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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서원 137] 충렬서원병자호란 전승지에 세워진 '충렬서원'
  • 이승준 기자
  • 등록 2022-11-15 19:41: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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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준 기자] 충렬서원은 강원도 철원군 김화읍에 있었던 조선후기 홍명구를 추모키 위해 창건한 서원이다. 충렬사(忠烈祠) 또는 의열사(義烈祠)라고도 한다. 


1650년(효종 1) 지방유림의 공의로 충렬공 홍명구(洪命耉)의 절의를 추모키 위해 창건해 위패를 모셨다.



충렬공 홍명구(洪命耉)는 1596(선조 29)∼1637(인조 15). 조선 후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남양(南陽). 자는 원로(元老), 호는 나재(懶齋). 황해도관찰사 홍춘경(洪春卿)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광국공신 홍성민(洪聖民)이고, 아버지는 병조참의 홍서익(洪瑞翼)이며, 어머니는 심종민(沈宗敏)의 딸이다.


8세에 능히 시를 지으니 이항복(李恒福).신흠(申欽) 같은 선비들이 칭찬하고 장차 큰 사람이 되리라 했다. 1619년(광해군 11) 알성문과에 장원했으나 시골에 은거하다가 1623년 인조반정 후에 등용됐다. 1625년 부수찬이 되고, 1627년 직강을 거쳐 교리,이조좌랑.좌부승지 등을 역임햇다.




그 뒤 1633년에 우승지가 되고, 1635년에 대사간.부제학을 거쳐 다음 해에는 평안도관찰사로 나아갔다. 그 해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자모산성(慈母山城)을 지키다가, 적병이 남한산성을 포위했다는 소식을 듣게 됐다. 이에 근왕병(勤王兵) 2,000명을 거느리고 남하하던 중, 김화(金化)에 이르러 적의 대병과 맞닥뜨렸다.


시자(侍者)를 통해 노모에게 결별(訣別)의 글을 보낸 뒤, 1637년 죽음을 무릅쓰고 싸워 적 수백 명을 살상한 끝에 전사했다. 선봉 유림(柳琳)과 이일원(李一元)이 적을 완전히 격퇴하니, 병자호란 때 아군이 승리한 예는 이 전투와 김준룡(金俊龍)의 광교(光敎) 싸움뿐이었다.



뒤에 그는 이조판서에 추증됐다. 그가 순절한 터에는 1650년(효종 1) 김화 고을 사람들이 충렬사(忠烈祠)를 세웠다. 그리고 1652년 의열(義烈)이란 이름으로 사액됐다. 여주의 기천서원(沂川書院), 평양의 충정서원(忠正書院), 자산(慈山)의 의열사(義烈祠)에 제향됐다.


순조 때 자손 병륜(秉輪) 등의 주청으로 체천(遞遷: 제사를 받드는 자손의 대수가 끝나면 神主를 옮김)하지 않는 은전이 내렸다. 시호는 충렬(忠烈)이다.



병자호란 때 당시 평안도관찰사였던 홍명구는 평양을 거쳐 서울로 침입한 적병을 추격하던 중, 금화에 이르러 지방의 의병들과 힘을 합해 싸우다가 순절했다. 이에 주민들은 숭덕비를 세워 그의 충절을 기리고 명복을 빌어 왔고, 1652년 ‘의열(義烈)’이라 사액됐다.


당시의 경내 건물로는 사우(祠宇).강당.동재(東齋).서재(西齋) 등이 있었고, 선현배향과 지방교육의 일익을 담당해왔다. 그 뒤 충렬서원으로 개칭됐고, 1868년(고종 5) 대원군의 서원철폐령 때 훼철되지 않은 47개 서원 중의 하나로 존속됐다. 6.25사변 때 이 지역이 격전장으로 되면서 소실, 현재는 세 개의 비석만 남아 있다. 철원충렬사지(鐵原忠烈祠址)는 1997년 강원도 기념물로 지정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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