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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전통사찰 109] 여주1경으로 꼽히는 천년 고찰 여주 '신륵사(1)'
  • 박광준 기자
  • 등록 2023-08-04 09:58:56
  • 수정 2024-04-02 04:37: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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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광준 기자] 신륵사는 경기도 여주시 북내면 봉미산(鳳尾山)에 있는 삼국시대 신라의 승려 원효가 창건한 사찰로, 대한불교조계종 제2교구 본사인 용주사(龍珠寺)의 말사이다. 신라 진평왕 때 원효(元曉)가 창건했다고 하나 정확한 것은 알 수 없다. 절이름을 ‘신륵’이라고 한 것에 대해선 미륵(彌勒) 또는 왕사 나옹(懶翁)이 신기한 굴레로 용마(龍馬)를 막았다는 전설에 의한 것이라는 설이 있다.


그리고 고려 고종 때 건너편 마을에 나타난 용마가 걷잡을 수 없이 사나웠으므로 사람들이 잡을 수 없었는데, 이때 인당대사(印塘大師)가 고삐를 잡으니 말이 순해졌으므로, 신력(神力)으로 제압했다고 해 절이름을 신륵사라 했다는 설이 있다. 또한 이 절은 고려 때부터 벽절[甓寺]이라고도 불렸다. 이는 경내의 동대(東臺) 위에 '다층전탑'이 있는데, 이 탑 전체를 벽돌[塼]로 쌓아 올린 데서 유래한 것이다.


그러나 이 절이 대찰을 이루게 된 것은 나옹이 이곳에서 갖가지 이적을 보이면서 입적(入寂)했기 때문이다. 나옹이 입적할 때 오색 구름이 산마루를 덮고, 구름도 없는 하늘에서 비가 내렸고, 수많은 사리가 나왔고, 용(龍)이 호상(護喪)을 했던 일들이 그것이다. 3개월 뒤인 1376년(우왕 2) 8월 15일에 절의 북쪽 언덕에 정골사리(頂骨舍利)를 봉안한 부도를 세우는 한편 대대적인 중창이 함께 이뤄졌다.



이때 대전(大殿).조당(祖堂).승당(僧堂).선당(禪堂).종루(鐘樓).동익당(東翼堂).서익당(西翼堂). 남행랑(南行廊).향적당(香積堂) 등의 많은 건물이 신축되거나 중수됐다. 그리고 나옹의 진영(眞影)을 모시는 선각진당(禪覺眞堂)도 건립됐다.


또, 1382년에는 2층으로 된 대장각(大藏閣)이 건립되면서 간행한 대장경 1부를 봉안했다. 대장경 불사(佛事)를 발원한 것은 이색(李穡)의 아버지인 이곡(李穀)이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죽자, 이색이 그 뜻을 계승해 나옹의 제자들과 함께 간행했다. 신륵사의 승려 무급(無及)과 수봉(琇峯)이 중심이 되고 그 제자들이 전국으로 흩어져 시주를 모았는데, 200여 명이 이 불사에 참여했다.


이 중에는 각운(覺雲).신조(神照).자초(自超) 등의 고승들과 최영(崔瑩).조민수(曺敏修).최무선(崔茂宣) 등의 이름이 나타나고 있다. 1381년에 각주(覺珠)가 금자(金字)로 제목을 쓰고 각봉(覺峯)은 황복(黃複)을 만들었고, 12월에 성공(性空)이 함을 만든 뒤 1382년 정월에 화엄종 소속 사찰인 영통사(靈通寺)에서 교열한 다음 4월에 배에 실어 신륵사에 봉안했다.




또한, 대장각 안에는 대장경과 함께 권희(權僖)가 조성한 비로자나불상(毘盧遮那佛像)과 홍의룡(洪義龍)이 죽은 딸의 명복을 빌기 위해 조성한 보현보살상(普賢菩薩像), 그리고 강부인(姜夫人)이 시주를 얻어 조성한 문수보살상(文殊菩薩像)을 봉안했다.


조선시대에는 배불정책으로 이 절 또한 크게 위축됐다. 그러나 광주의 대모산(大母山)에 있던 영릉(英陵)이 여주로 이장된 1469년(예종 1)부터 왕실에서 신륵사를 영릉의 원찰(願刹)로 삼을 것을 결정했고, 1472년(성종 3) 2월에 대규모 중창불사가 시작돼 8개월 만에 200여 칸의 건물을 보수 또는 신축했다. 그 이듬해 대왕대비는 신륵사를 보은사(報恩寺)라고 개칭했다.


