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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전통사찰 106] 상왕산 서남쪽 기슭에 위치한 ‘일락사’
  • 윤여금 기자
  • 등록 2023-06-26 21:54:21
  • 수정 2024-04-02 04:35: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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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여금 기자] 상왕산 서남쪽 기슭에 있는 일락사는 수덕사의 말사이며, 663년에 의현선사가 창건했다고 전한다. 한때 왜란 등으로 폐사됐다가 중창했는데 중창연대는 1505년, 1540년, 1574년, 1625년, 1649년, 1918년까지 6차례 걸쳐서 했다. 조선초기까지는 ‘일악사’라고 했다. 대적광전, 대웅전(미타전 충남도 문화재자료), 현음당, 산신각, 요사채 등이 위치해 있다.


         ▲ 일락사 (日樂寺, 전통사찰 45호, 1988년 지정)


서산 상왕산(象王山) 기슭에 있는 일락사(전통사찰)는 대한불교조계종 제7교구 본사인 수덕사(修德寺)의 말사이다. 663년(문무왕 3)에 의현(義賢)이 창건했다고 전한다. 일락사는 ’중창기’에 의하면 대웅전의 1505년 첫 중창 이후 1540년, 1574년, 1625년, 1649년, 5중창 1649년과 6차 중창은 1918년 5월에 30일에 공사를 마쳤다고 전한다. 조선 초기까지는 일악사(日岳寺)라 하였다. 


                  ▲ 일락사 중창기/서산시청 제공


일락사 대웅전을 1993년에 해체 이건 돼 현재는 ‘미타전’으로 사용하고 있고, 옛 자리에는 지금의 ‘대적광전’을 새로 지었다. 


대적광전에는 삼신불상이 모셔져 있고, 탱화로는 독성탱, 신중탱, 칠성탱 등이 걸려 있다.


     ▲  독성탱화


     ▲   신중탱화




1984년(대적광전, 삼층석탑, 금동여래좌상)에 충청남도 문화재 자료로 지정됐고, ‘금동여래좌상’은 조사에서 충청남도 유형문화재로 승격 지정이 바람직하고 입증됐다고 전한다. 





 


       ▲ 대적광전


              ▲   대동여지도 해미현


               ▲ 광여도 해미현


일락사는 신라 문무왕 3년(663)에 의현선사가 창건한 고찰로 조선 성종 18년(해미읍성 완공 4년전)에 대 보수한 것을 비롯해 중종 25년과 인조 27년에 해미읍성 중수시에 일락사 대웅전도 함께 중수했다고 전한다. 


현 ‘미타전’은 그 때의 대웅전(문화재자료 193호)을 개축한 것으로서 1992년에 대웅전이 협소해 ‘대적광전’을 신축하면서 지금의 ‘미타전’자리로 옮겼다. 


현 대적광전에는 중앙에 비로자나불을 중심으로 왼쪽에 노사나불과 오른쪽에 석가모니불 이 모셨고, 후불탱화로는 관세음보살 보문품이 조각돼 있다. 



     ▲ 일락사 대적광전 소조여래상


현재 일락사 대적광전에 봉안되어 있는 불상으로, 좌협시 상은 1999년에 새롭게 

조성한 것이다. 


       ▲ 비로자나불


중앙과 우협시로 자리하고 있는 상은 모두 소조로 조성했는데, 각각 지권인과 아미타인을 결하고 있다. 상들을 언제부터 일락사에서 봉안했는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일제강점기에 작성된 ‘사찰재산대장’,‘조선총독부관보-사찰재산목록’에 이미 언급하고 있어 그보다 이전 시기부터 봉안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 노사나불(좌협시)


가운데 지권인을 결한 비로자나여래를 중심으로 좌우에 각각 석가여래와 노사나여래

를 봉안 해 있다.



 




크기는 가운데 지권인을 결한 상이 높이 131cm, 무릎너비 109.3cm 이다. 우협시 상은 

높이 100.6cm, 무릎너비 75.2cm 이다. 조선시대에 조성한 비교적 규모가 큰 소조여래상이라는 점에서 가치가 있다. 아직까지 정밀한 조사나 양식적 분석 등이 진행되지 않았고 '비지정문화재'로 남아있다. 향후 면밀한 조사와 연구가 필요한 문화재로 판단된다.




