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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서원 148] 임진왜란의 명장 위대기(魏大器) 장군의 사당 '석천서원'
  • 이승준 기자
  • 등록 2022-12-10 10:35:32
  • 수정 2022-12-10 10:36: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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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준 기자] 임진왜란의 명장 위대기(魏大器) 장군.


위대기 장군(1559 ~ ?)은 조선 중기의 무신으로 본관은 장흥(長興), 자는 자용(子容)이며 장흥읍 행원리에서 태어나 7년 간의 임진왜란에서 나라를 구하고 백성을 살린 충무공 이순신 장군을 도와 장흥을 빛낸 분으로, 그는 장흥위씨로 고려 때 문화시중을 지낸 위계정의 후손이다. 그의 할아버지는 선전관을 지낸 위원신이고 아버지는 위문보로 참판을 증직 받았다.



어렸을 때부터 타고난 몸집이 커 키가 6척이 됐고 남달리 총명하고 의협심이 강해 친구들과 전쟁놀이를 할 때면 늘 대장노릇을 했다. 무예에도 뛰어나 창과 칼을 다루는 솜씨가 좋았을 뿐 아니라 활도 보통의 것보다 큰 것을 사용할 정도였다고 전한다.


그는 무예를 갈고 닦아 선조 21년, 1591년에 일찍 무과에 합격해 가리포 첨사(현재의 완도읍 일대에 있던 수군 사령부의 사령관)를 지냈다. 이듬해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해남 현감에 임명됐다. 조정의 지배층들은 당쟁으로 분열하고 민심이 흉흉한 상황에서 선조 25년(1592년) 4월 23일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가 왜군 15만의 대규모 군사를 앞세우고 조선을 침략해 왔다. 이때 장흥 선조들 가운데 위대기 장군은 고기가 물을 만난 듯 평소 품고 있던 큰 뜻을 나라와 백성을 위해 펼쳤다



왜적 수천 명이 해남으로 침입해 온다는 급한 전갈을 받고 달려가 순식간에 적을 물리쳤고 간간히 침입해 들어오는 적을 참살하는 한편, 성을 튼튼히 하여 왜적방비에 총력을 기울였다. 이런 사실을 들은 이순신 장군은 위대기 장군을 조전장(助戰裝)으로 삼아, 옥포, 적진포, 율포 등지의 해전에서 전공을 세우니 적장들은 위장군을 혈기가 왕성하고 날렵해 날아다니는 것과 같다해 홍면비(紅面飛)장군이라 부르면서 매우 두려워하고 접근하기를 꺼렸다.



육지에서는 광주목사였던 권율이 금산 웅치전에서 크게 승리를 거두고 안덕산에 이르렀으나 수많은 왜적이 나타나 우리군의 세력이 약해지고 있었다. 이때 위대기 장군은 아우인 위대택 등과 합세하여 밤을 이용한 전술로 적의 진영에 뛰어 들어 왜적을 모조리 섬멸했다. 위대기 장군이 진산 이치를 지키기 위해 금산을 막고 있을 때 적이 밤을 틈타 내려왔다. 위대기 장군은 내려온 적을 쳐부수고 경성으로 쳐들어가 1593년에 황진 등과 힘을 합해 산주와 역암 등에서 적을 모조리 죽이고 진주에서 9일 30여 차례의 싸움에서 크게 이겼다.


1594년 이순신 장군은 책략을 써서 “내가 이제 수만의 배를 통솔하여 비장군 위대기를 선봉 삼아 일본 원정의 길을 모월 모일에 출병하겠다.” 고 소문을 냈다. 이 책략은 적에게 겁을 주어 북상 세력을 꺾으려는 모책이었는데 왜적은 책략에 빠져 북상을 중지하고 남쪽으로 후퇴했다고 한다.



1597년 이의기, 황진, 황복 등과 합세해 남원에서 왜적을 섬멸할 때 황복이 전사하고 황진이 날아오는 탄환에 맞아 쓰러지니 위대기 장군은 황진을 구출하고 덩달아 적을 무찔렀다.


김천일과 최경회가 진주성에서 포위돼 급히 도와줄 병사를 요청해 오자 위대기 장군이 즉시 수천 명의 병사를 이끌고 밤낮을 달렸으나 진주성에 도달하기 전에 성이 이미 함락된지라 해남으로 돌아와 무기를 수선하고 병사를 훈련시키며 연안 방비를 소홀이 하지 않았다.



1597년 고향인 행원리에 돌아오니 왜적 천여 명이 건산을 지나 들을 덮으니 위대기 장군이 즉시 활을 끼고 일어나 적진에 돌격해 우레 같은 소리로 “홍면비 장군이 여기 있는 줄을 모르느냐!”하면서 예양강을 뛰어 건너 동문에 들어가 향교의 서책을 엮어 갑옷을 만들어 입고 좌충우돌하는 적을 무찌르니 적의 시체가 들에 즐비했고 왜적을 격파한 곳이라는 뜻으로 파왜정(破倭亭)이라 쓰고 나서 권율 장군에게 적의 코 수백을 올렸다. 이런 전공을 세워 훈련원정이 되고 승진해 수군절도사에 이른다.



전북의 남원에 충량비가 서 있고 행원에서는 석천사를 건립하고 매년 제향을 올린다. 장군이 당시에 사용하던 투구가 현재까지 석천사에 보존돼 오고 있는데 철판을 두들겨 만든 뒷부분은 녹이 슬고 큰 구멍이 뚫려 있어 원형을 볼 수 없어 아쉽기는 하나 역사적 가치가 큰 유물이다./사진-윤정숙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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