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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전통사찰 110] 여주1경으로 꼽히는 천년 고찰 여주 '신륵사(2)'
  • 박광준 기자
  • 등록 2023-08-19 07:25:05
  • 수정 2024-04-02 04:38: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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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광준 기자] 신륵사 앞으로 흐르는 남한강 물줄기는 '여강'이라는 별칭을 갖고 있다. 여주군 점동면 삼합리부터 금사면 전북리까지 총 40여 킬로미터에 이르는 100리 물길을 여강이라고 한다. 


서거정은 여강에 대해 '월악에서 근원하여 (...) 섬강과 만나 달려 흐르며 점점 넓어져 여강이 되었다. 물결이 맴돌아 세차며 맑고 환하여 사랑할 만하다'고 했다. 


충주 쪽에서 흘러오는 남한강 본류가 원주 섬강의 물을 받으면서 장하게 불어나 도도한 강물로 신륵사를 지나 이천 쪽으로 돌아가는 것을 말한 것이다. 여강이란 이름은 여주의 옛 이름인 황려에 뿌리를 두고 있다.


고려시대 문인인 이규보의 증언에 의하면 영웅스러운 기상을 갖고 있는 신기한 두 말이 물가에서 나왔는데 한 마리는 누런 황마였고 또 한 마리는 검은 여마였단다. 그래서 고을 이름이 황려로 되었고 이것이 또 여주와 여강이라는 이름을 낳은 것이라고 했다. 


여강은 고려시대부터 남한강에서 가장 아름다운 곳으로 손꼽혀왔다. 여말선초의 이규보 이색 정도전 권근 서거정 같은 당대의 명류가 여기서 운치 있는 뱃놀이를 하고 아름다운 시를 남기면서 더욱 유명해졌다. 이후 조선 후기에도 무수한 문인 묵객이 여강의 아름다움을 노래했다. 


여강 쪽에서 가장 아름다운 곳은 신륵사이고 신륵사에서 가장 풍광이 수려한 곳은 강변의 정자인 강월헌이다. 본래 정자란 그 건물의 생김새보다도 자리앉음새에 의미가 있다. 


# 강월헌



강월헌은 고려 말의 고승인 나옹선사의 당호에서 딴 이름이다. 나옹선사가 신륵사에서 입적한 후 추모의 뜻을 담아 세운 정자가 강월헌이다. 원래 강월헌은 삼층석탑 바로 곁에 있었는데, 1972년의 대홍수로 정자가 떠내려가버리자 약간 자리를 이동해 지금의 자리에 철근콘크리트로 다시 세운 것이다. 


강월헌 정자에 올라가면 멀리서 굽이쳐 흘러오는 남한강 물줄기가 펼쳐치고 강 건너 은모래 백사장을 감싸안은 강마을의 평화로운 모습이 다가온다. 뛰어난 풍광 때문에 인기리에 방영된 바 있는 TV 드라마 '추노'에서 죄의정 이정식(김용수 분)이 도망친 노비를 잡는 추노꾼인 이대길(장형 분)에게 거금을 내걸면서 송태호(오지호 분)를 잡아오라고 하는 장면을 이 신륵사 강월헌에서 찍기도 했다. 


특히 해 질 녁 강월헌에서 강물이 보랏빛으로 물들고 은은히 들려오는 신륵사 저녁 종소리를 들을 때면 차마 그곳을 떠나지 못한다. 그래서 여주8경에서 첫째로 꼽는 경치가 신륵모종, 즉 신륵사의 저녁 종소리다.


# 삼층석탑



강월헌 곁의 아담한 삼층석탑은 나옹선사가 입적하자 스님을 다비한 장소에 성스러움을 기리기 위해 세운 것이다. 신라 문무왕을 화장한 곳에 능지탑을 세웠던 예가 있듯이 얼마든지 가능한 일이다. 그리고 바로 곁에 정자를 짓고 나옹선사의 당호를 따서 강월헌이라고 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삼층석탑은 '강월헌 삼층석탑'이라고 불러야 맞다. 강월헌은 지금의 콘크리트 정자 대신 홍수에 떠내려간 목조 건축물로 삼층석탑 곁에 나란히 세워야 원래의 뜻에 맞다.


삼층석탑은 상륜부와 3층 몸돌을 잃어 볼품은 없지만 양식상으로 보면 2층 기단에 3층 구조를 한 고려 석탑이 분명하다. 그래서 여기에 올때면 저 허물어진 석탑을 다시 보수해 삼층석탑으로 제 모습을 찾아주고, 강월헌도 제자리를 찾아서 그 곁에 다시 새워야 한다. 


