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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서원 187] 곽안방-곽규-곽황을 추모키 위해 창건한 '이양서원(尼陽書院)'
  • 이승준 기자
  • 등록 2023-05-07 10:5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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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준 기자] 1707년(숙종 33)에 지방 유림의 공의로 곽안방(郭安邦), 곽지운(郭之雲), 곽규(郭赳), 곽황(郭趪)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하여 창건하여 위패를 모셨다. 선현 배향과 지방 교육의 일익을 담당하여 오던 중1868년(고종 5)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되었던 것을 1954년에는 사당을, 1982년에는 동·서재를 건립하였다. 이 서원에서는 해마다 음력 2월과 8월에 제사를 지내고 있다.

    

# 곽안방(郭安邦) 선생의 휘는 안방(安邦)이요 자는 여주(汝柱)이며 암곡 곽경 (巖谷 郭鏡)선생의 후예로 의영고사 곽득종(義盈庫使 郭得宗)선생의 아들이다.



선생은 세종 때에 해남현감(海南縣監), 익산군수(益山郡守)를 역임하고 봉열대부(奉列大未)에 올랐으며1467년(세조 13)에 이시애 난이 일어나자 군공으로써 원종공신(原從功臣)에 오르고 청백리(靑白吏)에 녹선되었다. 선생은 무과로서 벼슬에 올랐으나 몸가짐이 유사로써 교유한 선비들이 당대의 명류들이였으며 또한 선생이 관직에 있을 때 청백함이 빙옥(氷玉) 같아서 왕래할 때 단기필마로서 행장이 표연하였다 한다.김종직 문인이다.


선생이 일찌기 익산(益山)에서 임기를 마치고 돌아오다가 종자가 한 쇄철을 차고 있음을 보고 깜짝 놀라 일으되 '관가의 논건에 크고 작음이 무엇 다르랴'하고 관에 돌리도록 하였으니 그 깨끗함이 이와 같았다. 후에 정백사인 현풍 이양서원(尼陽書院)에 항사 하였다.



# 곽지운(郭之雲, 1498~1551)은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현풍(玄風). 자는 여우(汝雨), 호는 연일당(燕日堂)·삼옥당(三玉堂). 청백리 안방(安邦)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승양(承陽)이고, 아버지는 평(坪)이며, 어머니는 박문간(朴文幹)의 딸이다.


1524년(중종 19)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한 뒤, 관직은 예조좌랑에 이르렀는데 학행과 문장이 탁월하였다.죽은 뒤 현풍의 이양사(尼陽祠), 청풍의 청백사(淸白祠)에 제향되었다.


# 곽규(郭赳, 1521~1584)의 자는 극정(克靜). 호는 만담재(晩蕁齋). 참의공파조(參議公派祖). 1546년(명종 1) 식년 생원시 1등합격(式年 生員試 一等合格), 1555년 문과(文科)에 급제. 사헌부(司憲府), 사간원(司諫院), 홍문관(弘文館)에서 벼슬을 하고, 진주(晉州), 순천(順天), 광주(光州), 안동(安東), 안변(安邊), 동래(東萊)등 6주(六州)의 원 역임. 호조참의(戶曹參議), 승지(承旨) 벼슬후 학문에 심취하였으며 이양서원(尼陽書院)에 그의 유고(遺稿)가 있다.



# 곽황(郭趪)의 자는 경정, 호는 탁청헌(濯淸軒), 탁청헌공파조(濯淸軒公派祖)이다. 공은 27세에 등과(登科)하여 예조정랑(禮曹正郞), 예안현감(禮安縣監), 함양군수(咸陽郡守)를 지냈다.


서원의 배치는 강당과 외삼문이 강학공간의 축을 형성하고 있으며 강당 우측으로 대지를 한단 높여 내삼문과 사당이 자리하도록 하여, 전체적으로 좌학우묘의 배치를 하고 있다. 경내의 건물로는 사우인 청백사(淸白祠)와 내삼문, 강당인 경렴당(景廉堂)과 외삼문인 존도문(尊道門) 등이 있다. 강당 오른편에는 청백사로 불리는 사당이 있다. 그리고 사당 우측에 관리사와 장판고를 두었다.서원의 동쪽에는 고직사가 별도의 일곽을 이루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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