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 메일전송
[한국의 서원 155] 홍희-홍관을 추모한 '광제서원'
  • 이승준 기자
  • 등록 2022-12-17 00:48:45
  • 수정 2022-12-17 06:00:55

기사수정


이승준 기자] 광제서원은 경상남도 진주시 명석면 계원리에 있는 고려 초기의 서원이다. 이 서원은 남양 홍씨 홍의와 홍관을 추모키 위해 세웠다.


홍희의 본관은 남양(南陽). 1352년(공민왕 1) 상호군으로 있을 때 조일신(趙日新)이 난을 일으키고 사람을 보내어 죽이려 하자, 홍의의 처가 몸으로 막아 살았으나 처는 얼굴과 손발이 찢어지고 상해 거의 죽게 됐다.



홍의의 처에 관한 기록은 '고려사' 열녀전에 실려 있다. 1355년에는 김용(金鏞).정세운(鄭世雲).유숙(柳淑)과 함께 날마다 일의 대소 없이 입궁해 계품(啓稟)토록 명을 받았다.


1356년(공민왕 5) 왕이 기철(奇轍) 일당을 숙청할 때 판밀직(判密直)으로 궁궐에서 병사들을 지휘하다가 사망했다. 1362년에는 감찰사(監察司)에서 홍건적에게 항복한 죄가 있다 하여 그 자손을 금고에 처할 것을 논했다.



홍관은 고려전기 보문각, 청연각, 보전화루의 편액을 쓴 서예가로, 본관은 남양(南陽). 자는 무당(無黨). 당성군(唐城郡) 출신. '남양홍씨보(南陽洪氏譜)'에는 시조 홍은열(洪殷悅)의 5세손, 군기감사(軍器監事) 홍덕승(洪德升)의 아들로 돼 있다.


1103년(숙종 8) 직사관(直史館)으로서 왕명을 받아 '서경(書經)' 무일편(無逸篇)을 병풍에 썼다. 1111년(예종 6) 2월 어사중승(御史中丞)이 되고, 이듬해는 동북면병마사(東北面兵馬使)가 됐다. 1113년 8월 예부상서(禮部尙書)로서 요(遼)에 정사(正使)가 돼 부사(副使)인 형부시랑(刑部侍郎) 김의원(金義元)과 함께 다녀왔다.



1114년 12월 문덕전학사(文德殿學士)가 되고, 1116년 7월 청연각학사, 1118년 정월 보문각학사가 됏다. 청연각에서 '서경(書經)' '순전(舜典)'을 시강(侍講)했다. 예종의 명으로 이궤(李軌).허지기(許之奇).박승중(朴昇中).김부일(金富佾).윤해(尹諧) 등의 학사들과 함께 삼한 이래의 사적을 모아 '편년통재속편(編年通載續編)'을 찬진했다.


1116년 2월 국자좨주(國子祭酒)로서 국자감시(國子監試)의 시관(試官)이 돼 유승단(柳升旦) 등 99인을 뽑았다. 1123년(인종 1)에는 동지공거(同知貢擧)가 돼 지공거 임유문(林有文)과 함께 진사를 취해 변순부(卞純夫) 등 30인을 급제시켰다.


수사공 상서좌복야(守司空尙書左僕射)를 지내던 인종 때, 이자겸(李資謙)의 난이 일어났다. 그 때 도성(都城)에서 직숙(直宿)하다가 변고를 듣고 들어가 왕을 시위했다. 왕이 연덕궁(延德宮)으로 옮기게 되자 노병(老病)의 몸으로 뒤따라가다가 서화문(西華門)에서 척준경(拓俊京)의 난군에게 살해당했다.



과거에 급제해 1102년(숙종 7) 사관(史館)의 직사관(直史館)으로서 왕명으로 신축된 집상전(集祥殿: 왕의 정전)의 편액을 썼다. 신라 김생(金生)의 필법을 본받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회경전(會慶殿) 병풍에 '서경'의 무일편(無逸篇)도 썼다고 전해지고, '해동역사(海東繹史)'에는 보문각(寶文閣).청연각(淸讌閣).보전화루(寶殿畵樓)의 편액도 홍관의 글씨라고 전한다.


이후 홍관의 순절을 포상해 추성보국공신 삼중대광 개부의동삼사 수태위 문하시랑 동중서문하평장사 판예부사 상주국(推誠報國功臣三重大匡開府儀同三司守太尉門下侍郎同中書門下平章事判禮部事上柱國)에 추증됐다. 시호는 충평(忠平)이다.



기문에 의하면 처음에 홍복사(洪福寺)로 건립됐으나, 1747년(영조 23) 홍지암(洪池庵)으로 개칭됐다. 홍지암 상량문에는 1891년(고종 28) 중수한 기록과 모원재(慕遠齋)로 개칭된 내용이 기록돼 있다. 이때부터 남양홍씨 문중에서 재실로 사용했다. 1976년에 영남유림에서 이곳을 광제서원으로 격상시켰고, 매년 음력 3월 10일에 고려은청광록대부상서 홍의(洪毅)와 고려금자광록대수 수사공상서 보문각, 태학사 홍관(洪灌)에게 춘향(春享)을 올리고 있다.


진주 광제서원은 정면 5칸의 맞배지붕이고, 경충사는 정면 3칸, 측면 1칸의 맞배지붕으로 구성돼 있다. 


진주 광제서원은 모두 6동의 건물로 이뤄졌다. 각각 특색이 있고 무엇보다 원형이 잘 보존돼 있어서 고려 초기 건축양식 연구에 큰 역할을 하고 있다. 1995년 5월 2일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223호로 지정됐고, 2021년 11월 19일 문화재청 고시에 의해 문화재 지정번호가 폐지돼 경상남도 문화재자료로 재지정됐다./사진-윤정숙 기자 .

0
  • 목록 바로가기
  • 인쇄


 한국의 전통사찰더보기
 박정기의 공연산책더보기
 조선왕릉 이어보기더보기
 한국의 서원더보기
 전시더보기
 한국의 향교더보기
 궁궐이야기더보기
 문화재단소식더보기
리스트페이지_004
모바일 버전 바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