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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전통사찰 107] 백제 혜감국사가 창건한 상왕산 기슭에 있는 ‘개심사(1)'
  • 윤여금 기자
  • 등록 2023-07-06 13:44:11
  • 수정 2024-04-02 04:35: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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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여금 기자] 충남 서산 개삼사(전통사찰)는 654년(백제 의자왕)에 혜감국사가 창건했다고 전하며, 고려 충정왕 때 처능대사가 중창하고 ‘개심사’라 했으며, 개심은 마음을 열어 깨달음을 얻으라는 의미이다. 1484년(조선 성종)에 화재로 소실된 것을 중건했고, 1740년(영조 16)에 중수를 거쳐, 1955년에는 전면 보수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일주문, 범종각, 해탈문, 대웅보전(보물), 심검당(충남도 문화재자료), 오층석탑, 무량수각(無量壽閣), 안양루(安養樓) 등이 자리해 있다. 

 

      ▲ 개심사 일주문




 

       ▲ 개심사 일주문 천정


    ▲ 개심사 일주문


일주문은 사찰의 가장 바깥에서 경계를 표시하는 문으로, 네 개의 기둥을 세우고 그 위에 지붕을 얹는 일반적인 가옥 형태와는 달리, 두 개 혹은 네 개의 기둥을 일렬로 세우고 그 위에 지붕을 얹는 독특한 형식을 갖추고 있어 붙여진 이름이다. 고려 말기에 이르러 모습을 보이며 조선 중기 이후에 들어서는 대부분의 주요 사찰에 건립되게 된다. 일주문에 현판을 걸어서 그 사찰의 품위를 나타내기도 한다. 


일주문은 출입을 위해 있는 기능적인 역할과 불(佛)과 중생(衆生), 극락과 사바의 경계를 이루는 상징적 구조물로, 일주문을 기준으로 승과 속의 경계가 이루어지며, 세간과 출세간, 생사윤회의 중생계와 열반적정의 불국토가 나누어진다. 이런 의미에서 일주문은 '화엄경'의 ‘일심사상(一心思想)’,'법화경'의 ‘회삼귀일(會三歸一)’ 사상으로 볼 수 있다. 즉, 신성한 가람에 들어서기 전에 세속의 번뇌를 불법의 청량수로 말끔히 씻고 일심으로 진리의 세계로 향하라는 상징적인 가르침이 담겨 있다.


    ▲ 서산 개심사 범종각


개심사 범종각은 구부러진 채 성장한 나무를 그대로 사용해서 지었다.


 






     ▲ 개심사 범종각


 

      ▲ 개심사상왕산(開心寺象王山)


전면에는 개심사상왕산(開心寺象王山)라 쓴 편액이 걸려있고, 후면에는 안양루(安養樓)라 쓰여 있는 편액이 걸려 있다. 

 


       ▲ 개심사상왕산(開心寺象王山)


     ▲ 해탈문(解脫門)


서산 개심사는 해탈문(解脫門)을 통해서 관내에 들어가도록 되어 있다. 해탈은 결박이나 장애로부터 벗어난 해방 또는 자유를 의미한다. 불교에서는 중생이 겪는 모든 고통의 원인을 번뇌에서 찾는데, 모든 번뇌에서 벗어나 수행의 궁극적인 경지에 이른 상태를 해탈, 열반, 깨달음 등으로 표현한다. 이러한 이름을 붙인 것은, 그곳을 지나면 번뇌가 없는 부처의 세계로 들어간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나타내고자 했다. 속세와 불국토를 구별하는 지점을 해탈의 문으로 상징화하여 나타냄으로써, 속세의 모든 고통에서 벗어나 해탈에 이르기를 바라는 염원을 표현했다고 할 수 있다.





     ▲ 개심사 해탈문(解脫門)


      ▲서산 개심사 안양루(安養樓)


안양은 '극락'을 상징하며, 안양문은 '극락으로 들어섬'을 의미한다.



        ▲서산 개심사 안양루(安養樓)


     ▲ 서산 개삼사(전통사찰 제38호, 1983년 지정) 


가야산( 667.6m) 줄기의 상왕산(307.2m) 기슭에 위치한 개심사는 654년(백제 의자왕 14)에 혜감국사가 창건했다고 전한다. 고려 충정왕때 처능대사가 중창했고, '개심사'라 했으며, '개심'은 마음을 열어 깨달음을 얻으라는 의미이다. 1475년(조선 성종 6년)에 불타 없어져, 1484년(조선 성종 15)에 중건했고, 1740년(영조 16)에 중수를 거쳐 1955년 전면 보수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개심사는 대한불교조계종 제7교구 본사인 수덕사(修德寺)의 말사이다.