그 뒤 이 절은 사대부들이 풍류를 즐기는 장소로 전락했다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의 병화로 폐허가 됐다. 1671년(현종 12)에는 계헌(戒軒)이 중건했고, 1700년(숙종 26)에는 위학(偉學)과 그의 제자 우안(宇眼).천심(天心) 등이 삼존상을 중수했고, 이어서 1702년에도 중수했다. 1726년(영조 2)에는 영순(英淳) 등이 동대에 있는 전탑을 중수했는데, 당시에 세웠던 비가 지금도 남아 있다.







1796년(정조 20) 영돈녕 김이소(金履素)와 예조판서 민종현(閔鍾顯) 등이 중수를 시작해 이듬해 범중각(泛中閣).식당을 지었고, 가자첩(嘉資帖) 50여 장을 하사받았다. 1858년(철종 9)에는 순원왕후(純元王后)가 내탕전(內帑錢)을 희사해 불전(佛殿).선료(禪寮).종루 등을 중수했고, 1929년에는 주지 성인(性仁)이 명부전(冥府殿)을 중수했다.


현존하는 당우로는 금당(金堂)인 극락보전(極樂寶殿)을 중심으로 하여 조사당(祖師堂).명부전.심검당(尋劍堂).적묵당(寂默堂).봉향각(奉香閣).칠성각(七星閣).종각(鐘閣).구룡루(九龍樓) 등이 있다. 이 가운데 1985년 경기도 유형문화재로 지정된 극락보전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 다포집으로 1797년(정조 21)에 시작하여 1800년에 완공된 건물이다.


내부에는 2012년 보물로 지정된 여주 신륵사 목조아미타여래삼존상을 봉안했고, 1900년에 그린 후불탱화.신중탱화.감로탱화와 1908년에 조성한 지장탱화가 있고, 1773년(영조 49)에 주조한 범종(梵鐘)이 있다. 그리고 극락보전 정문 위에는 ‘千秋萬歲(천추만세)’라고 쓴 현판이 있는데, 나옹의 친필이라고 구전되고 있다. 이 현판은 입체감을 나타내고 있어 보는 위치에 따라 글씨가 달라 보이는 특이함이 있다.




1963년 보물로 지정된 조사당은 경내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로 중앙에 나옹, 좌우에 지공(指空)과 무학(無學)의 영정이 함께 봉안돼 있다. 정면 3칸의 맞배집인 명부전 내부에는 목조지장삼존(木造地藏三尊)을 비롯해 시왕상(十王像)과 판관(判官) 등 총 29구의 상이 봉안돼 있다.


적묵당은 선원(禪院) 구실을 한 건물이고, 심검당은 강원(講院) 구실을 하는 정면 6칸의 ㄱ자형 건물로 선각당(禪覺堂)이라고도 부른다. 그리고 심검당 바로 옆에는 극락보전의 분수승(焚修僧)이 거처하는 3칸의 봉향각이 있고, 봉향각 뒤쪽에는 칠성탱화와 산신탱화.독성탱화가 봉안된 칠성각이 있다.


이 밖에도 신륵사에는 대리석재의 다층석탑, 국내에서 유일하게 완성된 형태로 남아 있는 전탑인 다층전탑, 고려 말기의 대표적 부도양식을 띤 보제존자석종, 비천(飛天)과 용이 새겨져 그 형태가 매우 아름다운 석등, 1379년 나옹을 추모하기 위해 세운 보제존자석종비, 이색과 나옹의 제자들이 대장경을 보관하기 위해 대장각을 세운 연유를 기록한 대장각기비가 있으며, 모두 1963년 보물로 지정됐다.



또 절의 동쪽 강변 바위 위에는 삼층석탑이 있고, 경내의 서쪽 언덕에는 부도 2기가 있다. 삼층석탑은 나옹을 화장한 장소를 기념하기 위해서 세운 탑이고, 부도는 원래 조사당 뒤쪽에 있던 것을 1966년 11월에 현재의 위치로 옮겼으나 누구의 것인지는 알려지지 않고 있다.


이들 부도 중 둥근 탑신을 가진 부도는 근세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이면서, 8각 탑신을 가진 부도는 고려시대의 부도형식에서 퇴화된 여말선초의 작품으로 추정되는데, 이전할 때 사리함이 발견돼 현재 동국대학교 박물관에서 보관하고 있다.


또한, 나옹의 화장지에 세워진 삼층석탑 옆에는 강월헌(江月軒)이라는 6각의 정자가 있다. 그 전에 지어진 것은 1972년의 홍수로 떠내려가고, 그 뒤 삼층석탑보다 조금 아래쪽인 지금의 위치에 다시 세웠다. 누각의 이름인 강월헌은 나옹의 당호인데, 그를 추념해 이곳에 누각을 세운 것이다. 또한 구룡루는 1689년(숙종 15)과 1749년(영조 25), 1860년(철종 11)에 각각 중수된 기록이 있다.



