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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여금의 여행이야기 ] 서산 보원사지에 자리한 탄문 ’법인국사탑비’
  • 윤여금 기자
  • 등록 2023-06-12 06:20:06
  • 수정 2024-02-12 20:45: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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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여금 기자] 서산 운산면 보원사터에 있는 고려전기 에 건립된 승려 법인국사 탄문의 탑비로 1963년 보물로 지정됐다. 법인국사탑비법인국사탑비문의 내용은 탄문의 일대기이며 900년 (신라 효공왕4)에 출생하여 15세에 계를 받고 968년(광종19)에 왕사, 974년(광종25)에 국사로 지내다가 보원사에 와서 975년에 입적했다. 탄문은 학승으로 제자가 많아 말년에 보원사에 올 때 선, 교승 천여명이 영접했으며 이곳을 ‘고산’이라 하고 묻혔다. 이 곳에 석조(보물), 법인국사보승탑(보물), 법인국사보승탑비(보물) 등이 남아 있다. 


       ▲ 서산 보원사지 법인국사탑비 (보물)/법인국사탑(보물)


         ▲ 서산 보원사지 법인국사탑비 (보물)/법인국사탑(보물)



법인국사보승탑비문에 고려시대의 내용으로 법인국사 탄문(坦文, 900∼975)은 장의산사(藏義山寺)의 신엄(信嚴)에게 화엄경을 배우고 15세에 구족계(具足戒)를 받았고, 그 계행이 높아 고려 태조가 별화상(別和尙)이라고 불렀다고 전한다. 그는 태조(太祖) · 혜종(惠宗) · 정종(定宗) · 광종(光宗)대를 거치면서 왕실과 두터운 인연을 맺었다. 혜종과 정종은 그를 지극히 공경했고, 광종은 968년에 그를 왕사(王師)로 봉하여 귀법사(歸法寺)에 머무르게 했다. 고려 초기에 화엄종이 왕권강화를 위한 이념을 제공했고 그 결과 화엄종 사찰이 크게 번성했다고 기록했다.


법인국사보승탑비에는 승려 1,000여명이 머물렀다는 기록으로 당시에 큰 사찰이었음을 알 수 있다. 






      ▲  서산 보원사지 법인국사탑비 (보물)





      ▲  서산 보원사지 법인국사탑비 (보물)


법인국사탑비 받침인 귀부(龜趺)는 거북모양이고, 머리는 여의주를 물고 있는 용의 모습으로, 목은 앞으로 빼고 콧수염은 뒤로 돌아 있으며 눈은 크게 튀어 나와 있다. 등 위에는 3단 받침을 하고 비를 얹었으며, 비머리는 네 귀퉁이에서 안쪽을 바라보는 용을 새기고, 앞·뒷면에는 구름무늬를 조각하였다. 이수의 상부에 용연(龍淵)을 파고 용이 사방에서 모이도록 한 조각이 매우 특이하다. 



법인국사탑비는 978(고려 경종3)에 경종의 지시로 국공을 파견하여 건립하게 했다. 전체높이는 450㎝, 두께는 29㎝이며, 비몸 높이 230cm, 폭 115cm, 글자 수 5,000여자 되는 거비이며 웅장하다. 이분은 신라말~고려초의 고승으로 법호는 탄문이다.  탄문(坦文)은 신라말·고려초의 명승으로 고씨(高氏)이다. 


비문은 김정언(金廷彦)이 짓고 한윤(韓允)이 썼으며, 김승렴(金承廉)의 각(刻)으로 세워졌다. 글씨는 2㎝ 정도의 구양순류(歐陽詢流) 해서로 필력과 짜임새가 구양순을 재현시킨 듯하다. 고려 초기에는 구양순체를 쓴 대가가 많았으나 그 중에서도 백미에 속한다.


보원사지에는 석조와 978년작 법인국사보승탑과 법인국사탑비 등이 남아 있어, 불교사 연구에 중요한 유적이다.




        ▲ 서산 보원사지 법인국사탑(瑞山 普願寺址 法印國師塔) (보물) (고려시대)










        ▲ 서산 보원사지 법인국사탑(보물) (고려시대)


승려의 사리를 모셔놓은 탑은 사리탑 혹은 탑이라 하여 절의 한켠에 세워두며, 사리를 넣어두는 탑신(塔身)을 중심으로, 아래에는 이를 받쳐주는 기단부(基壇部)를 쌓고, 위로는 머리장식을 얹어둔다.