 

1941년 대웅전 해체 보수 당시 발견된 상량문에 의하면 1475년(성종 6)에 불탄 대웅전이 1484년(성종 15)에 다시 중건되었으며, 1740년(영조 16)에 중수된 것을 알 수 있다. 

 

가람배치는 대웅전을 중심으로 좌우에 심검당과 무량수각을 놓고 그 전방에 안양루를 배치하고 있어, 조선 초기의 배치법을 따르고 있다.

 

대웅전 내부에는 목조아미타여래좌상(보물)을 중심으로 관세음보살·지장보살을 봉안하고 있다. 

 

코끼리의 왕이라는 뜻의 상왕산은 부처님을 상징하여 ‘무아경’을 설한 인도의 산 이름이기도 하다. 대웅보전(보물), 영산회상도(보물), 달마대사관심론 목판(보물), 모자리혹론 목판(보물) 등의 보물 14종과 오층석탑, 현존 당우로는 대웅전(보물)을 비롯하여 심검당(도지정문화재자료), 무량수각(無量壽閣), 안양루(安養樓) 등이 자리해 있다. 

 

대웅전 후불벽에 1767년 조성된 ‘관경변상도(보물)’ 후불탱화가 있었지만 아쉽게도 1991년도에 도난당하였다. 현 후불탱화(관경변상도)는 비지정문화재이다. 

 

                           ▲ 관경변상도(가로260cm, 세로460cm)/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제공


     ▲ 서산 개심사 칠성탱화


     ▲ 서산 개심사 신중탱화


대웅전 왼쪽 벽면에는 1887년(고종 24)에 선옥, 능호 등의 화사가 그린 ‘칠성탱화’가 있고, 조선시대 ‘신중탱화’가 걸려 있다.

 

     ▲ 개심사 대웅전(보물, 1963년 지정)










 











    ▲ 개심사 대웅전(보물) 천정



개심사 대웅전(보물)은 개심사의 중심건물로 조선시대에 만들어졌다. 일반적으로 대웅전에는 석가모니불을 모시지만 개심사 대웅전에는 아미타불(보물)과 그 양옆에는 관음보살과 지장보살이 함께 모셨져 있다. 

 

1941년 대웅전 해체 보수 시 발견된 묵서명에 의해 조선 성종 15년(1484)에 고쳐 지었음을 알 수 있다. 

 

개심사 대웅전(보물)은 정면 3칸, 옆면 3칸으로 돼 있으며,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사람 인(人)자 모양인 맞배지붕이다. 

 

처마 끝의 무게를 받치려고 기둥머리에 짜 맞추어 댄 부재를 ‘공포’라 하는데, 이러한 공포가 기둥 위에만 있는 것을 ‘주심포’라하고, 기둥 위뿐만 아니라 기둥과 기둥사이에도 있는 것을 ‘다포’라고 한다. 

 

개심사 대웅전(보물)은 주심포계와 다포계가 절충돼 있는 것이 특징이다. 

 

이 건물은 건물의 뼈대를 이루는 기본적인 구성이 조선 전기의 대표적 주심포양식 건물인 강진 무위사 극락전(국보)과 대비가 되는 중요한 건물이다.

 

    ▲  서산 개심사 목조아미타여래좌상(보물, 고려시대)

 




서산 개심사 목조아미타여래좌상(보물)은 최근(2004년) 발견된 복장물 ‘아미타불상중수 봉함판’의 수보묵서명(修補墨書銘)에 의해 고려 충렬왕 6년(1280) 불사를 위해 특별히 승재색(僧齋色)의 주관 하에 ‘내시 시흥위위(內侍試興威衛)의 장사(長史) 송(宋)씨’가 보수를 담당한 것임이 밝혀졌다. 고로 이 불상의 제작연대가 중수연대인 1280년보다 앞선 시기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목조아미타여래좌상(보물)은 형상이 단정하면서도 중후하며 알맞은 신체비례를 보여 줄 뿐만 아니라 조각기법도 매우 정교하고 세련되었다. 

 

목조아미타여래좌상(보물)은 전체 높이가 200㎝이다. 몸을 앞으로 숙인 자세로 앉아 있고, 머리에는 정상계주(頂上髻珠)와 중계주(中髻珠)가 표현돼 있으며 머리와 육계(肉髻)의 경계는 뚜렷하지 않다. 특히 뚜렷하면서도 엄숙하게 표현된 이국적인 얼굴, 반듯한 이마와 반쯤 뜬 두 눈, 불상의 눈동자에는 수정을 박아 넣었다. 


우뚝한 콧날과 뚜렷한 인중, 부드러운 입술, 살이 적당한 양 뺨 등 위엄이 있으면서도 자비로운 상호(相好)를 보여주며, 목에는 삼도(三道)가 음각(陰刻)되었고, 넓게 열린 가슴에는 내의를 묶은 매듭이 ‘팔(八)’자 형태로 양각되어 있다. 


