, 아래 두 줄로 대칭을 이루면서 서있다.



색상은 붉은색이 주조를 이루고 있으나, 인상적인 것은 화면 중앙에 지장삼존불을 감싸고 있는 전신광의 역할을 하는 커다란 원 안에 칠해진 금니이다.


이 탱화는 조선후기 지장탱화 가운데서 구도의 특이함이나 시왕의 복색 등 여러 면에서 특색이 있는 작품으로 주목된다. 또한 1916년에 조성된 신중탱화 그 외에 현왕탱화, 그리고 근대의 화승(畫僧)인 금어(金魚) 만봉(萬奉)스님이 그리신 아미타 후불탱화, 감굴탱화가 봉안돼 있다.


# 시왕전(十王殿)




시왕전은 사람이 죽은 뒤에 죄와 복을 다스리는 열 분의 대왕님을 모신 당우이다.


1970년에 조성된 시왕전에는 지장보살상과 청동 부조(浮彫)로 모신 지장탱, 시왕탱이 좌우벽면을 감싸고 있다. 각 시왕도 하단에는 지옥장면도 도설화 되어있어 권선징악(勸善懲惡)과 연기법을 그림으로 법문하고 있다. 법당 출입구쪽에는 부조로 금강역사(인왕상) 사자(使者)가 조성돼 명부(冥府)세계를 표현했다.


시왕사상은 본래 인도의 토속신앙이었던 염라대왕이 중국의시왕신앙과 융화돼 이뤄진 것인데 시왕탱화는 바로 그 시왕을 불화의 형식으로 그린 것이다.


# 보광전(普光殿)




1970년에 조성된 보광전은 본래 만세루(萬歲樓)였으나 지금은 법당으로 사용하고 있다.


하지만 보통의 누각이 목조건물로 조성되는데 보광전은 누각의 형식을 취한 법당의 건물로 조선시대 후기에 조성한 아미타불과 후불탱화, 신중탱화가 봉안되어 있다. 법당과 누각을 합성해 조성되어 동, 서, 남, 북 모든 문을 개방할 수 있어 예수제 등 큰 행사에는 함께 사용하기도 한다.


# 만불전(萬佛殿)



만불전은 동원정사 5층에 조성된 당우이다.


동원정사는 1977년 은영스님이 지었는데, 1996년 서울특별시 도시계획사업으로 현재의 위치에 다시 준공됐다. 이때 ‘1인 1원불(願佛) 모시기 운동’의 하나로 만불전을 조성하게 됐다. 안에는 삼존불(석가모니불, 문수보살, 보현보살)을 봉안했고, 불단 뒤로는 만분의 불상이 자리한다. 서울 안 사찰 중에는 이곳처럼 만불이 조성된 경우가 드물어 만불전의 의미는 더욱 깊다고 하겠다.


# 심우당




기존에 있던 심우당을 보수 공사해서 2008년에 스님들의 참선 수행을 위해 새롭게 조성된 당우이다.


‘심우(尋牛)’ 란 수행자가 수행을 통해 본성을 깨달아 가는 과정을 잃어버린 소를 찾는 일에 비유해서 10단계로 수행의 과정을 구분해 놓은 것이다.


# 보암당 은영큰스님 공덕비



보문사하면 은영스님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을 만큼 보문사뿐 아니라 역대 비구니계에 큰스님이다.


일제 강점기에 절이 황폐할 지경에 이르렀는데, 광복과 함께 주지로 취임하면서 30여 년간을 불사의 중흥에 전심해 대사찰의 면모를 갖추었다. 은영스님은 석굴암을 비롯한 많은 건축물을 새롭게 짓고, 보문종이라는 독립된 종단을 설립함으로써 비구니스님들만의 고유한 수행 풍토를 유지하고자 했다./사진-이승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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