# 보제존자석종 승탑



나옹선사의 승탑은 절 북쪽의 낮은 언덕 조용한 소나무 숲에 안치되어 있다. 서남쪽으로 한강이 내려다 보이는 이 언덕은 명당으로 알려져 있다. 고려 말 불교를 중흥하고 고승으로 200여 명의 제자를 배출했던 나옹선사의 묘역은 그만큼 정성과 공력을 들여 마련한 흔적이 역력하다. 고려 우왕 5년(1379)에 만들었다고 하니 선사의 열반 후 3년에 걸친 대역사였다. 


나옹선사의 승탑은 팔각당이라는 기존의 형식을 버리고 석종이라는 새로운 양식을 취했다. 방형의 넓은 기단 위에 넓고 얇은 돌을 깔고 가운데에 이단의 받침대를 놓은 뒤 높이 1.6미터, 지름 1.1미터의 석종을 안치했다. 오른쪽 계단에는 간단한 조각이 조성돼 있고 묘역 전체에 넓고 얇은 돌을 깔았다.(‘보제존자 석종’, 보물 제228호) 



이 석종의 승탑은 위로 올라가면서 완만한 타원형을 이루며 어깨 부분에는 보주를 묘사하고 정상부는 4면으로 나누어 불꽃 모양을 새겼다.


석종 권역에는 이를 지키는 석등(보물 제231호)과 나옹선사를 기리는 비석(보물 제229호)이 함께 세워졌다. 이처럼 승탑.비.석등이 하나의 평면에 세트를 이루고 있는 것은 나옹선사 승탑이 처음이다. 그리고 비석과 석등의 형식도 파격적이다. 비석의 형식은 기존의 관행을 버리고 대리석 비석을 전각 모양으로 감싸듯 했고, 석등도 대리석에 붙박이창을 8곳에 내면서 아주 독특한 모습을 보여준다.  


# 보제존자석종비문



보제존자 석종의 비문은 당대의 문장가인 묵은 이색이 짓고 서예가로 이름 높은 한수가 썼다. 일을 맡은 각신 스님이 곡성부원군 염제신에게 묵은의 글을 받아달라고 부탁해 비문으로 새기게 됐다. 


비는 3단의 받침 위에 비몸을 세우고, 지붕돌을 얹은 모습이다. 받침부분의 윗면에는 연꽃무늬를 새겨 두었다. 대리석으로 다듬은 비몸은 양옆에 화강암 기둥을 세웠고, 지붕돌은 목조건물의 기와지붕처럼 막새기와와 기왓골이 표현돼 있다.


# 대장각기비



신륵사에 세워져 있는 비로, 극락보전 서쪽 언덕에 있었던 대장각(불경을 만들어 보관하던 곳)의 조성에 관한 여러 가지 기록을 적고 있다.


길쭉한 사각형의 바닥돌 위에 받침돌을 놓고, 그 위로 비몸을 세운 후 지붕돌을 얹은 모습으로, 비몸 양 옆에 돌기둥을 세워 비몸을 단단히 지탱하도록 하고 있다. 이렇듯 비몸 양 옆에 돌기둥을 세우는 형식은 고려 후기에 이르러 보이는 현상으로 주목되는 부분이다.



권주(權鑄 )의 글씨로 새긴 비문은 비몸이 크게 파손돼 전체의 내용을 파악할 수는 없다. 비문의 뒷면에는 불경(경률론)을 만들고 비석을 세우는데 참여한 사람들의 이름을 열거하고 있다.


비를 세운 시기는 고려 우왕 9년(1383)이다. 거북 모양의 비받침, 용의 머리가 새겨진 비머리가 고려 후기로 오면서 사각형 받침과 지붕 모양의 머릿돌로 간략화되는데, 이 비도 그러한 예이다.


# 보제존자석종 앞 석등



신륵사 서북쪽 언덕 위에 세워져 있는 8각 석등으로, 불을 밝혀두는 화사석(火舍石)을 중심으로 아래에는 세부분으로 이루어진 받침을 두고, 위로는 지붕돌과 머리장식을 얹은 모습이다.


받침에는 표면 전체에 꽃무늬를 가득 새겨 장식하고 있다. 화사석은 각 면에 무지개 모양의 창을 낸 후, 나머지 공간에 비천상(飛天像)과 이무기를 조각했다. 지붕돌은 두꺼우나 여덟 귀퉁이에서의 치켜올림이 경쾌하여 무거운 느낌을 덜어준다.



고려 우왕 5년(1379) 보제존자석종 및 석비와 함께 세워진 작품으로, 확실한 연대를 알 수 있는 귀중한 유물이며, 고려 후기의 대표적 양식을 보여주고 있다.