신라 진평왕(眞平王) 때 원효(元曉)가 창건했다고 하나 확실한 근거는 없다. 고려 말인 1376년(우왕 2) 나옹(懶翁) 혜근(惠勤)이 머물렀던 곳으로 유명한데, 200여 칸에 달하는 대찰이었다고 하며, 1472년(조선 성종 3)에는 영릉 원찰(英陵願刹)로 삼아 보은사(報恩寺)라고 불렀다.


신륵사로 부르게 된 유래는 몇 가지 설이 전해지고 있다. 그 하나는 “미륵(혜근을 가리킴)이, 또는 혜근이 신기한 굴레로 용마(龍馬)를 막았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고려 고종 때 건너마을에서 용마가 나타나, 걷잡을 수 없이 사나우므로 사람들이 붙잡을 수가 없었는데, 이 때 인당대사(印塘大師)가 나서서 고삐를 잡자 말이 순해졌으므로, 신력(神力)으로 말을 제압하였다 하여 절 이름을 신륵사라고 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고려 때부터 벽절[甓  寺]이라 불려지기도 했데, 이는 경내의 동대(東臺) 위에 있는 다층전탑(多層塼塔)을 벽돌로 쌓은 데서 유래한 것이다.


이 절의 중요문화재로는 보물 제180호인 조사당(祖師堂), 보물 제225호인 다층석탑, 보물 제226호인 다층전탑, 보물 제228호인 보제존자석종(普濟尊者石鐘), 보물 제229호인 보제존자 석종비(普濟尊者石鐘碑), 보물 제230호인 대장각기비(大藏閣記碑), 보물 제231호인 석등이 있으며, 유형문화재로는 극낙보전(極樂寶殿) 과 그이외의 부속건물로 구룡루(九龍樓) ·명부전(冥府殿)·시왕전(十王殿)·산신당·육각정 등이 있다.


# 여주신륵사극락보전




경기도 여주시 북내면 신륵사에 있는 조선후기 에 중창된 사찰건물. 불전. 시도유형문화재.


1985년 경기도 유형문화재로 지정되었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 건물이다.


신륵사는 세종의 능인 영릉(英陵)의 원찰(願刹)로 지정되어 1472년(성종 3) 대규모의 중창불사를 시작해 면모를 일신하게 되었는데, 극락보전 역시 왕릉 원찰로 지정되면서 창건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현존 건물은 임진왜란 때 불타버린 것을 1800년(정조 24)에 다시 중창한 것이다.


극락보전은 비록 규모는 크지 않지만, 왕실의 원찰답게 부연(浮椽)을 달아 겹처마 지붕을 만들었고, 기둥 사이에도 공간포(空間包)를 올린 다포계(多包系) 구조의 화려한 건물이다. 공포(栱包)는 내4출목 외3출목 구성으로 집 규모에 비하여 과도할 정도이고, 쇠서[牛舌] 위에 연꽃봉오리들을 조각하는 등 화려한 모습이다.



긴 장대석을 3벌로 정연하게 쌓은 기단과 계단도 조선조 사찰건축에서는 보기 드문 고급의 기법들이다. 길게 뻗어 나온 지붕 네 귀퉁이의 추녀를 받치기 위해 가느다란 활주(活柱)를 시설하였다. 내부에는 목조의 아미타삼존상을 봉안하였는데, 본존의 높이는 1.5m, 협시보살상(脇侍菩薩像)은 2m이며, 1977년에 개금(改金)한 불상들이다.


후불탱화와 우측의 신중탱·감로탱은 모두 1900년 작이고, 좌측의 지장탱은 1908년에 제작된 작품이다. 법당 내부 천장은 우물천장이지만, 불단 상부에는 화려한 닫집을 짜아 내부의 장엄을 더했다. 극락보전 내부에는 건륭 38년(영조 49년, 1773년)의 명문이 새겨진 범종이 있다.


# 여주 신륵사 다층석탑 (驪州 神勒寺 多層石塔)







신륵사 극락보전 앞에 있는 탑으로, 기단(基壇)을 2단으로 마련한 후, 그 위로 여러 층의 탑신(塔身)을 세운 모습이다. 통일신라와 고려시대의 일반적인 석탑양식을 따르고 있으나 각 부분의 세부적인 조형방법은 전혀 달라서, 기단에서부터 탑신부까지 전부 한 장씩의 돌로 이루어져 있다.


