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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서원 144] 조광익-조치우를 향사하고 있는 밀양 '오봉서원'
  • 이승준 기자
  • 등록 2022-12-06 07:42:46
  • 수정 2022-12-06 07:43: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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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준 기자] 오봉서원은 경남 밀양시 작약산 아래에 자리잡고 있는 서원으로, 1780년(정조 5년)부터 세덕사(世德祠)에서 취원당 조광익(聚遠堂 曺光益, 1537∼1578)의 향사(享祀)를 올렸다. 


1790년(정조 15년) 자손들이 소(疏)를 올려 선생의 증조 청백리 정우당 조치우 선생(淸白吏 淨友堂 曺致虞 先生, 1457∼1529)도 향사할 수 있도록 청했고, 그 다음해 함께 향사를 올리라는 윤허가 내렸다. 1795년에 밀양 사림(士林)들의 공의(公議)로 향사할 뜻을 태학(太學)에 통문해 청효사(淸孝祠)라 현액하고 춘추로 향사하라는 답을 받았고, 그 다음해에 처음으로 격을 높여 오봉서원이라 했다. 




그러나 1868년 서원철폐령에 의해 훼철됐다. 그 후 후손들의 재숙을 위한 재실을 세워 오봉서당이라 칭했고, 1988년 청효사를 다시 설립해 그 전의 현판을 다시 붙이고 신문(神門)을 입덕문(立德門)이라 편액했다. 1989년에는 위판을 봉안하고 오봉서원을 복원했다. 1997년 노후한 강당과 정문을 철거해 옛날의 모습대로 원위치에 중건하고 청효당(淸孝堂)을 실학당으로, 효우당(孝友堂)을 독지재(篤志齋)로 바꾸고, 정문을 숭유문(崇儒門)이라 현판했다. 


조광익은 조선 중기의 문신이자 학자로서 중시(重試)에 장원급제하여 벼슬이 의금부도사에 올랐고 죽은 뒤 나라에서 효행과 우애를 기려 정려가 내려졌다.



본관은 창녕(昌寧), 자 가회(可晦), 호는 취원당(聚遠堂) 또는 죽와(竹窩)라고 한다. 경상남도 창원시(昌原市) 북면(北面) 지개리(芝介里)에서 윤신(允愼)의 아들로 태어났다. 어머니는 이시애(李施愛)의 난 때 공을 세운 장말손(張末孫)의 손녀이다. 이황(李滉)의 문하에서 공부했고 성리학(性理學)에 대해 깊이 연구했다.



1558년(명종 13)에 생원, 진사 양시에 모두 합격했고 1564년 별시문과에도 급제했다. 형조좌랑을 거쳐 감찰을 지내던 중 1576년에 당하관 이하의 관리들을 대상으로 치르던 과거시험인 중시(重試)에 장원급제해 벼슬이 의금부도사에 올랐다.


강동(江東)에 유배돼 있던 아우 호익(好益)을 만나기 위해 평안도도사를 자원해 부임했다가 그곳에서 죽었다. 나라에서 우애와 효행을 기려 정려를 내렸다. 밀양(密陽)의 오봉서원(五峰書院)과 청효사(淸孝祠)에 봉안됐고 저서로 '취원당문집 (聚遠堂文集)'을 남겼다./사진-윤정숙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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