       ▲ 삼층석탑(문하재자료 제200호)


대적광전 전면에 위치한 삼층석탑은  고려시대 석탑이다. 기단의 조성방법 및 지붕돌의 표현, 전체적인 조각 수법 등으로 보아 고려전기 작품으로 추정되나, 통일 신라의 양식도 남아있다. 










석탑의 기단부는 위아래 2층으로 돼있으나. 현재 아래쪽 기단의 대부분은 파손돼 단층기단처럼 보인다. 탑의 몸체는 3층으로 되어 있는데, 1층 탑신석에 비해 2층 탑신석의 높이가 급격히 낮아져서 불균형한 모습이다. 탑 꼭대기에는 네모난 지붕 모양의 장식만 남아 있고 금속장식과 덮개인 보륜과 보개는 모두 훼손됐으며, 타원형의 자연석 하나만 남아 있다.





    

     ▲ 일락사 대웅전(미타전)(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193호)_


현재 대적광전 오른쪽 축대 위에 자리하고 있는 ‘미타전’ 건물이 원래 ‘일락사 대웅전’이다. 1918년에 작성한 ‘대웅전 중창기’에 의하면, 대웅전은 1505년 첫 중창 이후 6차 중창은 1918년 5월에 30일에 공사를 마쳤다고 전한다. 중창연대는 1505년, 1540년, 1574년, 1625년, 1649년, 1918년까지 모두 6차례이다. 


일락사의 ‘미타전’의 건립연대는 전각 내에 걸려있는 탱화의 제작연대가 1919년인 것으로 보아 왜정 초기에 중창된 건물임을 알 수 있다. 


원래 대적광전 자리에 석탑과 마주하고 있었던 것을 공간이 협소하여 1993년에 건물을 해체해 그 자리에 ‘대적광전’을 신축하고, 신축된 대적광전 우측에 옮겨 복원했다. 


건물이 현재의 위치로 옮겨진 후 내부에 지장보살을 새롭게 봉안해 ‘명부전’으로 사용했다. 이후 2016년 3월에 금동여래좌상을 수덕사 근역성보관에서 다시 ‘일락사’로 옮겨오면서, 현판을 ‘미타전’으로 바꾸고 현재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미타전 건물은 조선후기의 목조불전으로 앞면 3칸, 옆면 2칸으로 전체 6칸이며, 건물 면적은 48.6㎡이다.  지붕은 맞배지붕이며, 기둥은 원주이다. 공포(栱包)는 익공(翼工) 양식이다. 


창호는 정면 3칸, 모두 2짝이며 교살문이다. 향 좌측면 귀기둥에 붙여 외짝 교살문을 달고 그밖에 부분은 모두 벽으로 막았다. 


                   ▲ 일락사 대웅전(미타전)/서산시청 제공


전체적으로 조각을 가하여 단정하고 아담한 형태미를 보여 준다. 


                ▲ 미타전  명문기와(銘文瓦) /서산시청 제공


명문기와(銘文瓦)는 2012년 일락사 명부전 기와보수 불사를 진행하는 중에 발견된 명문 암막새이다. 당시 4점의 기와가 확인돼, 상태가 양호한 2점은 수덕사 근역성보관에 보관되어 있고, 1점은 ‘미타전’ 지붕 위에 올려져 있고, 나머지 1점은 파손되어 사찰에서 보관하고 있다. 


암막새의 앞면에 명문이 양각되어 있는 ‘順治元年甲申九月日(1644년)’이라는 기록을 보아 조선후기 1644년에 일락사에서 기와보수를 비롯한 ‘중창불사’가 있었음을 알려주는 중요한 자료이다.





        ▲ 일락사 금동여래좌상(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208호)

               ▲ 일락사 금동여래좌상/서산시청 제공





                                            ▲ 일락사 금동여래좌상 /서산시청 제공


일락사 금동여래좌상은 현재 ‘미타전’에 단독으로 봉안하고 있는데, 2016년에 진행한 재질 비파괴분석을 통해 ‘금동불’로 확인돼 ‘철불(鐵佛)’이라는 명칭 대신 ‘금동여래좌상(金銅如來坐像)’으로 표기했다. 