어깨는 몸에 비해 좁고 둥글게 처졌으며, 두 손은 엄지손가락과 중지(中指)를 맞댄 이른바 아미타불의 구품인(九品印) 가운데 중품하생(中品下生)의 수인(手印)을 결(結)하고 있다.

 

어깨 위에 걸쳐진 대의(大衣)의 왼쪽 어깨에 표현된 접힌 대의단과 어깨 위에서 아래로 내려오는 깊고 촘촘한 옷 주름의 끝에 작은 ‘Ω’ 모양의 주름이 잡혀 있다. 결가부좌(結跏趺坐)한 다리 위를 덮은 대의 자락은 네 번 접혀 발목 위에 올려 있고, 오른발의 절반쯤이 가사 자락으로 덮여 있다. 

 

왼쪽 어깨에 몇 가닥의 짧은 종선으로 처리된 옷 주름과 그 아래로 자리 잡은 겹O형 주름 등 전체적으로 단엄한 자태를 보이고 상호표현에서부터 세부조각에 이르기까지 뛰어난 조형감을 보여주고 있어 현존하는 고려후기 목조여래좌상 가운데 조각적으로 가장 완성도가 높은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1274년에 중수된 서울 개운사 목조아미타불상이나 13세기 작품으로 추정되는 화성 봉림사 목조아미타불좌상, 나주 심향사 건칠아미타불좌상 등과 시대양식을 공유하면서도, 이들 상보다 훨씬 건장하고 생동감 넘치는 조각기법을 보여주고 있다. 

 

                  ▲ 서산 개심사 영산회 괘불탱(開心寺 靈山會 掛佛幀, 조선후기, 보물, 1997년 지정)


서산 개심사 영산회괘불탱(보물)은 석가가 영축산에서 설법하는 장면을 그린 영산회괘불탱으로, 괘불이란 절에서 큰 법회나 의식을 행하기 위해 법당 앞 뜰에 걸어놓고 예배를 드리는 대형 불교그림이다.

 

화면을 가득 채운 석가불은 오른쪽 어깨가 드러난 우견편단의 옷을 걸치고 화면 중앙에 서 있으며 독존불처럼 강조된 석가불은 오른손은 내리고 왼손은 가슴에 두었다. 둥근 얼굴, 비대한 어깨, 유난히 길고 굵은 팔, 짧은 하체가 비현실적으로 보인다. 


오른쪽 어깨가 드러난 우견 편단(右肩偏袒)의 법의에는 문양이 화려하며둥글고 변형된 덩굴무늬가 빽빽하게 장식되어 있다.

 

무릎 부근에는 영락(瓔珞: 구슬을 꿰어 만든 장신구)으로 치장하였다. 신광(身光: 부처나 보살의 몸에서 발하는 빛)에는 모란 덩굴 무늬가 채워져 있다.


지권인(智拳印: 왼손 집게손가락을 뻗치어 세우고 오른손으로 그 첫째 마디를 쥔 손 모양)의 손 모양을 한 비로자나불과 두 손을 어깨 높이로 올려 설법인(說法印)을 취한 노사나불은 구름 위의 연화좌에 앉아 있다.

 

두광의 외연(外緣: 가장자리)을 장식한 7구의 화불(化佛)은 두 어깨를 덮은 통견(通肩: 어깨에 걸침)의 법의를 입고 역시 구름 위의 연화좌에 결가부좌(結跏趺坐)한 자세이다. 손 모양과 지물(持物)이 다양하다.

 

석가모니불 뒤의 광배에는 모란 줄기와 연꽃무늬 등이 새겨져 있다. 석가의 머리 주변엔 7구의 화불이 둥글게 앉아 있으며, 옆으로는 2구의 비로사나불과 노사나불이 석가를 협시하고 앉아 있다.

     ▲ 제석천


     ▲ 범천


석가의 몸통 주변에는 8구의 화불이 좌우로 앉아 있으며 맨 아래 부근에는 2구의 제석천과 범천이 손을 모은 자세로 석가를 향해 서 있다.

 

탐스러운 연꽃을 딛고 선 석가불을 제외한 나머지 권속은 모두 구름 위에 앉거나 선 자세로, 화불처럼 묘사되었다.

 

구름으로 인해 빈 공간이 없는 이 불화의 상단부의 양쪽 수식 띠는 그 가운데 큼직한 다라니 주머니를 그리거나 실제로 수를 놓은 화려한 다라니 주머니를 걸어 놓는 용도의 장식을 그림으로 나타낸 것이다. 

 

홍색과 녹색의 보색 대비 및 화불과 모란, 연꽃 문양의 장식적인 요소들이 조화된 화려함을 보여 주는 당대의 대표적인 작품이다.

