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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서원 200] 정만양-정규양 봉향한 '횡계서원(橫溪書院)'
  • 이승준 기자
  • 등록 2023-07-08 08:07: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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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준 기자] 횡계서원은 1737년(영조 13)에 도내 사림들이 통문을 해 봉향키로 했으나 당시 남설하는 서원의 설립을 막는 나라의 제도로 인해 뜻을 이루지 못하고, 1760년(영조 36) 사교당(四敎堂)에서 춘추로 양 선생의 향사를 올렸다. 1871년(고종 8) 흥선대원군의 서원훼철령으로 훼철됐고, 1923년 횡계서당으로 복원해 복향했다. 1944년 겨울, 관리사가 소실됐다.

    

# 정만양(鄭萬陽, 1664~1730)은 조선 후기의 학자. 본관은 오천(烏川, 迎日). 자는 경순(景醇), 호는 훈수(塤叟)·기암(企菴)·정재(定齋). 영천 출신. 아버지는 생원 석주(碩胄), 어머니는 의성 김씨(義城金氏)로 방렬(邦烈)의 딸이다. 종조부 시연(時衍)과 이현일(李玄逸)의 문하에서 아우 규양(葵陽)과 함께 수학했다.


경사(經史)는 물론, 성리학.예학.천문.지리.역학.경제.정치.율려(律呂).과제(科制) 등에 이르기까지 두루 정통했으므로, 당시 사람들이 이들을 옛날 정호(程顥)·정이(程頤) 형제와 같다고 했다.


퇴계학에 몰두하면서 윤증(尹拯)·정제두(鄭齊斗).정시한(丁時翰).이형상(李衡祥) 등과도 학문에 관한 토론과 서신 왕래가 많았고, 학파를 초월해 학문의 진수를 탐구했다. 1724년(경종 4) 순릉참봉(順陵參奉)에 제수됐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1728년(영조 4) 이인좌(李麟佐)의 난 때 여러 고을에 격문을 돌려 의병 수백 명을 모아 아우 규양을 의병장으로 삼고 규율을 모두 갖췄는데, 관군이 난을 평정했다는 소식을 듣고 해산했다.



이남산(尼南山) 밑에 옥간정(玉磵亭).육유재(六有齋).태고와(太古窩, 慕古軒).진수재(進修齋) 등을 짓고 향단(香檀)과 청죽(靑竹)을 심어 선경 속에서 후진 양성에 전념하였다. 한편, 향음주례(鄕飮酒禮 : 온 고을의 유생이 모여 鄕約을 읽고 술을 마시며 잔치하는 예절)와 투호(投壺 : 화살을 던져 병 속에 넣는 유희)의 의식을 거행하기도 했다.


학설은 이황(李滉)의 이기이원론을 사상적 핵심으로 삼아 이(理)는 본연이요, 기(氣)는 성절(性節)로서 이는 허무공적(虛無空寂)이 아닌 만물을 생성하는 우주의 근원이요, 기는 칠정(七情)에서 나뉘어 용(用)이 수반되는 기질성(氣質性)으로 분리하니, 이는 곧 주(主)요, 기는 곧 자(資)라 정의했다.


훈과 지는 피리에 속하는 악기 이름으로, 형은 훈을 불고 아우는 지를 불어 서로 조화된 음률을 이룬다는 뜻에서 아우 규양과 함께 '훈지악보 塤篪樂譜'를 지었다.


모든 저술을 대부분 형제가 같이 하여 '곤지록 困知錄' '이기집설 理氣輯說' '가례차의 家禮箚疑)' '개장비요 改葬備要' '의례통고 疑禮通攷' '상지록 尙知錄' '심경질의보유 心經質疑補遺' '계몽해의 啓蒙解疑' '외국지 外國誌' '산거일기 山居日記' 등을 남겼다.



문장이 전아(典雅)하고 순수하고 진실했다. 글씨에도 능해 전서(篆書)를 잘 썼다. 사헌부지평에 추증됐고, 영천의 횡계서원(橫溪書院)에 제향됐다. 저서로는 ≪훈지문집≫ 62권이 있다.