이 탑은 보원사(普願寺)터에 세워져있는 1963년 보물로 지정된 높이 4.7m. 사리탑으로, 법인국사 탄문(坦文)의 사리를 모셔놓고 있다. 법인국사는 신라 말과 고려 초에 활약한 유명한 승려로, 978년에 왕이 ‘법인(法印)’이라 시호를 내리고, ‘보승(寶乘)’이라는 사리탑의 이름을 내렸다.


        ▲ 서산 보원사지 법인국사탑(보물) (고려시대)


기단부는 아래받침돌을 8각으로 된 2개의 돌로 쌓았다. 밑돌에는 각 면마다 움푹하게 새긴 안상(眼象)안에 각각 모습을 달라한 사자상이 한 마리씩을 도드라지게 돋을새김 돼있다. 윗돌에는 구름속을 거니는 용의 모습을 돋을새김했는데 용 머리의 부리부리한 눈과 코, 입, 그리고 몸통의 비늘 등이 사실적으로 표현했으며, 모서리마다 꽃이 새겨져 있다. 아무런 조각이 없는 8각의 배흘림기둥을 세웠으며, 윗받침돌은 윗면에 수직으로 새긴 난간조각이 특히 눈여겨볼 만하다. 


      ▲ 서산 보원사지 법인국사탑(보물) (고려시대)


탑신의 몸돌은 8각이며 각 모서리를 기둥처럼 새기고, 앞·뒷면에는 자물쇠가 달린 문짝모양을 돋을새김해두었다. 그 양쪽에는 불교의 법을 지켜주는 사천왕(四天王)을 돋을새김해 두었으며, 나머지 2면에는 높은 관을 쓴 인물상이 돋을새김해 서 있다. 


지붕돌은 넓고 두꺼운데, 밑으로는 목조건축에서와 같은 서까래가 표현되어 있고, 윗면은 가파른 경사를 표현하였다. 


각 모서리 선은 뚜렷하며, 끝에는 꽃조각을 하였으나 거의 남아있지 않다.


탑의 꼭대기에는 머리장식으로 큼직한 연꽃이 조각된 복발(覆鉢:엎어놓은 그릇모양의 장식)위로, 굽이 달려있는 3개의 보륜(寶輪:바퀴모양의 장식)이 차례로 놓여 있다.


이 탑은 법인이 입적한 해인 975년과 탑비(보물)를 세운 978년 사이에 세워진 것으로 판단된다.


전체적으로 8각의 기본양식을 잘 갖추고 있으며, 몸돌에서 보이는 여러 무늬와 지붕돌의 귀꽃조각 등은 고려 전기의 시대성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 서산 보원사지 석조(瑞山 普願寺址 石槽) (보물) (통일신라시대) 


서산 보원사지 석조는 보원사터에 위치한 석조이다. 석조는 승려들이 물을 담아 쓰던 돌그릇으로, 원형·팔각형·장방형 등이 있다. 




보원사지 석조는 화강석의 통돌을 파서 만든 직사각형 모양으로 ‘통일신라시대’의 일반적 형식을 보이고, 규모가 거대하여 장중해 보인다. 표면에는 아무 장식이 없고, 내부 각 면에도 조각한 흔적이 없으며, 밑바닥면은 평평하고 한쪽에 약 8㎝정도의 원형 배수구가 있다. 안쪽과 윗쪽만 정교하게 다듬고 바깥쪽에는 거칠게  다듬은 것으로 보아 땅에 뭍어두고 사용했던 것으로 보인다.


      ▲ 서산 보원사지 석조 (보물) (통일신라시대) 


조각수법이 간결하고 소박하면서도 약 4톤의 물을 저장할 수 있을 정도로 규모가 커 웅장한 느낌을 준다. 이를 통해 당시 사찰의 규모를 짐작해볼 수 있다. 현재 남아 있는 것 중에서 가장 큰 석조이다.


보원사지에는 석조와 법인국사탑과 탑비 등이 남아 있어 당시 사찰의 규모가 컸음을 알 수 있다./사진-윤여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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