 

조선 영조 48년(1772)에 1772년(영조 48)에 유성(有誠), 유위(宥偉), 성청(性聽), 보은(報恩), 상흠(尙欽) 등 11명의 화사(畵師)가 그렸다. 화기에 ‘대영산괘불탱(大靈山掛佛幀)’의 명칭이 있는 이 불화는 왕과 왕비, 세자의 만수무강을 위해 제작된 그림이다. 

 

거대한 본존불 입상의 두광(頭光: 부처나 보살의 정수리에서 나오는 빛) 좌우에 비로자나불좌상과 노사나불좌상이 조그맣게 묘사된 것으로 보아 비로자나불의 화신(化身)인 석가불로 추정된다. 이 그림은 주로 붉은색과 녹색을 사용하였고 아름답고 복잡한 문양에서 매우 화려한 분위기를 연출한다. 

 

비현실적인 신체비례와 복잡한 문양에서 18세기 후기의 특징을 살필 수 있는 작품이다.

 


       ▲ 서산 개심사 오층석탑(고려시대)




서산 개심사 오층석탑은 개심사를 중수한 1350년(충정왕 2)경일 것으로 추정되며, 개심사 대웅전(보물)의 앞마당에 위치한다. 

 

개심사 오층석탑은 단층 기단 위에 5층의 탑신이 세워져 있다. 지대석의 한 변이 170㎝이며, 그 위에 복판복련(複瓣覆蓮) 아래로 향하고 있는 겹잎의 연꽃을 돌린 면석 받침을 올려놓았다. 









기단 면석은 한 변이 약 79㎝이며 높이는 48㎝인데, 우주(隅柱)를 조각하였다. 

 

탑신부는 옥신과 옥개석이 각각 1매석으로 구성되었으며, 옥신에는 우주만 표현되어 있을 뿐 탱주는 없다. 옥개석의 층급 받침은 3단으로 매우 간략하게 형태만 갖추고 있다. 

 

낙수면은 완만한 경사를 이루고 있으며, 전각은 반전되어 시대적인 특징을 반영하고 있다. 상륜부는 노반(탑의 최상부 옥개석 위에 놓아 상륜부를 받치는 부)과 연봉이 남아 있다. 

 

석탑을 빙 둘러 낮은 돌기둥 8개로 사각형의 울타리를 만들어 놓았고, 일부 시멘트로 보수한 흔적이 확인된다. 

 

개심사 오층석탑은 모양이 단순하며, 조형적으로 우수하지 않으나, 오층석탑이라는 사실과 옥개석의 반전, 그리고 길고 세장한 탑신 등이 고려 시대 석탑의 특징을 나타내고 있다.

 

      ▲ 개심사심검당(開心寺尋劍堂,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398호, 1997년 지정)

 






     ▲ 개심사 심검당


개심사 심검당은  구부러진 채 성장한 나무로 기둥을 세워 지었다.



심검당(충청남도 문화재자료)은 건축연대를 기록한 문헌이 없어 지은 시기를 알 수 없으나, 1941년 대웅전 해체 보수 시 발견된 묵서명에 의해 조선 성종 15년(1484)에 고쳐 지었음을 알 수 있어, 심검당도 이때 중창된 것으로 추정한다. 

 

심검당(충청남도 문화재자료)은 그 남쪽으로 ㄴ자형의 다른 요사와 함께 연결되어 있어, 앞면 3칸·옆면 3칸 규모인데 건물 왼쪽에 앞면 3칸·옆면 5칸 규모의 덧집이 붙어 있다.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사람 인(人)자 모양인 맞배지붕이며,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만든 공포는 기둥 위에만 있는 주심포 양식의 건물로서 그 형태가 단아하다. 

 

      ▲ 서산 개심사 무량수각(조선시대)




      ▲ 서산 개심사 무량수각(조선시대)


개심사 무량수각은 정면 6칸, 측면 3칸의 무량수각은 자연석 초석 위에 원주의 기둥을 사용하였고, 포작(包作)은 익공계이며, 처마는 겹처마에 팔작지붕이다. 

 

개심사 사적기(開心寺事蹟記)에 의하면 1613년(광해군 5)에 모든 전각을 중수하였다고 전한다. 1981년 보수하였다. 원래 전각의 이름이 ‘무량수전’이었는데 ‘무량수각’으로 바뀌었다. 

 

현재 요사채로 쓰이고 있고, 큰 방에는 관음보살상이 봉안되어 있다. 무량수불(無量壽佛)과 관련된 전각은 보통 ‘전(殿)’자를 붙이는데, 개심사 무량수각은 ‘각(閣)’자를 붙인 점이 특징적이다.

 

서산 개심사 대웅전(瑞山開心寺大雄殿)보물의 전면 좌측에 자리하며 개심사 심검당(開心寺尋劍堂)과 마주 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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