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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전통사찰 112] 단종이 유배 갈 때 왕비 정순 왕후와 우화루(雨花樓).영리교(永離橋)에서 마지막 이별한 곳 '청룡사'
  • 박광준 기자
  • 등록 2023-10-03 12:46:56
  • 수정 2024-04-02 04:39: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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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광준 기자] 청룡사(靑龍寺)는 대한불교조계종 직할교구 조계사의 말사로, 종로구 숭인동에 위치한다. 922년(고려 태조 5)에 도선(道詵) 국사의 유언에 따라 태조 왕건이 어명을 내려 창건했다. 풍수지리적으로 한양의 외청룡(外靑龍)에 해당하는 산등에 지었다고 해 사호를 청룡사라 했다. 1036년(정종 2년)에 만선 비구니스님이 퇴락한 절을 창건 이후 처음으로 중창했고 이후에도 여러 차례 중창해 10차의 중창 역사를 갖고 있다. 1923년 다시 옛이름인 청룡사로 불리게 됐고 1950년대에 대대적인 중창이 있었고 1973년에 다시 중창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청룡사(靑龍寺)는 922년(태조 5) 도선(道詵, 827~898) 국사의 유언에 따라 왕명으로 창건됐다. 풍수지리적으로 한양의 외청룡(外靑龍)에 해당되는 산등성이에 지었다고 해 절 이름을 청룡사라 했다고 한다. 제1대 주지로 비구니 혜원(慧圓) 스님이 주석한 이래 줄곧 비구니 스님만이 주석한 것이 특색이다. 








고려에 와서는 1036년(정종 2)에 만선(萬善) 스님이 처음으로 중창했고 1158년(의종 12) 회정(懷正) 스님이 두 번째로 중창했는데, 이때 이 부근에서는 청룡사 동북쪽 고개 너머에 있는 보문사(普門寺) 창건 이후로 43년 만에 처음 세워진 절로 '새절 승방'이라고도 불렀다. 1299년(충렬왕 25) 중국 원나라의 침입으로 절이 황폐화되자 지환(知幻)스님이 중창했다. 고려 말에는 공민왕비 혜비(惠妃)가 머물렀다.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는 태조의 딸 경순 공주가 머물렀고, 1405년(태종 5) 무학(無學) 대사를 위해 왕명으로 중창했다. 창건 당시 도선 국사를 위해 창건한 이래 두 번째로 왕명에 의한 중창인 것이다. 이어서 1512년(중종 7)과 1624년(인조 2)에도 법공(法空)스님과 예순(禮順) 스님이 각각 중창했다. 1771년(영조 47)에는 단종의 왕비 정순왕후(定順王后, 1440~1521)가 이곳에 있었다 해 영조가 직접 '정업원구기(淨業院舊基)'라는 글을 내려 비석과 비각을 세우게 했는데, 이때 절 이름을 잠시 정업원이라 부르기도 했다. 이 비석과 비각은 현재도 절에 남아 있다. 1813년(순조 13) 화재로 소실됐으나 다음 해 묘담(妙潭).수인(守仁) 두 스님에 의해 중창됐고 1823년(순조 23) 왕명으로 다시 옛 이름인 청룡사로 고쳐 부르게 했다.




1902년(고종 6) 정기(正基).창수(昌洙) 스님이 중창했고, 1918년과 1932년에 상근(詳根) 스님이 중창했다. 근대에 와서는 1954년~1960년 사이에 윤호(輪浩) 스님이 전체적으로 대대적인 중창을 했고 대웅전은 다시 1973년에 중창, 오늘에 이르고 있다. 





청룡사는 왕실의 여인과 관계가 많은 곳이다. 앞서도 말했듯이, 고려 말의 명신 익재 이제현(李齋賢)의 딸이자 공민왕비인 혜비(惠妃)가 이곳에 거주했고, 또 조선 초 태조의 딸 경순 공주가 이곳으로 와 머무는 등 왕실과의 관계가 많았던 것이다. 특히 세조에 의해 폐위되고 강원도 영월까지 유배가 결국 그곳에서 죽게 된 단종(端宗, 1441~1457)은 유배 갈 때 왕비 정순 왕후와 이곳 우화루(雨花樓)와 영리교(永離橋)에서 마지막 이별을 하고, 이어 왕비는 영월이 있는 동쪽이 가장 잘 보이는 이곳 청룡사에서 스님이 된 비극이 서려있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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