금동여래좌상 높이는 86cm, 무릎너비는 60cm 크기이다. 육계는 정면에서 거의 보이지 않을 만큼 낮고, 머리는 넓적하고 고개를 약간 앞으로 숙인 모습이다. 


이마에는 원형의 백호가 있고 콧등은 높고 평평하다. 목에는 삼도가 뚜렷하게 있다. 가슴은 평평하고 풍만한 느낌을 준다. 아랫배 바로 위에 대위가 지나며 승각기 매듭이 가지런하다.


결가부좌한 상태에서 오른손은 가슴 높이까지 들고, 왼손은 배 부근까지 들어 각각 엄지와 중지를 맞댄 하품중생인 수인을 결했다. 


결가부좌한 오른쪽 발로 즉 왼쪽 무릎 위에 올려놓은 오른쪽 발이 약간 두드러지게 위에 얹혀져야 정상인데 본 불상에서 옷주름은 왼쪽 무릎위로 내려오는 대의자락이 거의 발가락 끝을 슬쩍 덮고 내려온 상태로 생동감이 적고 밋밋한 편이다.


금동여래좌상 내부에서 고려후기에 목판본으로 만들어 인출한 것으로 추정되는 다라니들이 일부 발견되었다. 


                                 ▲ 일락사 금동여래좌상 복장유물 보협인다라니/서산시청 제공

 

                         ▲ 일락사 금동여래좌상 복장유물  태장계만다라다라니/ 서산시청 제공


복장에서 출토된 보협인다라니는 ‘1302년 온양민속박물관 아미타여래상’복장유물에서 수습된 다라니와 동일한데, 판각된 부분의 완결이나 목리 등을 참고할 때 같은 목판을 사용해 찍어낸 것으로 추정된다. 다라니의 가장 바깥쪽에는 1292년(至元 29)의 간기가 있다. 1292년 34.0 × 35.0cm, 35매 중 여백 부분에 ‘尹氏 李氏 同生 安養’ 라는 묵서가 남아있는 것이 3장, 기록이 없는 다라니가 32장이다. 


태장계만다라다라니는 ‘1302년 온양민속박물관 아미타여래상’ 복장유물의 다라니와 가장자리 구분선에서 차이를 보인다. 


금동여래좌상에서 나온 복장유물 다라니는 수덕사 성보박물관에 소장돼 있다. 


                 ▲ 일락사 금동여래좌상 /서산시청 제공


#금동여래좌상의 시도유형문화재로 승격 지정가치


첫째 일락사 금동여래좌상은 이색적인 상호표현과 신체 양감표현의 감소, 간락하면서 전체적으로 두껍게 표현된 옷주름 등에서 이전의 불상들과는 다른 양식적 특성을 지니며, 변형통견식 착의법, 불상 하단부의 못 구멍 등에서 14세기에 조성된 금동여래상들과 양식적 유사성을 보이므로, 고려후기~조선전기의 시대 흐름에 따라 변화하는 과도기적인 성향을 나타내는 불상으로, 금동여래상의 제작기술 및 변화양상을 유추할 수 있는 중요한 학술자료적 가치가 있다고 입증되었다.


둘째 구리-주석-납 삼원합금을 재료로 주조 후 서냉하여 제작한 것으로 확인돼, 고려후기~조선초기까지 조성된 청동 및 금동불상의 제작기술과 유사성이 높은 것을 알 수 있다. 이와 같은 분석을 통해 불상의 규모, 양식, 조성시기에 따른 제작기술을 확인할 수 있으며, 조성연대를 고려후기~조선초기로 판단할 수 있는 과학적 근거자료를 마련하였으므로, 향후 고려~조선시대 청동 및 금동불상의 조성연대에 따른 제작기법 변천 및 발전과정, 불상 편년연구 등의 실질적인 자료로서 활용될 수 있다고 입증됨으로 인해 학술적 가치를 반영하여 시도유형문화재로 승격 지정해 관리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전한다.



     ▲ 일락사 대웅전(미타전)지장보살





     ▲ 산신각 


      ▲ 현음당 


      ▲ 요사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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