# 목조아미타여래삼존상


여주 신륵사 목조아미타여래삼존상은 보살상의 보관과 대좌가 후보(後補)된 것을 제외하곤 보존상태가 양호하다. 주존인 불상을 좌상으로 하고 협시상을 입상으로 한 구성은 고려시대부터 이어져 내려오던 전통이다. 불상과 보살상들은 모두 상호와 상체가 긴 편인데, 특히 불상의 육계는 유난히 길게 조성돼 이색적인 느낌마저 들게 한다. 불상의 큼직큼직한 나발과 단순하게 처리한 법의 자락은 조선초기부터 내려오던 특징이다.



불상의 눈언저리에 보이는 다크서클 같이 처리한 음영 기법이나 아래 입술을 도톰하게 만들어 처지게 표현한 것 등은 조각승 인일(仁日)과 수천(守天)의 조형 미감과 관련될 가능성이 있다. 보살상들은 조성발원문에서 기록된 바와 같이 조선시대 1610년에 조성됐는데, 1620년의 약수선원 보살입상(현 동국대박물관 소장)과 전체적으로 비슷한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다.


이들 보살상 중 좌협시보살상은 천의식으로, 우협시보살상은 대의식으로 법의를 착용하고 있다. 한편 좌협시보살상의 양쪽 어깨 위를 덮고 있는 머리카락의 표현법과 하반신 중앙에 타원형을 그리며 드리워져 있는 화려한 장엄, 우협시보살상의 보발이 귀 밑에서 정리되는 표현법 등은 가장 중요한 특징들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우협시보살상의 보발 장식은 경기도 광주 수도사 보살상과 서울 보문사 관음보살상과 유사한데, 이들 보살상 역시 17세기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신륵사 목조아미타여래삼존상은 조성자와 조성시기가 분명할 뿐만 아니라 인일이라는 새로운 조각승의 이름이 확인되어 향후 조선시대 불상 연구에 있어서 중요한 기준작이 될 것으로 판단된다.


# 극락보전 삼장보살도


경기도 여주시 신륵사 극락보전에 봉안된 조선 후기의 삼장보살도.


2013년 경기도 유형문화재로 지정됐다. 비단 바탕에 채색. 세로 173㎝, 가로 280㎝. 삼장보살도는 천장보살.지지보살.지장보살을 하나의 화폭에 그린 수륙재 불화이다. 신륵사 삼장보살도는 왕실 원찰의 불화답게 20명이나 되는 화승이 참여해 이전에 제작된 삼장보살도 내용을 모두 소화해 완성한 조선시대 삼장보살도의 모범이 되는 불화이다. 현재 신륵사 극락보전의 왼쪽 벽에 걸려있고 유리로 보호되어 있다.



가운데에 천장보살과 천선중(天仙衆)이 자리하고 향우측에 지지보살과 지기중(地祇衆)이, 향좌측에 지장보살과 명부중(冥府衆)이 배치됐다. 각 보살의 권속(眷屬)들은 자리를 옮기지 않고 제 자리에 있다. 각 권속들은 좌우대칭으로 서있지만 자세와 생김새와 시선을 조금씩 다르게 해 통일성을 유지하면서도 다양성이 있다. 완벽한 질서 안에 풍부한 변화가 있는 것이 이 그림의 특징이다.


지장보살은 왼손에 보주를 들고 육환장(六環杖)을 생략해 천장보살.지지보살과 자세와 수인(手印)이 똑같다. 삼장보살의 얼굴도 모두 같다. 합장한 무독귀왕(無毒鬼王)과 똑같은 모습으로 만들기 위해 도명존자(道明尊者)가 들어야 할 육환장을 빼버린 것 역시 동일화의 하나이다. 보살의 상호와 수인의 동일화는 지지보살의 권속들에게까지 확장됐다.


보살과 천(天)과 성중(聖衆)의 옷에 정교하고 다양한 금니 문양이 많고 수미단과 보살보관은 흰 문양으로 아름답게 장식했다. 녹색.연녹색.붉은색.황토색.청색 등 깊이 있고 깨끗한 색감을 사용했다.


완벽한 구성력, 생기 있는 필선, 권속의 좌우대칭, 신체의 알맞은 비율, 밝고 자신감 있는 표정, 다채로운 색의 조화 등을 두루 갖췄다.