 

# 정규양(鄭葵陽, 1667~1732)은 조선 후기의 학자. 본관은 오천(烏川, 迎日). 자는 숙향(叔向), 호는 지수(篪叟). 영천 출신. 아버지는 생원 석주(碩胄)이며, 어머니는 의성 김씨(義城金氏)로 방렬(邦烈)의 딸이다. 종조부 시연(時衍)과 이현일 (李玄逸)의 문하에서 형 만양(萬陽)과 함께 수학했다.


경사(經史)는 물론 성리학.예학.천문.지리.역학.정치.경제.율려(律呂).과제(科制) 등에 두루 정통했다. 당시 사림들이 이들 형제를 정호(程顥).정이(程頤) 형제에 비유했다. 퇴계학에 전념하면서도 이형상(李衡祥).윤증(尹拯).정제두(鄭齊斗).정시한(丁時翰) 등과도 학술 토론을 전개했고, 학파를 초월해 학문의 진수를 탐구했다. 1714년(숙종 40) 학행으로 천거돼 현릉참봉 (顯陵參奉)에 제수됐으나 사퇴했다.


1728년(영조 4) 이인좌(李麟佐)의 난 때 형 만양과 함께 경상북도 일대에 격문을 돌려 향병 수백 명을 모아 의병장에 추대됐다. 규율을 모두 갖췄는데, 관군이 난을 평정했다는 소식을 듣고 해산했다. 그 뒤 이남산 (尼南山) 밑에 육유재(六有齋).진수재(進修齋).옥간정(玉磵亭).태고와(太古窩, 慕古軒) 등을 짓고 향단(香檀)과 청죽(靑竹)을 심어 선경 속에서 후진 양성에 심혈을 기울였다.



한편, 향음주례(鄕飮酒禮 : 온 고을의 유생이 모여 鄕約을 읽고 술을 마시며 잔치하는 예정)와 투호(投壺 : 화살을 던져 병 속에 넣는 유희)의 의식을 거행하기도 했다.


학설은 이황(李滉)의 이기이원론을 사상적 핵심으로 삼아 이(理)는 주(主)요, 기(氣)는 자(資)라 정의해 형 만양의 논리와 일치하였다. 형제간의 우애를 기리기 위해 형 만양과 함께 '훈지악보 塤篪樂譜'를 지었다. 모든 저술을 대부분 형제가 같이 해 ≪심경질의 心經質疑≫ ≪치도의설 治道擬說≫ ≪의례통고 疑禮通攷≫ ≪개장비요 改葬備要≫ ≪경학연원도 敬學淵源圖≫ ≪상의치심단 上醫治心丹≫ ≪선천심법도 先天心法圖≫ ≪대학차록 大學箚錄≫ 등 외에도 많은 저서를 남겼다. 저서로는 ≪훈지문집≫ 62권이 있다. 영천의 횡계서원(橫溪書院)에 제향됐다.


횡계서원은 강당과 동재가 직각이 되게 배치돼 있고 사당은 없다. 출입은 동재 뒤에 있는 사주문을 통해 이뤄지며 서원의 가운데에 수령 300년이 된 향나무가 있으며 계곡쪽으로 모고헌(慕古軒)이라는 정자가 있다.


모고헌(慕古軒)-경상북도유형문화재 제271호(1992.07.18지정)은 조선 숙종 때 성리학자인 정규양이 1701년(숙종 27)에 지은 집으로 처음에는 태고와라 했으나, 1730년(영조 6)에 문인들이 수리해서 모고헌이라 했다. 선생은 형인 정만양 선생과 이곳에서 제자를 양성하기 위해 세운 옥간정을 왕래했고, 형제간의 우애를 상징하는 뜻으로 훈과 지를 호로 삼았다. 건물의 규모는 앞면 2칸.옆면 2칸으로 지붕은 옆면이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이며, 4면에 툇간을 둔 독특한 건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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