바닥돌 윗면에는 연꽃을 돌려 새겼다. 아래층 기단의 네 모서리에 새겨진 기둥조각은 형식적이나, 특이하게도 물결무늬를 돋을새김해 두어 눈길을 끈다. 아래층 기단의 맨윗돌을 두껍게 얹어놓아 탑의 안정감을 높이고 있으며, 위층 기단의 모서리에 꽃 모양을 새긴 기둥을 두고 각 면마다 용무늬를 깊이 판 모습은 능숙한 석공의 솜씨를 드러낸다. 탑신부의 각 지붕돌은 밑면의 받침이 얇은 한 단이며, 네 귀퉁이에서 가볍게 치켜올려져 있다. 8층 몸돌 위에 지붕돌 하나와 몸돌 일부분이 남아있는 것으로 보아 층수가 더 많았을 것으로 보이지만 8층 탑신의 아래까지만 옛모습 그대로 남아있다.


각 부분 아래에 괴임을 둔 점으로 보아 고려시대 석탑 양식을 일부분 남기고 있으나, 세부적인 조각양식 등에서 고려 양식을 벗어나려는 여러가지 표현이 돋보인다. 하얀 대리석이 주는 질감은 탑을 한층 우아하게 보이게끔 하고 있으며, 전체적으로 서울 원각사지 십층석탑(국보)과 돌의 재질, 조각양식이 비슷하다. 신륵사는 조선 성종 3년(1472)에 대규모로 새 단장을 하였는데, 이 탑도 이 때에 함께 세워진 것으로 보인다.


# 여주 신륵사 조사당 (驪州 神勒寺 祖師堂)



나옹선사의 제자인 각신스님은 승탑을 세우면서 동시에 스님의 영정을 제작하고 이를 모시는 진영당을 지었다. 이것이 신륵사 조사당(보물 제180호)으로, 정면 1칸, 측면 2칸 팔작지붕으로 지어졌다. 


정면 앞쪽에는 띠살무늬의 문합문 6짝을 달았다. 장대석으로 한 번 쌓은 낮은 기단 위에 초석을 놓고 기둥을 세웠는데, 가운데 기둥을 세우지 않아 대들보가 없다. 측면의 간주에 의해서 그 위로 대들보가 아닌 대량이 건너가 네 모서리의 추녀 끝을 받치는 재목과 만나 건물을 이루고 있다. 



조사당은 신륵사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로 1671년 무렵에 중수했다고 한다. 그때 그려진 나옹의 영정은 자취를 알 수 없고 지금은 후대에 그려진 나옹스님과 스승인 지공대사, 제자인 무학대사 세 분의 초상을 모셔놓고 있다. 



조사당 바로 앞에는 수령이 적어도 600년이 넘었을 향나무 한 그루가 서 있어 신륵사의 연륜을 증언하고 있다. 전하는 말로는 무학대사가 스승 나옹선사를 추모해 심었다고 전한다.   

조선 전기의 조각 수법을 보이고 있으며 규모는 작지만 균형이 잘 잡힌 아담한 건물이다.


# 여주 신륵사 다층전탑 (驪州 神勒寺 多層塼塔)




아래로 한강이 굽어보이고 강 건너 멀리 평야를 마주하고 있는 경치좋은 바위 위에 이 전탑이 세워져 있다. 전탑(塼塔)이란 흙으로 구운 벽돌로 쌓은 탑을 이르며, 우리나라에서는 경기도와 경상북도 안동지역에서 몇 기가 남아 있다.


탑은 기단(基壇)을 2단으로 마련하고, 다시 3단의 계단을 쌓은 후 여러 층의 탑신(塔身)을 올렸다. 기단과 계단은 화강암으로 만들었으며, 탑신부는 흙벽돌로 6층까지 쌓아 올렸는데, 그 위에 다시 몸돌 하나를 올려놓고 있어 7층같아 보이기도 하는 애매한 구조이다. 통일신라시대에 만들어진 전탑과 달리 몸돌에 비하여 지붕돌이 매우 얇아 전체가 주는 인상이 사뭇 독특하다. 지붕돌 밑면의 받침은 1∼3층이 2단, 4층 이상은 1단이며, 지붕돌 위로도 1층은 4단, 2층 이상은 2단씩의 받침을 두었는데 이 또한 특이한 형태이다. 꼭대기에 머리장식이 있기는 하나 얇다.





탑의 북쪽으로는 수리할 때 세운 비가 전해오는데, 거기서 ‘숭정기원지재병오중추일립(崇情紀元之再丙午仲秋日立)’이라는 연대가 있다. 조선 영조 2년(1726)을 뜻하지만 이 때 다시 세워진 것이므로, 지금 탑의 형태는 만들 당시의 원래 모습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벽돌에 새겨진 무늬로 보아도 고려 전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는 것이 옳을 듯하다. 처음 세워진 이후 여러 차례 수리되는 과정에서 벽돌의 반원 무늬 배열상태가 어지럽혀지고, 전체 형태가 다소 변형된 것으로 보여진다./다음호에 계속(사진-박광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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