신륵사 삼장보살도의 도상은 의겸(義謙)이 제작한 경상남도 고성 운흥사 삼장보살도(1730년)와 비슷하다. 보살과 천과 왕의 상호가 특히 그러한데 얼굴형과 눈.코.입의 묘사가 같다. 경기 지역의 신륵사 화승들은 최신 화풍을 운흥사 불화를 그렸던 의겸에서 찾은 것이다. 이것은 전라도에서 활동한 의겸 화풍이 경기 지역까지 영향을 미쳤다는 것을 말해준다. 신륵사 삼장보살도에 나타난 의겸 화풍은 충청북도 영동 영국사 삼장보살도(1773년)로 이어진다.


# 건륭38년명동종


경기도 여주시 신륵사길(천송동) 신륵사 대웅전에 소장된 조선시대의 종.

2013년 경기도 유형문화재로 지정됐다. 1773년(영조 49) 제작. 높이 93.6㎝. 한국 전통형보다는 중국종의 양식을 많이 반영한 작품으로서, 용뉴(龍鈕)는 하나의 몸체로 구성된 역동감 있는 쌍룡(雙龍)으로 구성했고 음통(音筒)은 없다.


종신(鐘身) 상부에 구획된 상대(上帶)에는 촘촘한 방형 구획으로 세분해 각 구획마다 범자문(梵字文)을 2단씩 빽빽히 시문했다.


상대 아래의 4방향에 배치된 연곽대(蓮廓帶)에는 도식적인 당초문과 연곽 안으로는 별형의 화문좌(花文座) 위에 돌기된 연뢰(蓮蕾)를 9개씩 장식했다.


그리고 이 연곽과 연곽 사이의 여백면에는 연화가지를 든 보살입상과 그 옆에 거치문(鋸齒文)의 원권(圓圈)으로 구성된 ‘唵(옴)’자의 범자문(梵字文)을 1조씩 사면에 배치했다.


하대는 종구(鐘口)에서 조금 위로 올라온 곳에 배치돼 그 내부에 연당초문(蓮唐草文)을 빽빽히 장식했다. 이 하대의 앞.뒤 방향으로 보살입상 옆에 배치된 ‘옴’자의 범자문과 동일한 장식문양을 첨가해 마치 당좌(撞座)처럼 꾸미고 있는 점이 흥미롭다.


신륵사의 창건설화는 신라시대 원효대사로 거슬러 올라가지만 그것은 설화일 뿐 현재 남아 있는 유물이나 기록으로 보면 고려시대 창건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신륵사는 절의 위성은 그리 높지 않았다. 고려시대 3대 선원였던 여주의 고달선원에 비하면 말사 규모라고나 할 위치였으나, 신륵사가 절로서의 명성을 얻게 된 것은 고려 우왕 2년에 나옹선사가 여기에서 열반해 승탑이 세워지면서부터 였다. 



나옹선사의 죽음으로 일약 유명해진 신륵사였지만 이내 고려왕조가 망하고 조선왕조가 들어서면서 주도적인 이데올로기가 유교로 대전환되면서 강력한 숭유억불 정책에 의해 쇠락의 길을 면치 못하고 폐사의 위기를 맞게 된다.


그러나 예종 1년(1469년) 경기도 광주 대모산에 있던 세종대왕의 영릉이 이곳 여주로 이장되면서 신륵사는 영릉의 원당 사찰로 지정돼 오히려 대대적인 중창을 하게 된다. 조선왕조가 불교를 배척하기는 했어도 죽음에 관한 한은 불교적 전통을 완전히 버릴 수 없었다. 때문에 훗날 세조의 광릉에는 봉선사, 성종의 선릉과 중종의 정릉에는 봉은사, 사도세자의 융릉과 정조의 건릉에는 용주사가 있듯 영릉의 지킴이 역할을 부여받았다. 




성종 3년(1472) 3월에 시작된 신륵사의 대규모 중수공사는 8개월 뒤인 10월에 200칸의 건물과 함께 완공됐다. 그리고 다음 해 대왕대비는 신륵사를 보은사로 고쳐 불렀다. 이러한 신륵사도 임진왜란의 병화를 피하지 못하고 소실됐으나, 현종 12년(1671) 무렵 다시 신륵사가 중수되기 시작했다. 


이후 영조 2년(1726)에는 동대에 있는 벽돌탑을 새로 고쳐 쌓았고, 영조 49년(1773)에는 범종을 주조했다. 이어 정조 21년(1797)부터 3년에 걸쳐 극락보전이 수리됐고, 결정적으로는 철종 9년(1858) 순조의 왕비인 순원왈후가 내탕금(판공비)를 내어 크게 불사를 일으켜 여러 전각과 요사체를 중수, 오늘의 신륵사에 이르는 모태를 완성했다.<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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